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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용강산성의 겨울, 왕세자가 홍역에 걸리다
1592년 12월 16일, 왕세자가 머물고 있는 평안남도 용강산성에 눈이 내렸다. 침전에 있던 왕세자에게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내의원의 의원들은 급히 들어가 왕세자를 진찰하였다. 왕세자는 이 며칠 전부터 기침을 하고 있던 터라 내의원들은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왕세자는 경연(經筵)을 폐하지 않았고 12월 14일에는 몸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 보였다. 그날 내의원
제조(提調)
였던
정탁(鄭琢)
이 문후를 여쭙자 왕세자는 “괜찮소”라고 말하였다.
정탁은 15일 다시 왕세자의 문후를 여쭈었다. 그리고는 내의원 의관
이공기(李公沂)
·
남응명(南應命)
·
김중부(金仲孚)
로 하여금 왕세자를 진찰하게 하였다. 왕세자는 머리가 아프고 번열증이 나며 기침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의관들이 진료를 하니 왕세자의
육맥(六脈)
이 뜨거나 미끄러지고 있었다. 왕세자는 “12일 밤에 침소가 너무 더워 창을 열어 놓고 자다가 그만 감기에 걸려 이런 증세가 있었소”라고 제조(提調)와 의관들에게 말하였다. 또 의관들이 왕세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직 붉은 점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관들은 왕세자에게 홍역 증세가 있음을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삼소음(參蘇飮)
을 달여서 올리고, 또
생맥차(生脈茶)
를 마시게 하였다.
17일 아침 일찍 왕세자에게 문후를 여쭈자 왕세자는 “병세가 여전하다오”라고 답하였다. 이날 오전에 왕세자의 얼굴에 돋은 반점은 그 개수가 드물지도 않고 빽빽하지도 않았다. 이에 의관들은
삼두음(三豆飮)
·
진미음(陳米飮)
·생맥차(生脈茶)를 함께 다려 마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
을 제조하여 왕세자에게 올렸다.
18일 아침 왕세자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었다. 두통과 열이 이마에서부터 먼저 사라졌고, 붉은 점도 옅어졌다. 의관들은 홍역에
희두토홍환(稀痘兎紅丸)
이 병증에 효과가 있다고 정탁에게 말해 주었는데, 정탁은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에게 아뢰고서 용강현령 신현(申俔)에게 살아있는 토끼 한 마리를 잡으라 하고 의관들이 섣달(12월) 8일 살아있는 토끼의 피를 받아 약방문대로 약을 지어 올리라 하였고, 왕세자는 복용법대로 이를 복용하였다. 그러나 왕세자는 열이 몸 전체에 있었고 특히 인후(咽喉)에 염증을 수반한 통증이 있어 의관들은 이에 따른 약을 계속 올렸다.
19일 왕세자의 열은 3분에 2정도로 감소였고 얼굴쪽에 있는 붉은 반점은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20일 저녁에는 몸 전체에 난 붉은 점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인후의 통증도 나아졌다.
