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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차와 밥과 같다네 - 험한 길을 가 백발의 학자를 알현하다
1861년 4월 4일, 서찬규 일행 4명은 양산에 당도했다. 길가에 물이 넘쳐서 길이 불통이었다. 산허리로 돌아 작은 길을 발견하고 간신히 험한 길을 건넜다. 양산시장을 지나 수십 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10리쯤 가서 금산[천길]에 도착하니, 길이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하늘에 매달린 듯한 절벽을 부여잡고 오르자니, 정신이 다 나가서 마치 꿈속의 풍경을 지나는 것 같았다. 배로 나한평 나루를 건너 20리를 가서 동곡에 당도했다.
네 사람이 같이 명함을 들이고 좨주 송내희 공을 뵈었다. 송공은 풍성한 얼굴에 귀밑머리가 백발이었고 덕성이 순수했다. 보통 말을 하는 가운데서도 여유가 있어 광채와 향기가 전해져 왔다. 이날 연거 족형이 『낙재선생집(樂齋先生集)』의 서문을 청했다.

4월 5일, 서찬규가 송내희 공에게 제사법에 대해 물었다.
“고모의 기제사에 참여하려고 할 때, 그 집에서 만일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나란히 제사 지내게 되어 전후처(前後妻)의 신위를 합하여 세 분을 같이 지낸다면, 후취한 분은 나에게는 타인이므로 제사에 참여할 의미는 없지 않습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송내희 공이 답했다.
“이미 다른 사람을 함께 제사 지내는 일이 있다면 상황상 불참하고 그만두어야지. 그런데 사당과 야외에서 지내는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네. 사당에서 으뜸가는 신위가 나와 족척(族戚)이 된다면, 이런 경우에는 사당에서는 뵈어도 그 이하 제위에게 혐의가 되지 않는 것이지. 야외에서는 만일 세 분을 합장했다면, 마땅히 절을 해야 할 분을 향해 절하는 것이라네.”

송내희 공이 말했다.
“ 『소학』에 이르기를(『소학』 『명륜』편에서, ‘曲禮曰, 寡婦之子, 非有見焉, 弗與爲友’라고 하여,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의 말을 인용함.), ‘과부의 아들은 현달한 사람이 아니면 더불어 친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승당배모(升堂拜母)(절친한 사이)하는 사이였으면서 친구로 삼지 않는 것은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네. 그러므로 『집주(集註)』에, ‘색을 좋아한다는 혐의’라는 말이 있는 것이라네.”

서찬규가 말했다.
“여기서, 아들 자(子)의 글자는 혹시 여자라고 할 때의 ‘자’로 보아야 하고, 벗 우(友)는 금슬지우(琴瑟之友)(부부 사이)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은 것 같네.”

서찬규가 이기론에 대해 물었다.
“주자가 말하기를, ‘만물의 근원은 하나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이(理)는 같은데 기(氣)가 다르다. 이미 하나에 근원하였다면, 이가 같은 곳에는 기 또한 같을 것이다. 기가 다르다면 이것은 바로 체가 다른 것으로 하나에 근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송내희 공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자가 이미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지만 이는 같고 기가 다르다.’라고 한 것은, 다만 만물이 기가 다르다는 뜻이 있는 것 아닐까? 이기(理氣)의 같고 다름은 형이상인가 형이하인가로 나누어 본다면 저절로 분명해지네.”

송내희 공이 또 말씀하셨다.
“성리설은 한 겹을 뚫고 통과하고 나면 다시 한 겹이 있어 잠깐 사이에 그 끝을 찾아내고 대략 억지로 풀기가 실로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해법을 모조리 찾았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것이 모두 옳은 것인지를 어찌 보장하겠는가? 그러므로 가벼이 입에 올리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근래 학자들의 공통된 병통은, 당초부터 효제(孝悌)와 충신을 일상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서 고상한 척하고 성명(性命)을 말하는 것이다. 묻고 답함이 자질구레하여 가부를 다만 흉내내어 그대로 외우며 남의 입이나 쳐다보고 있을 뿐이니, 이런 폐단은 마음에 경계함이 없이 너그럽게 용납해서는 안 된다.”

송내희 공이 학업에 대해 말씀하셨다.
“독서는 차와 밥과 같다네. 차와 밥은 늘 먹는 것이라, 비록 특별히 신기한 맛을 모르더라도 자연히 내장을 기름지게 하고 기운과 피를 북돋워 주어서, 사는 이치가 절로 그 안에 있지. 책도 늘 읽으면 아무것도 얻는 게 없는 것 같지만, 독서를 많이 하면 자연히 경(敬)을 먹게 된다네.”
또 삼계의 참의 조병덕 어른의 얘기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가 한 번은 이곳에 와서 같이 자는데,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더니 여러 책을 외우는 게 아니겠나? 그 친구가 책을 읽는 일은 늙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네.”
송내희 공은 연세가 71세로 아버지와 동갑이시라, 내가 사모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특별했다. 말씀하시는 중에 우연히 언급하셨다. 이날 송내희 공의 맏아들인 영동 어른 각로(恪老)가 나를 보고 이 말을 했는데, 그 은근한 마음이 느껴졌다. 서로의 양친이 연세가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4월 6일, 송내희 공은 불교와 천주교에 대해 말했다.
“비록 천주교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가르침도 윤리를 중히 하고 깨끗하게 하며, 또 불법을 배척한다고 한다. 틀림없이 우리 유도에서 임시로 빌려 간 말로, 쉽게 유혹하려고 하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조종(祖宗)과 부모의 영전에 예를 차리지도 않으면서 윤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데, 천주교는 틀림없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불교를 공격하는 것이다. 둘 다 우리 유도를 해치는 것이다.”
서찬규는 임재(臨齋)의 현판 글씨를 청하면서 매산 홍직필 선사께서 이름 지으신 뜻을 말씀드렸다. 송내희 공은 흔연히 승낙하고 휘호했다.
황면재(黃勉齋)의 ‘진실심지각고공부(眞實心地) 刻苦工夫’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주셨다. 받으며 삼가 대단히 감사했다. 연거 족형도 몇 편의 글씨 쓴 종이를 받았다. 이날 낮에 한·정 두 사람은 먼저 삼계로 갔다.
오후 늦게 『낙재집』의 서문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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