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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
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를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대,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
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
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녁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
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천휘록(闡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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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방(權訪)
주제 : 분쟁과 조정, 국정운영의 갈등
시기 : 1792-04-29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분쟁일기
인물 : 이존덕, 김방행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참여
조선시대 정치는 사림의 공론(公論)에 토대를 두고 운영됐지만, 관료가 아닌 유생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상소(上疏)뿐이었다. 선조(宣祖)대에 붕당정치(朋黨政治)가 확립된 뒤부터 정치세력들은 유생공론을 앞세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서인 또는 노론정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유소(儒疏)를 자주 이용했다. 이러한 유소의 정치적 악용을 막기 위해 영조는 모든 유소는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인 장의(掌議)의 동의를 거친 다음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이는 노론계 유생들이 성균관을 주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남인의 공론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인들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만인소(萬人疏)’였다. ‘만인’은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만인소 자체가 공론으로 검증되는 만큼 장의의 확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조대 만 명이 넘는 이들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만인소는 무엇보다 시대의 금기로 여겨졌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만인소 내용의 민감성은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영남남인들에게 있어 만인소는 목숨을 내건 승부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만인소를 막아서고 있었던 가장 거대한 벽은 ‘근실(謹悉)’이라는 제도였다. 이는 무분별한 상소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지만, 이 시기에는 반대 정파의 의견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미 노론이 장악하고 있던 성균관, 그들은 유독 영남 선비들의 상소에 회답을 회피했다. 1차상소이후 정조가 깊이 공감하자 여기에 고무된 영남 유생들은 다시 상소를 곧바로 준비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있던 영남계사림들은 성균관의 근실(謹悉)이 없다는 이유로 봉입되지 않았다하여 권당을 행하며 실력행사를 하게 된다. 성균관에 머물고 있는 유생들은 성균관의 대내적인 문제는 대개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대외적인 문제 가운데서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치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여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권당은 유생들이 문묘의 신삼문(神三門) 밖으로 네 번 절을 하고 일제히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권당은 초기에는 유학의 근본 이념에 맞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행하여졌지만 후기에 갈수록 우세한 당파(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 여론의 데모화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장의가 노른 1인, 소론 1인이 뽑혔던 데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책 결정이나 인사 문제, 문묘의 승무 문제 등에 유소와 권당의 영향은 크게 작용하였고, 관리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때에는 집권당파인 노론에 대항하는 권당을 실행하였다. 이는 당시 정조가 만인소에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정조가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들어오라는 뜻을 전하여 권당을 그치게 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4월 29일
삼계서원으로 돌아가는 인편에 다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우도右道에 통문을 발송하여, 각각 유사有司를 선출하여 각 읍의 소자(䟽資:상소에 필요한 비용)를 거두어 보내는 거점으로 삼게 하였다. 칠곡柒谷 유생 이동섭李東이 소청에 단자를 올려 소자 10냥 및 인동仁同·칠곡·대구의 명단을 보내왔다. 듣건대 방외方外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방외의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향유鄕儒들이 격례格例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장대張大해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입勸入하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석식당夕食堂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이지영李祉永·권평權坪·오대익吳大益·윤필병尹弼秉·이경명李景溟·이일운李日運·이재관李在寬·이시선李是銑·권상희權尙熺·이원규李遠揆·조신행趙愼行·우문하禹門河·목면중睦勉中·이재신李在新·유영원柳盈源·이존덕李存德·이은유李殷儒·조재성趙材成·목경중睦景中·이후연李厚延·유광진柳光鎭·신석상申奭相·홍낙문洪樂文·홍시제洪時濟·이중순李重淳·서유기徐有沂 등이 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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