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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위해 청어를 잡으러 가다가 광풍에 배가 뒤집혀 4명이 죽다
1751년 11월 4일, 삭선진상품(朔膳進上品)인 생청어를 잡기 위해 10월 초부터 각 읍의 어선을 거느리고
해구(海口)
의 여러 곳에서 밤낮으로 그물질하였지만 날씨가 푹한 까닭에 전혀 자취가 없었다. 더욱 독촉하여 기일에 맞춰 봉진하라고 하였으나, 진해에서도 물고기의 자취가 계속 묘연하다고 하였고 마침내 끝내 잡지 못하여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게 된다. 봉진해야 하는 각 읍도 모두 똑같이 보고해 왔기에, 해당
감관(監官)
과
색리(色吏)
를 엄하게 다스려 신속히 잡아서 봉진하라고 엄하게 분부하였다.
이 와중에 10월 19일, 고성현 남촌면에서 생청어를 잡으러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광풍에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한다. 잡히지 않는 청어를 잡으려고 무리하게 바다에 나갔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사망자는 마병보군(馬兵保軍) 김명삼(金命三) 나이 26세,
격군(格軍)
이홍익(李弘益) 나이 16세, 사노(私奴) 찬장(贊長) 나이 17세,
모군(募軍)
추일담(秋日淡) 나이 16세이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영영일기(嶺營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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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재호(趙載浩)
주제 : 지방행정, 관찰사, 조세제도
시기 : 1751-10-19 ~ 1751-11-04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조재호, 김명상, 이홍익, 찬장, 추일담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4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문헌 속의 청어
청어(靑魚)는 냉수성 어류인데 옛날에는 우리나라 전 연안에서 어획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를 보면 전도의 연안에서 어획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청어는 일찍부터 산업적 가치가 높은 물고기로서 도처에서 어획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迎日縣) 산천조의 주진(注津)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에 청어가 반드시 먼저 여기에서 산출되는데 진헌(進獻)한 뒤에 제읍(諸邑)에서 이를 잡기 시작하며 그 산출의 다소에 의하여 다음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고 하고 있다.<br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청어자원변동에 관한 것이 종종 언급되어 있다. 《중종실록》 6년 4월 정해조에는 서해안의 위도에는 예전부터 청어가 다산하던 곳이나 1506년(중종 1) 이후부터는 청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인다.<br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는 봄철에 서남해에서 항상 다산하던 청어가 1570년(선조 3) 이후부터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생하였던 기이한 일들을 전하는 가운데,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근 10여 년 동안이나 전혀 나지 않고 요해(遼海)에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고 하고 있다.<br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 연안 각처에서 잡히기는 하였으나 자원의 성쇠소장은 심하였다. 많이 잡힐 때에는 최다 어획류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100여 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絶産)되었는데, 1798∼1799(정조 22∼23)년에 다시 나타나 조금 흔하여졌다.”고 하였다.<br />같은 책에는 또 “대체로 해주에서 나는 것이 국중(國中)에 넘친다. 기미년(1799) 이후부터 20미를 엮어서 1급으로 하여 동전 2, 3문과 바꾸었다. 순조 때의 경인·신묘년(1830∼1831)간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 헌종 때 을미년(1835) 이후에는 다시 점차 흔하여졌으나 기미년 이후만은 못하였다.”고 하여 청어자원의 변동과 이에 따른 가격 등락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br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서해안의 청어자원은 곳곳에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해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청어어장은 경상도의 동북연안으로 국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청어자원은 변동이 심하여 어장의 동점북천(東漸北遷)현상을 보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에는 부산·울산 등지에서도 청어가 잡히지 않게 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전 고성 현령(前固珹縣令) 민백범(閔百範)의 첩정은, 『고성현(固城縣) 남촌면(南卞寸面)에 사는 마병 보군(馬兵保軍) 김명삼(金命三) 나이 26세, 격군(格軍) 이홍익(李弘益) 나이 16세, 사노(私奴) 찬장(贊長) 나이 17세, 모군(募軍) 추일담(秋日淡) 나이 16세 등이 10월 19일에 청어(靑魚)를 잡으러 가던 차에 해구(海口)를 나가다가 갑자기 광풍을 만나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 신미년(1751) 12윌 29일. 이번에 도착한 창원 부사(昌原府使) 조완(趙晥)의 첩정(牒呈)은, 『창원부(昌原府)의 도회(都會)에서 10월 15일 봉진(封進)45)할 11월분 종묘(宗廟)의 천신(薦新)과 같은 달 삭선 진상품(朔膳進上品)인 생청어를 이번 달 초승[初生]을 시작으로 각 읍의 어선을 거느리고 해구(海口)의 여러 곳에서 밤낮으로 그물질하였지만 날씨가 푹한 까닭에 전혀 자취가 없습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독촉하여 기일에 맞춰 봉진할 뜻을 엄하게 신칙하여 써 보냈습니다[題送] 이번에 차사원(差使員) 진해 현감(鎭海縣監) 고수강(高壽崗)의 보고를 접수하여 보니, 『그물질하여 고기잡이를 한 지가 벌써 여러 낟이 되었건만 물고기의 자취가 계속 묘연합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 부사 조완의 첩정은, 『샅샅이 찾아보았건만 끝내 잡지 못하여 기한 내에 봉진할 수 없습니다.』라고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봉진해야 하는 각 읍도 모두 똑같이 보고해 왔으니 해당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신의 감영에서부터 우선 엄하게 다스리고 신속히 잡아서 봉진하라고 또 엄하게 분부하였습니다. 어산물(魚産物)이 일찍 잡히고 늦게 잡히는 것은 절기(節氣)와 관계가 있어서 비록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막중한 천신과 삭선을 기한 안에 봉진하지 못하였으니 몹시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립니다. 연유를 급히 보고드릴 일이기에 전차(詮次)를 아뢰옵니다. ■ 신미년(1751) 10윌 18일. 창원(昌原) 도회(都會)에서 10월 15일에 봉(封)할 11월 분 종묘(宗廟) 천신(薦新) 및 11월 삭선 진상품(朔善進上品)의 생청어(生靑魚)를 기한 내에 봉하여 올리지 못하니 황공대죄(皇恐待罪)한 연유(緣由)를 전에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천신은 근근이 수만큼 찾아내어 10월 20 일에 봉하여 올렸으나 생청어의 자취가 또한 갑자기 끊어져 밤낮으로 살피고 독촉했는데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막중한 삭선 진상품에 생청어를 연달아 봉하여 올리지 못하니 황공대죄하고 연유를 급히 보고드릴 일이기에 전차(詮次)를 아뢰옵니다. ■ 신미년(1751) 11월 4일. 전 고성 현령(前固珹縣令) 민백범(閔百範)의 첩정은, 『고성현(固城縣) 남촌면(南卞寸面)에 사는 마병 보군(馬兵保軍) 김명삼(金命三) 나이 26세, 격군(格軍) 이홍익(李弘益) 나이 16세, 사노(私奴) 찬장(贊長) 나이 17세, 모군(募軍) 추일담(秋日淡) 나이 16세 등이 10월 19일에 청어(靑魚)를 잡으러 가던 차에 해구(海口)를 나가다가 갑자기 광풍을 만나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 신미년(1751) 12윌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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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의 진상품 내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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