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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1896년의 봄날, 여중룡은 이날 일기에 자신이 창의(倡義)하는 이유에 대해서 썼다. 1895년 8월에 국모(國母)가 살해당한 끔찍한 사건은 신하로서 말하기도 힘든 일이고 반드시 갚아야 할 사건인데 아직 힘이 모자라 갚지도 못한 것에 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강제로 군주의 머리를 삭발하고 대신과 도성 안의 백성까지 삭발을 행하니 망측한 변고였으며 통탄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고을에서 창의한 사람이 많았다. 제천(堤川)의 류인석(柳寅奭), 여주(驪州)의 이춘영(李春永), 안동(安東)의 권세연(權世淵), 춘천(春川)의 홍재구(洪在龜), 충주(忠州)의 백우용(白禹鏞), 진주(晉州)의 노응규(盧應奎), 문경(聞慶)의 이강년(李康秊)이 모두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국 각 곳에 의병을 일으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경북의 상주(尙州)와 선산(善山), 김천(金泉)과 성주(星州) 사이의 수 삼십 군 가운데는 창의(倡義)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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