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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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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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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경당일기(敬堂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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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흥효(張興孝)
주제 : 일기
시기 : 1621-08-21 ~ 1621-08-2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장흥효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장흥효
◆ 조선시대 종이의 공급
조선 전기 종이의 공급은 조지서라는 관청에서 이루어졌다. 1415년(태종 15) 창의문 밖에 조지소라는 관청을 설치하였고 나중에는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에서는 여러 종류의 종이를 제조하고 관리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조지서가 쇠퇴하고 사찰에서 더 고급 종이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이후가 되면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면서 점차 조지서의 종이 공급도 약화되었다.
중앙의 각 관청과 왕실에서는 사찰에 특권을 부여하고 사찰에서는 중앙 관청과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를 공급하였다. 이러한 종이 수급은 지방관청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양반들의 경우에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장지(壯紙)는 꽤 두꺼웠기 때문에 사찰을 통해 공급을 받았다. 사찰의 종이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서 사찰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621년 신유년(광해군13) 21일 경인庚寅 종이가 모자라 기록하지 못한 것이 모두 20여 일이다. 22일 신묘辛卯 종이를 구했으나 아직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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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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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보망록이란 이름을 붙이다
19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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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옛 일기를 꺼내어 책으로 묶다
경상북도 안동시
4
역중일기를 정리하다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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