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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
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
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
이 일찍이
연(燕)
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
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
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
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
어서각(御書閣)
’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
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
봉림대군
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충무사(忠武祠)
는
을지문덕(乙支文德)
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
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
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정해문(靜海門)
으로 해서 들어가
무열사(武烈祠)
를 지나갔다. 이 사당에는
상서(尙書)
석성(石星)
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의 영정을 받든다. 용비늘 무늬의 붉은색 웃옷[龍鱗紅袍, 용린홍포]에 성문검(星文劍)을 든, 늠름하여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뒤흔들듯 한 위풍이 있다. 평양은 단군ㆍ기자ㆍ동명(東明) 세 왕의 옛 도읍지일 뿐만 아니라 또 고적으로 볼만한 것이 있다. 임진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모란봉(牧丹峯)
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이여송 장군이 유격장군(游擊將軍)
오유충(吳惟忠)
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공격하게 하고, 몰래 서남쪽 길을 잡아 갔는데 그것은 왜를 속이기 쉽기 때문이었다. 조선 병사들은
조승훈(祖承訓)
등과 합하여 복장을 흉내 내어 잠복했다. 이 장군이 북을 치고 행진하여 성 밑에 도달하자 왜의 포탄과 화살이 비같이 쏟아졌다.
양원(楊元)
등은
소서문(小西門)
으로 올라가고, 이 장군은
대서문(大西門)
으로 해서 더듬어서 전진했는데 화약이 일제히 터졌다. 유충(唯忠)은 총탄에 맞아 가슴이 뚫렸는데도 그대로 분발하여 외치며 전투를 독려하였고, 왜는 마침내 기가 꺾여 밤중에 달아났다. 그 두목
종일(宗逸)
ㆍ
평수충(平秀忠)
ㆍ
평수신(平秀信)
을 죽였고, 그 나머지는 불에 타죽고 또
동성(東城)
으로 뛰어나가 익사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수급 수천을 얻었다. 명나라 군사가 크게 이긴 곳이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3-11-0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서성, 을지문덕, 김양언, 이여송, 오유충, 조승훈, 양원, 왜적 장수들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때 평양전투
평양성전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이다.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즉,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 군대를 편성한 대오)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부근 숲에 드문드문 걸어놓고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도였다.
13일 대동강에 도착한 고니시 군대는 강 언덕에 10여 둔(屯)을 만들고 짚으로 막을 짓고는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윤두수·김명원이 장사 400명을 뽑아 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하게 하고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강을 조용히 건너 적진을 기습, 일본군을 사살하고 300여 필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나 조금 뒤에 여러 둔의 적이 이르러 이에 아군이 물러나 배를 타려 하였다. 그러나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강 중류(中流)로 적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해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으로 건너오자 적이 물이 얕아 건널 수 있음을 알고 모두 건넜다. 때문에 이곳을 지키던 군사는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윤두수 등이 전세가 불리함을 감지, 먼저 성중 사람들을 내보내고 무기를 풍월루(風月樓) 연못에다 버리고 성을 빠져 나왔다.
제2차 전투는 1592년 7월에 있었다. 조선의 원군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에게 요동 수비병 3,000명으로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조승훈은 북로(北虜)와 여러 번 싸워 이겨 공을 세운 경험이 있어 일본군을 가볍게 본데다가, 평양에는 일본군의 수가 적다는 말을 듣고 순안(順安, 평안남도 평원 지역의 옛 지명)을 떠나 평양성 밖에 이르러 도원수 김명원이 거느린 3,000명의 병사와 합세,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한 조승훈은 비바람이 심한 야간을 이용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일본군은 평양 성문을 열고 유도 작전으로 명군과 조선군을 성내로 유인, 조총으로 기습 공격하였다. 이에 악전고투하다가 유격장 대조변(戴朝弁)·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자 많은 사상자와 남은 군사를 수습해 퇴각하였다.
제3차 전투는 1592년 8월에 벌어졌다. 도원수 김명원은 일본군이 평양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약해졌다는 보고를 받고 이원익·이빈(李賓)에게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때 조방장(助防將) 김응서(金應瑞), 별장(別將) 박명현(朴命賢) 등이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20여 둔으로 나누어 평양 서쪽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했으며,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000명을 거느리고 중화(中和, 평안남도 중화군)를 지켰다.
세 길로 나누어 진격, 보통문(普通門) 밖까지 육박, 적의 선봉과 싸워 다소의 전과를 올렸으나 곧 적의 대군이 밀어닥쳐 패퇴하였다. 10월에는 다시 관군과 승군(僧軍)이, 11월에는 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계획으로만 그쳤다.
그 뒤 제4차 전투가 1592년 12월에 있었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이에 조선의 이일(李鎰)·김응서의 군대와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어서 오유충(吳唯忠)·사대수(査大受)와 승군은 모란봉(牡丹峰),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은 칠성문, 이여백(李如柏)·이방춘(李芳春)은 보통문, 조승훈·낙상지(駱尙志)는 이일·김응서와 함께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며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는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들어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죽을힘을 다할 것을 염려,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 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니시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 황해도 황주군)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 황해도 봉산군)에 이르렀는데, 이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
원문정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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