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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편지 - 뉴스이자 곧 문학 작품
1845년 1월 11일, 서찬규는 이남을 마치고 1권을 통째로 외웠다. 이날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아울러 경과 초시 정원이 48으로 정해졌음을 들었다.

1847년 1월 13일, 집에 심부름하는 아이가 왔기에 집의 편지를 받고, 아울러 정시 날짜가 2월 26일이라는 것도 들었다. 3월 20일, 진사 이안중과 족형·덕우·치황씨와 함께 남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장님을 만났는데, 바로 이가 양반이라고 하여 운수를 물어보았다. 이날 족형의 집에 있을 때 사람이 와서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함께 부쳐온 옷가지도 있었다. 3월 24일, 심부름 온 사람을 보내며, 집에 편지를 올렸다.

1850년 7월 16일, 오후 늦게 칠곡 상지의 이씨, 납골의 정씨 등 여러 사람들이 선사에 모여서 편지를 보내어 초청하였다. 8월 29일, 이날 파잠 족숙 준열씨의 편지로 인하여 비로소 옥계서원에 일이 있음을 들었다. 지난번 이안하는 날에 사림의 공의로 인하여 학암 선조의 위판을 중당에 봉안하고, 용계 방조의 위판을 그 다음 차례에 봉안하였는데, 세 간의 묘실에 오른쪽 위 한 간이 비었다. 혹 두 기둥의 아래에 균등하게 복안하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지금 향사의 예를 행하는 날에 일촌의 여러 족친들이 두 기둥 아래에 두 위판을 이안하자고 하니, 옮겨서 이미 봉안한 위판에게는 매우 미안한 바이다. 12월 8일, 판서 서희순에게 편지를 올렸다. 12월 30일, 경백의 애서와 또 친구 채치도가 편지와 시 한 수를 보내왔다.

1851년 1월 3일, 산격의 여러 족친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채치도의 편지에 답하고 아울러 시에 화답하였다. 1월 25일, 노남 선조를 봉향하는 일로 구암서원에서 향회를 하였다. 이날 노호의 선생의 편지와 아울러 과천장에게 편지를 올렸다. 선생의 회근례가 이달에 있기 때문이다.

1852년 1월 7일, 청송의 족장 선응씨에게 문안편지를 올리고, 겸하여 오언시 한 편을 부쳤다. 6월 21일, 선생에게 회답을 올렸다. 또 오곡 어른 및 주서 홍일형·홍복경·홍최수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은암에 올라왔다. 7월 23일, 청송의 마뜰 족장 선응씨의 편지와 화답한 시를 받았다.

1853년 3월 8일, 전병순(자는 이숙)에게 문안편지를 보냈다. 6월 23일, 가친에게 편지를 올렸다. 10월 13일, 한백천재에게 편지를 보냈다. 12월 26일, 이구서씨가 남암으로부터 와서 편지와 시를 부치고 작별하고 돌아갔다.

1854년 6월 6일, 백천재 한계응씨에게 답장을 하고 또 입헌 한문오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1857년 4월 8일, 화장사에 머물고 있는 제현들이 전에 뱃놀이를 하자는 약속이 있었는데, 비가 내려서 모임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바로 숙재 어른께 편지를 보내어 훗날을 기약하자고 알렸다. 오후 늦게야 답장을 받았다. 4월 19일, 선생의 유고 가운데 그대로 둘 것과 뺄 것에 대한 작업을 드디어 시작하였다. 숙재가 늘 말하기를, “후세에 교훈이 될 문자는 정밀하면서도 요약된 것을 위주로 한다. 돌아가신 선생의 유집은 아주 많아서 서재에 꽉 찰 정도이니, 백 개중에 한두 개를 남겨서 그 정밀함을 지극하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책임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번의 서독기서묘도 등의 여러 글을 교정할 때, 혹 경서와 예기 및 학문을 하는 방법과 같은, 그 말씀이 후세에 모범이 되는 것 이외는 한결같이 빼버렸다.

1858년 3월 10일, 노호에 위소를 부쳤다. 삼계의 조씨 어른께 편지를 올렸다. 4월 12일, 연천에 있는 친구 최경관의 집에 편지를 급히 보내 함께 가자고 하였다. 경백이 남아 최경관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뒤따라오기로 하고, 나는 전·한·구씨 친구 한 사람과 먼저 떠났다. 7월 9일, 10리를 가서 고조촌 앞에 당도하니 한석표·김옥중·조성권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지영하였는데, 석표는 그 가친의 편지를 소매에서 꺼내 전해주었다. 양곡의 한계응씨와 오천 바닷가에서 좋은 계절에 한번 만나자고 약속하였으니, 참으로 기쁘고 기뻤다. 8월 11일, 안영집(자는 선응)·이군·조성권·김옥중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을 부쳐왔다.

1860년 6월 1일, 윤달에 삼계와 신양에 붙인 편지가 전해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1861년 4월 15일, 신양의 임지평 어른께 문안 편지를 보내어, 병을 앓느라고 찾아뵙지 못한 한을 밝혔다. 이날 출발하려는데 조공께서 한·정 군 두 사람에게 편지를 써주셨다. 나와 박인화는 이별시를 지었다. 5월 20일, 연거의 족형이 서울 보냈던 사람이 와서, 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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