21일 부터는 매일 세 차례씩 신료와 의관들이 왕세자를 문안하였는데, 열은 내리는 것 같고 사지에 먼저 생긴 붉은 점은 이미 절반이 사라졌다. 그러나 인후의 통증과 기침은 완쾌되지 않아
가감박하전원(加減薄荷煎元)
을 몇 차례 시술하고 이를 이어
용뇌말(龍腦末)
을 의관들이 왕세자의 목구멍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22일에는 왕세자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인후의 통증 역시 사라졌으며 열도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 12월 25일 점심 때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정탁, 승지
유희림(柳希霖)
, 사관(史官) 이진(李軫), 그리고 의관 이공기·남응명·김중부가 함께 입시하여 왕세자의 기후를 자세히 살폈는데, 얼굴이 잠시 수척해졌을뿐 별다른 열이 없었고, 음성도 예전으로 돌아왔으며, 붉은 반점도 사라져 흔적이 없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피난행록(避難行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정탁(鄭琢)
주제 : 전쟁과 피란, 전쟁과 변고
시기 : 1592-12-16 ~ 1592-12-25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용강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광해군, 정탁, 이공기, 남응명, 김중부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전쟁 중의 왕세자 치료
왕세자가 평안남도 용강으로 옮긴 날은 1592년 11월 16일이었다. 선조가 몽진하면서 6개월이 넘는 기간 왕세자는 노숙을 하거나 제 때 식사도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용강에 온 직후부터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내의원 의관들의 진료를 내내 받아야 했다. 이는 오랜 기간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과중한 업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12월 12일부터 왕세자는 기침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내의원 의관들은 홍역임을 의심하였고 이에 대한 집중 치료에 들어간다. 그리고 12월 25일 용강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는데, 20일경부터 겨우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왕세자 광해군은 용강에 있던 내내 몸이 안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자가 완전히 호전되고 이튿날 세자빈 유씨가 다시 홍역에 걸리는데, 이는 전염된 것으로 보인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92년 12월 16일(신축) 눈이 내렸다.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바로 이 날, 왕세자께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十六日辛丑. 雪. 藥房問安. ○是日, 王世子癍疹始形. 12월 17일(임인)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十七日壬寅. 藥房問安. 12월 18일(계묘)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이 날, 다시 장계 한 편을 행재소에 올렸다. 섣달 매서운 추위에 성상(聖上)의 안부가 어떠하신지 알지 못하여 지극한 근심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 와중에 동궁의 행차는 여전히 용강 산성(龍岡山城)에 머물고 있으며 게다가 동궁께서 얼마 전부터 기침을 많이 하시어 평상으로 회복할 기미가 없습니다. 이 달 12일부터는 다시 강녕하지 못한 몸 상태로 여전히 서연(書筵: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것)을 폐하시지 않으시더니 14일 몸조리를 잘하지 못하시어 문후를 여쭈자 “괜찮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일 문후를 여쭙고 의관 이공기(李公沂)ㆍ남명응(南應命)ㆍ김중부(金仲孚)가 들어가 진료토록 하니 두통이 있고 아프고 번열증이 나며 기침이 멈추지 않고 육맥(六脈)이 뜨거나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동궁께서 이는 대개 “이전 21일 밤 침소나 너무 더워 창을 열어 놓고 자다가 감기가 걸려 이런 증세가 있었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동궁을 살펴보니 아직 붉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증세가 의심스러워, 증세가 의심스러워: 이 때 정탁과 의관들은 의심한 증세는 홍역인 것 같다. 