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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과거시험보다 신기한 용안(龍顔)
아침 일찍, 신포(新浦) 활터의 동자가 친구들의 편지를 전하러 노상추의 집에 왔다. 이에 활터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던 노상추는 도성에 갈 것을 결심하였는데 친구들의 편지에는 과거시험이 엿새 후인 10월 9일에 있다고 하며, 시일이 매우 급하므로 자신들 먼저 출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노상추도 이것저것 잴 겨를이 없었다. 빨리 출발한다고 해도 과연 과거시험 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상추는 학봉(鶴奉)과 함께 서울에 동행하기로 약속하고 이튿날 남자종 손돌(孫乭)을 데리고 일찌감치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100여 리를 넘게 가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고 노상추와 동행하는 활터의 친구 중에서는 다리가 아파 더는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부지런히 나아간 덕에 과거시험 하루 전인 10월 8일에 한강을 건너 도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픈 다리를 쉬게 해 줄 새도 없이 10월 9일에는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무과 시험을 치렀다. 이후 11일에는 훈련원의 활터에서 초시를 보았는데, 정유목(鄭惟穆) 이외에는 노상추와 동행한 모든 사람이 다 떨어졌다. 회시는 22일로 정해졌다가 다시 27일로 미뤄졌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노자가 떨어져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번 과거시험은 급하게 열리는 바람에 지방의 많은 거자(擧子)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노상추는 가까스로 시일에는 맞춰 왔으나, 결과는 낙방이었고 실망감에 일찌감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함께 올라온 여러 친구들이 좀 더 서울에 머물기를 권했다. 결국, 함께 길을 떠나온 학봉만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고 노상추는 정명준(鄭明俊), 박상택(朴相宅)과 함께 여사(旅舍)에서 며칠을 더 머무르기로 하였다.
지난 2월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임금의 행차를 멀리서나마 구경하고 싶어 한참을 길목에서 기다렸으나 아쉽게도 임금의 용안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국조(國朝) 선대 분묘의 지석(誌石)을 얻어 묘우(廟宇)을 건립하고 능(陵)으로 봉하는 의례가 거행될 예정이었기에 다시 임금의 행렬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노상추는 의례가 거행되는 날인 22일, 친구들과 함께 새벽같이 도성 남쪽으로 가서 좋은 자리를 잡고는 위엄 있는 의식을 구경하였다. 자리가 워낙 좋았기에 용안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80세의 나이 든 임금은 서리가 내리는 추운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풍차(風遮)나 휘항(揮項)으로 귀를 가리지 않은 채였다. 그러면서도 추운 기색이 하나 없으니, 노상추는 임금의 정정함에 내심 감탄하였다. 곧이어 행렬이 움직여 서빙고로 향했고, 서빙고 나루에서 위패를 실은 대가는 누선(樓船)에 올라 강을 건넜다. 그 뒤 과천현까지 갔다가 돌아와 환궁하니, 일정이 모두 끝난 때는 어느덧 밤이었다.
용안을 볼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27일에 열리는 회시는 임금이 친람(親覽)하였기에 노상추는 시험을 볼 것도 아니면서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앞으로 새벽부터 나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시험을 마치자 임금을 태운 연이 궁궐 문밖으로 나왔다. 지난번보다 가까이에서 용안을 본 노상추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다음날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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