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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동락한 친척의 과거 낙방을 안타까워하다
1845년 1월 8일, 서찬규는 족형 동곤(자 재)씨와 은적암에 올라가 『시경』을 읽었다.
2월 22일, 돌아가는 족인 덕우를 전송하였다. 저녁에 족형 재씨와 『시경』의 여러 장 중에서 집어내어 서로 외우는 강을 시험하였다.
3월 3일, 방과 마루, 그리고 뜰에 물을 뿌려 쓸고, 족형 재씨와 책을 펼쳐놓고 마주 앉아서 증점의 언지 장을 외웠다. 앉아서 산기슭을 바라보니 봄기운이 완연하여 더욱 사람 그리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 덕우가 오기로 약속한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다고 함께 이야기하였다.

8월 25일, 과방이 나왔다. 우리 동접 8인 가운데 6인이 방에 붙었으니 다 종장에서였다. 서찬규, 족형 재씨, 족인 덕우, 구정로(자는 선)씨, 구상천(자는 응서)씨, 구사로가 다같이 응시하여 합격했다. 고을에서 모두 18인인데, 서찬규 집안이 5인이었다. 오후에 덕우가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을 전송했다. 저녁이 되자 방노가 와서 시험지를 갖다 주었다. 방성이 거리와 마을에 진동하니, 양친께서도 기뻐하셨다.

9월 21일, 순상 홍종영이 이 암자로 놀러온다고 하여, 이를 피해 단풍든 숲 사이로 가서 시를 읊다가 저녁에 암자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재씨는 아내가 아프다는 기별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9월 29일, 재씨가 어제 상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덕우와 함께 남산을 내려왔다. 이날 저녁에 비가 내렸다.

1846년 2월 12일, 여러 벗들과 돈화문 밖으로 나갔다. 방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가 부딪혀 잠시도 머물기가 어려웠다. 또 내 몸도 불편하여 족형 덕우와 반으로 돌아왔다. 저물어서야 저녁밥을 먹고 겨우 쉬고 있는데, 급한 전갈이 와서 전하기를, ‘덕우는 방에 들었다.’고 하고 다시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서찬규와 족형은 함께 낙방한 줄 알고, 마루로 나와 있는데, 조금 있으니 자형이 숨을 헐떡이며 와서 서찬규의 손을 잡아당기며, 서찬규는 방에 들었다고 일러 주었다. 그의 맏형님은 떨어졌다며 탄식하고, 족형을 돌아보며 또한 좋은 말로 서로 위로했다.
서찬규는 참방 소식을 듣고 마치 꿈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족형을 돌아보니, 위로할 말이 없었다. 우리 일족 가운데 떨어진 사람들이 여러 이었으니, 누가 안타까이 혀를 차지 않겠는가마는, 더욱이 여기에 정으로 보더라도 우리 세 사람은 나란히 같이 공부하러 가서 한자리에서 공부하고 잤으며, 또 함께 남성으로 떠났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혼자 떨어졌으니, 어찌 잘못되었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날 저녁에 하객들이 마루에 가득하였는데, 판사 신대응이 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고, 황산 이병형이 새로 합격했다.

2월 14일, 족형이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

1847년 2월 6일, 문오 족형이 도착하여 족형 재씨 및 덕우·태곤(자는 노첨)과 함께 서울로 출발하였다. 구암서원에서 잤다. 자형 평선씨는 태촌으로 가면서 내일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20리를 가서 칠곡읍에 도착하여 노비와 말을 돌려보내고, 걸어서 10리를 더 가서 증곡에서 잤다.
6월 2일, 족형 재씨가 서울로 가는데, 족인 대곤(자는 해겸)씨와 전송하였다. 달성 아래에서 그대로 석암으로 갔더니, 경재가 혼자서 마을 유생들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9일, 족형 재씨가 어제 선사에 이름이 들어갔다.
1848년 10월 15일, 족형 재씨와 정시를 치르기 위해 출발하였다. 금호나루에서 평촌의 신생을 만나 함께 갔다. 칠곡에 도착하여 나만 증곡에 들렀다. 오후에 태봉에 도착하여 낙육재에서 머물던 예천 대숙 권구상과 의성의 친구 신숙교와 안동의 이택형, 선산의 김학수를 만났다. 독미원에 도착하니 가랑비가 내렸다. 나는 족형과 함께 말을 타고 있었기에 먼저 달려 수청점에 도착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친구 신생이 뒤따라 왔고, 네 사람은 다부원에서 묵는다고 하였다.

1849년 4월 2일, 족형 재씨와 정시에 가려고, 이날 먼저 출발하여 구암서원에서 묵었다. 1850년 11월 19일, 족형 재씨가 어제 복시과에 참여하였다.

1852년 2월 24일, 연거의 족형 재씨가 남성시에 들어갔다. 이날 윤호성씨가 내방하였다. 2월 28일, 연거의 족형이 참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 21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축축이 안개가 내려 산 빛은 푸르렀지만 들판은 검었다. 지지대고개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조금 쉬었다. 행보가 수원 북문 밖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연거 족형과 함께 장안문루에 올라, 화졸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니, 청월하여 들을 만하였다. 족형이 나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지난 병오년(1846)을 추억해보니, 자네와 함께 남성시(진사시)를 치렀는데, 자네는 덕우와 함께 합격하였으나, 오직 나만 낙방하여 초초한 행색으로 이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었지. 지금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또 이 길을 가게 되었네 그려. 그것도 자네와 함께 가다가 이 누에 올라 피리 소리를 듣고 지난날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게 되었네 그려.”
라고 하였다. 나도 웃으면서 누에서 내려왔다. 길을 가서 직동점에 이르러 묵었다.

1855년 5월 2일, 진사 족형이 현릉원의 참봉으로 말망주의되었다. 이날 인편에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공익(자는 상백)씨, 한문오(자는 입헌)씨와 함께 죽동으로 가서 정언 민달룡을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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