아래에서 ‘창진’(瘡疹), 즉 홍역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에 의관 등과 깊이 상의하여 삼소음(參蘇飮)을 달여 올리고 아울러 생맥차(生脈茶)를 올렸습니다. 17일 아침 일찍 문후를 여쭈자 “증세가 한결 같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사시(巳時: 일반적으로 오전) 얼굴에 붉은 반점이 돋았는데 그 개수는 드물지도 않고 빽빽하지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세는 일반적으로 번열증입니다. 그러므로 삼두음(三豆飮)ㆍ진미음(陳米飮)ㆍ생맥차(生脈茶)를 함께 다려 드시도록 하였습니다. 같은 날 저녁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을 제조하여 올렸습니다. 18일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리니 두통과 열 기운이 모두 조금 사라지는 것 같은데, 이마부터 먼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하셨는데, 대체로 평온해지셨습니다. 이전 제가 민간에서 크고 작게 홍역이 유행할 때 의관 등이 신에게 희두토홍환(稀痘兔紅丸) 희두토홍환(稀痘兔紅丸): 이 약 자체의 제조법은 섣달 초8일에 생토(生兎)를 잡은 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효과가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신은 영상(領相: 최흥원)에게 말하고서 본도(本道)의 현령(縣令) 신현(申俔)에게 살아 있는 토끼 한 마리를 잡으라고 하고 또 의관 이공기ㆍ남명응ㆍ김중부에게 명하여 섣달 8일 토끼의 피를 받아 약방문 그대로 조제를 하여 올리라 했는데, 왕세자께서 복용법대로 복용하셨다고 합니다. 다만 산성의 혹한 추위에 냉랭한 거처가 동궁의 병을 다스리는 데 크게 방해가 될까 근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절차를 갖추어 아뢰옵니다. 十八日癸卯. 藥房問安. ○是日, 又封狀啓一道于行在所. ○臘寒嚴沍, 不審聖體安否若何, 無任憂慮之至. 且中東宮行次, 尙留龍岡山城, 而頃患欬嗽之症, 未幾平復. 自本月十二日, 復有未寧之候, 而猶未廢書筵, 十四日, 詮次始聞失攝, 問安則以“平安”答之. 十五日問安, 請令醫官李公沂ㆍ南應命ㆍ金仲孚入診, 則頭痛煩熱, 欬嗽不止, 六脈浮滑. 蓋“以前十二日夜, 寢房過暖, 開窻感冒, 仍致此症”云. 且審東宮未經癍疹, 證涉疑似, 故與醫官等十分商議, 煎進參蘇飮, 兼進生脈茶. 十七日, 早朝問安, 則“症候一樣”云. 當日巳時末, 詮次聞之, 面上癍疹始現, 箇數不稀不密. 此症例爲煩熱. 故三豆飮ㆍ陳米飮ㆍ生脈茶, 幷煎待候. 同日夕, 劑進荊防敗毒散. 十八日, 早朝問安, 則頭痛熱勢, 幷似稍減, 額上所發, 稍覺先除, 大槪平順. 前此閭閻, 大小瘡疹熾發, 醫官等, 告臣以稀痘兔紅丸之妙. 臣言于領相, 令本道縣令申俔, 捉得生兔一口, 令醫官李公沂ㆍ南應命ㆍ金仲孚, 及臘八日取血, 一依方文劑入, 王世子卽依法進服云. 但山城苦寒, 居處疏冷, 深恐有妨調攝. 以此憫慮不已. 詮次善啓. 12월 19일(갑진) 약방이 문안하였다. 이 날, 다시 장계 한편을 행재소에 올렸다. 이 달 19일, 통원보(通遠堡)로 가는 도중에서 이산보(李山甫)를 만나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이 진군하던 곡절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또한 이여송 제독이 당일에야 통원보에 온 것도 알았습니다. 신(臣)은 이에 통원보로 나아가 정문(呈文)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시(申時)에 이제독이 통원보에 들어오자 신이 나아가 이름패를 올리니 제독이 먼저 역관을 불러 들여 정문(呈文)의 사리를 물었습니다. 역관이 대략 설명하자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며 곧바로 패문(牌文)을 발행하여 그 자리에서 야불수(夜不收)에게 칙명을 내려 요동(遼東)에서 낙후된 군마를 재촉하여 출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신을 불러 예를 행하였는데, 정문에 대해서는 제독이 계단 위에 올라 절반 정도 읽더니 자신의 동생 이여백(李如栢)을 돌아보고 주고는 “나는 이미 알고 있고, 이미 군마를 재촉하여 출발하라고 명하였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고하기를 “국왕께서는 제독이 이미 요동에 왔다는 것을 아시지 못하여 자문(咨文)을 갖추지 못하였고, 지금 배신(陪臣)으로 온 행색 그대로 문안을 드리오며, 또한 긴급한 사정을 아뢰고자 합니다. 