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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회전에 변계종무를 고친다는 칙서를 받다
배삼익은 먼 길 떠나는 사람을 전별해 주는 연회를 받기로 하였지만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서장관을 보내어 예부에 문서를 올린 일에 대해 좌시랑(左侍郞)에게 아뢰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당신들이 문서에 기록한 내용대로 잘못된 것을 고쳐 줄 것을 황제께 아뢰었고 별도의 문서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으니 조만간에 조칙을 내려 당신들에게 자세히 알려 줄 것이다.”
다음날 일행이 대궐로 가서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칙서를 받았다.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조선 국왕 이혈(李娎)에게 칙서로 말하노라. 앞서 그대는 그대 조부인 태조의 성과 휘(諱)가 오랫동안 잘못 쓰여 왔다고 여러 차례 누명을 씻어주기를 청해 왔기에, 새로 편수하는 『대명회전』에 이 사실을 상세히 기재하라고 이미 허락했다. 그러나 편찬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 그대가 또 이전의 청을 되풀이하니, 특별히 사관(史館)에 명해 베껴 보여주노라. 이제 새로 편수하는 『대명회전』원고에 기재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李成桂)는 고향이 조선의 전주(全州)이며 먼 조상 중에 이한(李翰)은 신라 때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이한의 6대손 이긍휴(李兢休)는 고려 때 사람이다. 이한의 13대손 이안사(李安社)는 이행리(李行里)를 낳았고 이행리는 이춘(李椿)을 낳았으며 이춘은 이자춘(李子春)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이성계의 아버지이다. 이인임(李仁任)이란 사람은 경산부(京山府)의 아전인 이장경(李長庚)의 후손이다. 처음 왕(王) 씨인 공민왕(恭愍王) 전(顓)은 아들이 없어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 신돈(辛旽)의 아들인 우(禑)를 길러 아들로 삼았는데, 공민왕은 총애하던 신하 홍륜(洪倫)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인임이 국가의 일을 담당하여 홍륜 등을 죽이고 우를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우가 왕위에 있은 지 16년 만에 장수를 보내 요동을 침범하게 하였는데, 이성계도 부하 장수가 되어 파견된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압록강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돌릴 것을 계획하자, 우는 두려워 임금의 자리를 그의 아들 창(昌)에게 주었다. 이때 공민왕의 왕비인 안(安) 씨는 백성들을 동원해 창을 축출하고 왕 씨의 손자인 정창군(定昌君) 요(瑶 :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우와 창을 죽이고 이인임을 축출하였다. 이윽고 요가 함부로 백성들을 도륙하자 백성들이 요를 따르지 않고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국가의 일을 맡게 하였으며, 황제께 표문을 보내 아뢰어 국왕이 되라는 명을 받았다. 마침내 이름을 바꾸고 요를 궐 밖의 집으로 쫓아내고 그곳에서 여생을 살도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 보인 항목의 사유는 그대가 본래 아뢰어 온 그대로이다. 책이 완성되면 잘 살펴보고 반포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의 나라에 보내주겠다. 먼저 그대들에게 알려주어 이 사실을 알게 하노니, 너희들은 천자의 은혜를 깊이 입었고 선조의 덕을 크게 드러냈으니 삼가 변방 제후국(諸侯國)의 의리를 다하고 영원히 충성과 효도를 다하기를 바란다. 삼가고 또 삼가서 행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00여 년 동안 모함을 받은 것을 하루아침에 깨끗이 씻어버렸고 황제의 칙서가 간곡하여 만 리 밖의 사정에 대해 밝게 알고 계셨기에 황제의 은혜에 감격하여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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