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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을 피해 도망 다니다
1618년 2월 25일, 평소 잘 찾아오지 않던 이즙이 장흥효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장흥효를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온 것은 다음 아닌 전염병 때문이었다.
장흥효가 살던 당시에는 전염병이 너무 흔했다. 그가 살던 일생 동안에도 그가 사는 마을에 수차례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기도 했다. 어쩌면 당시의 삶 자체가 전염병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지도 몰랐다.
이즙이 살고 있던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 당시 전염병이 마을에 돌기 시작하면 별다른 대체 방법은 없었다. 도망 다니는 것이었다. 백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후기에는 전염병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너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병도 당시에는 너무 무서운 질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병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즙도 마을에 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서 다른 마을로 피신하는 도중에 장흥효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장흥효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도망 다니다 보면 언제 다시 찾아뵐지 몰랐기 때문이다. 짧게는 한 달이면 돌아올 수도 있지만 길어지면 수개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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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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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경당일기(敬堂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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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흥효(張興孝)
주제 : 전염병
시기 : 1618-02-25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장흥효, 이즙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73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장흥효
◆ 피접(避接)
조선 후기 당시에는 전염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병이 들어 약을 써도 효험이 없거나 병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을 때, 살던 집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이를 가리켜 피접이라고 불렀다.
피접의 풍습은 도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것도 중국의 한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후한서』에 따르면 예맥 사람들은 병이 들면 옛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한나라 안제도 태자가 병이 들어 유모 왕성의 집으로 피접을 갔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시대 들어와서 성행하였다. 특히 왕실에서 피접을 가는 일이 많았다. 태조, 정종, 태종은 상왕으로 있을 때 병이 들자 다른 궁으로 옮겨서 병을 치료한 일이 있었고, 왕후나 비빈의 피접은 예사로운 일처럼 성행했다.
또한 대군과 군, 옹주들도 요양을 위해서 피접을 가는 일이 많았고 궁중이 여관(女官)들과 별감들이 조종하여 어느 쪽으로 가면 길하고 언제 가면 길하고 누구의 집으로 가면 길한지를 확인해 주기도 하였다. 기간은 보통 며칠에서 몇 개월이 되기도 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618년 무오년(광해군10) 2월 25일 을묘乙卯 맑음 이즙李楫이 찾아왔는데, 역질疫疾이 퍼져서 오래 동안 피접避接하러 간다고 하직 인사하였다.
애니메이션
조선시대의 전염병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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