명나라 대군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는데 적들이 만약 낌새를 알아채고 먼저 움직인다면 안정(安定: 평양 부근)을 지키고 있는 명나라 장수가 결코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인은 급히 군대를 진군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독은 “의주(義州)에 먼저 도착한 장군들이 먼저 진군하고자 청하였지만, 나는 먼저 식량과 말먹이가 걱정되오. 지금 그대의 말을 돋고 나는 곧바로 3ㆍ4천의 병사와 말을 보내고 또 이미 의주에 도착한 남병(南兵)을 출발시켜 도합 1만 군사를 순안(順安)에 진주하라고 명하였소”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신도 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바로 작은 나라 조선이 바라는 것이어서 이루 감격해마지 않습니다. 원컨대 언제 출발을 시킬 것인지 듣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독의 동생 이여백이 뒤에 있다 눈을 깜빡거리자 이제독이 그 뜻을 알아채고는 계단 아래로 내려와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병마를 보내려 하였으나 국왕의 자문(咨文)을 보내 못하였소. 그대는 먼저 역관 한 사람을 보내 자문을 갖춰 오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군대를 출동시킬 것이오. 그대는 군량[兵糧]의 수목을 잘 파악하여 목록으로 작성하여 자져온다면 함께 봉황성(鳳凰城)으로 가서 전송하겠소”라고 하면서 송응창(宋應昌: 宋爺)이 있는 곳으로는 가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그 뜻을 살펴보니 이산보가 나아갈 때 이여송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에게 자문(咨文)을 올렸는데, 정문(呈文)이 이미 올라가 있어 자기가 경략 송응창에게 일을 미루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자문을 올리지 않았기에 지금 이러한 말이 있었고, 신이 송응창이 있는 곳으로 갈까 염려하였으므로 함께 봉황성(鳳凰城)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신이 답하기를 “마땅히 하교하신 바를 따라야 하지만 우리 나라는 적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염려하므로 먼저 병마를 보내시길 다시금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독은 좌우를 물리치고 신의 앞에 서더니 역관 표정로(表廷老)에게 “내가 먼저 병마를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적들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먼저 달아날까 염려해서이다. 또한 순안(順安)의 군량미를 만 명이나 되는 우리 군대가 먼저 가서 먹어 치운다면 대군(大軍)이 나중에 올 때 그대의 국가가 어떻게 대접하고 마련을 하겠는가? 그대는 왜자(倭子)들이 이와 같이 앞뒤를 잘 헤아리지 못하여 명나라 군대를 매우 두려워한다고 말하였으니 적이 서쪽으로 내려오기는 반드시 쉽지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귓속말로 “나는 유격(游擊) 심유경(沈惟敬)이 군사 기밀을 은밀히 빼돌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적들이 먼저 도망갈까 우려한다. 어찌 군사 조금을 떼어 그 기밀을 누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황해도의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신은 이시언(李時彦)ㆍ김경로(金敬老)ㆍ이정암(李廷馣)이 적을 방어하며 대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평양의 적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것을 물으면서 믿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소인이 의주에 있을 때는 이러한 말을 듣지 못하였고 다만 적의 병력이 증원된다고만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제독은 이에 심가왕(沈家旺)에게 화를 내었고 동참장(佟參將)과 답응관(答應官)에게 가자 압가왕(押家旺)이 왔는데, 가왕은 그러한 소리를 듣고는 무릎을 구부리니, 제독이 눈을 부릅뜨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평양의 적들이 모조리 도망갔고 말하였고 황해도 지역은 이미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적들이 어찌 숨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평양의 적 수자를 물었는데, 가왕(家旺)이 팔천 명 쯤이라 대답하니, 제독은 노여워 꾸짖으며 “비록 십만의 적이 있더라도 내는 마땅히 모두 소탕할 것인데, 나는 너희가 나를 속이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성지(聖旨)를 받아 조선의 국왕을 서울로 환도시켜야 하는데, 너희들이 강화를 논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나는 심유경을 순안(順安)으로 잡아들여 평양에 입송(入送)시켜 그가 한 행위를 살펴 군율대로 처리하겠다”라고 하였고, 좌우에서 지키는 가왕들에게 명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신에게 강의 입구를 잘 지켜 잡인(雜人)들이 몰래 다니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신이 답하기를 “대인께서 언제 강을 건너오실지, 군사의 수는 몇 명인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께서는 언제 오실지 듣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여송 제독은 “내가 강연대(江沿臺)에 이르면 곧장 군마를 정비하고, 정비를 완료한 후 군마를 도강시킬 것이오. 이번 달 25ㆍ26일이면 반드시 여기에 올 것이니, 내가 강을 건너는 것은 27일 정도일 것인데, 강을 건너면 될 수 있으면 순안(順安)으로 가려하오. 만약 의주에 가서 비로소 군대의 대오를 정돈하면 다른 군량을 소비할까 염려되고, 군사의 수는 4만이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께서는 다만 강연대에만 오셔서 군량과 말먹이를 운송하고 문서(文書)만 통할 것이니, 강을 건널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라고 답하였습니다. 신은 물러나 병량의 수목(數目)을 갖추고 다음날 명을 받은 대로 친히 그 수목을 올린 후 함께 봉황성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런데 정문(呈文)의 초를 잡고 아울러 등서(謄書)하는 것은 소통사(小通事) 김덕련(金德連)의 처소에서 준비하여 먼저 올려 보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속히 긴급한 사정을 급히 자문(咨文)으로 갖춰 밤을 세워서라도 빨리 보내심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안(按): 이 달의 이 날에 정탁 선생은 성천(成川)에 있었고, 사신(使臣)으로 압록강을 건너간 일이 본래 없었다. 이 상소문은 분명히 다른 사람의 일이지만 정탁 선생의 장계 가운데 등록(謄錄)되어 있다고 전해 들어 이렇게 넣게 되었다.] 十九日甲辰. 藥房問安. ○是日, 又封狀啓一道于行在所. ○本月十九日, 於通遠堡道中, 逢李山甫, 細聞李提督進軍曲折. 且知提督以當日到通遠堡. 臣仍進同堡, 具呈文待候. 申時, 提督入堡, 臣卽詣通名, 提督先呼譯官入來, 問呈文事理. 譯官略陳則曰, “我已知道”, 卽發牌文, 面勅夜不收, 催發遼東落後軍馬矣. 仍召臣行禮, 卽爲呈文, 則提督出立階上, 覽文至半, 顧授其弟如栢, 答曰, “我已知道, 已令催發軍馬矣.” 臣告曰, “國王不知老爺已到遼東, 不得具咨, 只令陪臣來候行色, 卽仍行問安, 且令呈稟緊急事情矣. 大軍旣不發去, 賊若知幾先發, 則安定老爺決難扺當. 願老爺急速進兵.” 答曰, “義州先到將官, 請欲先進而, 我慮先耗糧草矣. 今聞儞言, 我當卽送三四千兵馬, 且發已到義州南兵六千, 合一萬, 令進駐順安.” 臣答曰, “此正小邦所望, 不勝感激. 願聞何時發送.” 如栢在後眴之, 提督就聞其語, 仍下階下, 答曰, “我初欲送兵馬, 而不見國王咨. 儞可先送一譯, 具咨進來, 我當發兵. 儞則計開兵糧數目以俱來, 當偕往鳳凰城送儞矣.” 仍戒勿往宋爺所, 觀其意則李山甫進去時, 提督以呈咨經略, 呈文於已, 有若以已左於經略, 而不爲具咨, 故今有是語, 而慮臣仍往宋處. 故欲與俱到鳳凰城矣. 臣答曰, “當依下敎, 但小邦, 以賊之先發西下爲慮, 更願先送兵馬.” 提督辟左右, 就立臣前, 語表廷老曰, “我非不欲先送兵馬, 而恐此賊聞奇先遁. 且順安軍糧, 萬軍先往喫下, 則大軍後至, 儞國何以接濟? 儞謂倭子如是無謀乎渠極畏天兵, 必不容易西向.” 仍又細語曰, “吾聞沈游擊潛通軍機, 深恐賊先遁去. 豈可先送偏師, 以泄其機耶?” 且問黃海道, 亦有把截者耶, 臣以李時彦ㆍ金敬老ㆍ李廷馣爲對. 又問平壤賊盡遁云, 信否. 臣答曰, “小的在義州時, 則不聞此語, 只聞添兵矣.” 提督仍怒呼沈家旺來, 適佟參將答應官, 押家旺來到, 家旺應聲來跪, 提督瞋睨曰, “儞言平壤賊盡遁, 黃海道旣有把截, 則賊安能遁去耶?” 仍問平壤賊數, 家旺答以八千, 則提督怒罵曰, “雖有十萬, 我當盡勦, 我知汝詐矣. 我受聖旨, 當還國王于京都. 汝言講和何耶? 我當拿唯敬到順安, 入送平壤, 觀其所爲, 依律處之”, 令左右保授家旺, 無令逸去. 仍戒臣攔截江口, 無令雜人偸去. 臣答曰, “願聞老爺何日渡江, 兵數幾何, 宋爺幾日當來.” 答曰, “我到江沿臺, 就整軍馬, 整了卽渡軍馬. 今廿五六當畢至, 我過江在廿七, 過江則可卽向順安. 若到義州, 始爲整軍, 則恐費他糧料, 軍數則四萬. 宋爺則只到江沿臺, 運糧草通文書而已. 何用過江.” 臣退具兵糧數, 明日依所命親呈後, 偕向鳳凰城計料. 而呈文草幷爲謄書, 小通事金德連處準授, 先爲上送. 伏望速將緊急事情, 急具咨星夜馳送, 似爲便當. [按. 是月是日, 先生在成川, 本無出使越江之事. 此狀啓明是他人事, 竊恐以傳聞謄錄於狀啓中耶, 姑存之.] 12월 20일(을미) 내의원 의관이 들어 세자의 문후를 살폈다. 지난 밤, 왕세자께서 머무시던 임시 숙소에서 불이 났다. 이 날,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동궁에게 붉은 반점이 나타난 증세가 평온해진 것을 이 달 18일에 올린 장계에서 이미 아뢰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 왕세자의 기후(氣候)는 여전히 번열증이 있고 인후(咽喉)에는 염증을 수반한 통증이 있어서 죽을 먹어 넘기기도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신과 의관 등은 깊이 상의하여 증세에 따른 약을 올렸는데, 가감박하전원(加減薄荷煎元)ㆍ사화진미음(舍化陳米飮)ㆍ삼두음(三豆飮)ㆍ녹두죽(菉豆粥)ㆍ생리즙(生梨汁)을 연이어 올려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밤, 인후가 잠시 열린 틈을 타 곽갱화연반(藿羹和軟飯) 몇 숟가락을 올렸고, 또 원미진미음(元米陳米飮)을 두 세 차례 올렸으며 정화수로 빈번히 입안을 헹구었습니다. 19일 열은 3분의 2정도 감소하였고 이마와 볼에 먼저 발한 곳은 점차 멈추게 되었습니다. 20일 아침 몸의 상태가 마찬가지였으나 이경(二更)에 잠이 들자 사지와 가슴ㆍ복부를 따라 나중에 열과 반점이 발한 곳 역시 증상이 멈추었습니다. 번열증은 매우 감소하였고 목의 통증 역시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삼경(三更) 즈음에 동궁의 임시 막사 바깥에 새로 만든 세 칸의 막사에서 불이 났는데, 이 때 마침 깨어 있으셨으므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풍천 부사(豐川府使) 황윤용(黃允容)과 순찰사(巡察使) 이정암(李廷馣)에 대한 계문(啓聞)이 올라가 파직되었고 남억(南嶷)을 임시로 파견한다 합니다. 황윤용이 죄를 범한 경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으나, 풍천은 연안의 요충이 되는 고을이고, 황윤용의 근력도 그다지 쇠하거나 바꿀 만 한 것이 아닙니다. 또 풍천부의 민심을 얻고 있고 군사 장비 및 성과 그 주위에 판 못을 잘 수리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태가 급박한 때에 남억으로 교체한다면 방비하는 일에 소홀함이나 잘못된 폐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풍천부의 백성들과 양인 등이 와서 소(訴)를 올리며 그대로 부임하여 있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정서가 이와 같으니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결하심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二十日乙巳. 藥房問安. ○去夜, 王世子寓所假家火. ○是日, 又封狀啓二道于行在所. 東宮癍疹證候平順, 本月十八日所封書狀中, 已爲啓達. 而同日午後, 氣候猶覺煩熱, 咽喉似爲爛疼, 粥飮難下云. 臣與醫官等, 十分商議, 隨症進藥, 以加減薄荷煎元ㆍ舍化陳米飮ㆍ三豆飮ㆍ菉豆粥ㆍ生梨汁, 連進下咽. 是夜, 喉門暫開, 進藿羹和軟飯數匙, 又進元米陳米飮二三度, 井花水頻頻嗽口. 十九日, 熱勢減三分之二, 額頰先發處漸至消歇. 二十日朝, 氣候一樣, 二更入睡, 四肢胸腹追發處, 亦至消歇. 煩熱太減, 喉症亦歇. 但三更量, 東宮依幕外新造三間失火, 而時適睡覺, 故不至驚動矣. ○豐川府使黃允容ㆍ巡察使李廷馣啓聞罷黜, 以南嶷假差. 允容罪犯輕重, 知不得, 而豐川, 乃沿海要衝之邑, 允容筋力, 不甚衰替. 且得本邑民心, 軍器城池, 繕葺已久. 而當此事變方急之時, 代以南嶷, 則其防備之事, 不無疏誤之弊. 而本邑民人等, 委來呈訴, 懇請仍任. 民情如此, 自朝廷參酌處置, 似爲便當. 12월 21일(병오)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二十一日丙午. 藥房問安. 12월 22일(정미)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二十二日丁未. 藥房問安. 12월 23일(무신) 내의원이 문안하였다. 또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동궁의 증세는 이 달 18일과 20일 두 차례 서장(書狀)에서 이미 대략을 말씀드렸습니다. 21일 이후부터는 매일 세 차례씩 문안하였는데, 열이 내리는 것 같고, 사지(四肢)에 먼저 생긴 붉은 점이 이미 절반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후(咽喉)의 통증과 기침은 여전히 완쾌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감박하전원(加減薄荷煎元)을 몇 차례 시술하고 이를 이어 용뇌말(龍腦末)을 목구멍으로 불어 넣었습니다. 22일에는 편안하게 침수를 드시고는 인후통은 점차 사라졌으며, 열도 크게 내렸습니다. 차서를 갖추어 아뢰옵니다. 二十三日戊申. 藥房問安. ○又封狀啓一道于行在所. ○東宮症候, 本月十八日ㆍ二十日, 兩度書狀中, 已陳大槪. 自二十一日以後, 逐日三時問安, 則熱勢似減, 四肢先發處, 已半消去. 而咽喉欬嗽如前未快. 用加減薄荷煎元數度, 繼以龍腦末, 吹入喉門矣. 二十二日, 寢睡安穩, 咽喉漸至差歇, 熱勢大減, 詮次善啓. 12월 25일(경술) 왕세자를 모시고 출발하여 함종(咸從)에서 묵었다. 또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자에 전하의 옥체가 어떤지 알지 못하여 지극한 근심 막을 길이 없습니다. 신은 동궁의 행차를 모시고 그날 용강(龍岡)을 떠나 지금 함종현(咸從縣)에 묵으셨는데, 행차 후 몸 상태는 평안하십니다. 내일 증산(甑山)으로 향할 것인데 머지않아 완전히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시는 것은 매우 송구합니다. 오시(午時)에 신은 영의정 최흥원(崔興源)ㆍ승지 유희림(柳希霖)ㆍ사관(史官) 이진(李軫) 및 의관 이공기(李公沂)ㆍ남응명(南應命)ㆍ김중부(金仲孚)와 함께 입시하여 동궁의 기후을 자세히 살폈는데, 얼굴이 잠시 수척해지고 별다른 열이 없었습니다. 음성도 예전으로 돌아오고, 붉은 반점은 사라져 흔적도 없습니다. 이날 행차는 증산(甑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二十五日庚戌. 陪王世子發行, 宿咸從. ○又封狀啓一道于行在所 ○近未審聖體若何, 無任伏慮之至. 臣陪侍東宮行次, 當日龍岡離發, 今到咸從縣留宿, 行次之後, 氣候平安, 明向甑山, 差復未久. 冒寒登程, 極爲未安. 午時, 臣與領議政崔興源ㆍ承旨柳希霖ㆍ史官李軫及醫官李公沂ㆍ南應命ㆍ金仲孚入侍, 候察氣色, 則容顔暫瘦, 別無熱候. 語音如常, 癍疹消盡無痕. 當日行次, 發向甑山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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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선조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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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선조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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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역에 걸린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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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병으로 아들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권문해
1582-01-18
경상북도 예천군
2
세자빈, 길 위에서 홍역을 앓다
평안남도 용강군
3
전염병을 피해 도망 다니다
1618-02-25
경상북도 안동시
4
동네 잔치 이후, 아들딸이 홍역을 앓게 되다
1606-01-20
경상북도 안동시
5
고양이가 엎지른 죽력 그릇, 병자는 화가 치밀어 오르다
1607-01-06
경상북도 안동시
6
홍역과 학질, 아이들을 괴롭히고 아버지를 근심케 하다
1605-12-11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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