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1845년 3월 26일, 서찬규는 덕우가 선산에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가 이번에 가는 것은, 『주자이동조변』 등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장마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그 정성을 알 만하다. 6월 8일, 덕우가 왔다. 『주자이동조변』을 등사하는 일을 마쳤으니, 그 애쓴 마음을 알 만하다.

1847년 7월 10일, 연일 사보(詞譜)를 베꼈다. 8월 13일, 『장릉지』를 빌려 보았다.

1850년 4월 5일,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을 읽어라. 『근사록』은 곧 송(宋)나라 때 하나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곧 우리나라의 한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 조헌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4월 6일, 아침 일찍 선생을 모시고 앉았을 때,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온화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선생께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좌하여 천히 도연명 시의 ‘가량비가 동으로부터 오니 좋은 바람 더불어 함께하네.’ 라는 구절을 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좋은 비가 그때에 맞게 오면 만물이 함께 영화를 누린다. 사물을 관찰하면 생각이 일어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기운을 상쾌하게 한다.”
라고 하셨다. 이날 열락재로 물러나 앉아 『소화외사』(오경원 지음)를 거의 저녁 무렵까지 읽었다.

1851년 5월 14일, 『성학십도』와 『격몽요결』을 등사하는 일을 끝마쳤다.

1852년 2월 19일, 선생을 가서 배알하였다. 근래에 『노주잡지』 한 권을 베꼈다.

1855년 11월 4일, 고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처사 한문오씨가 노량진에서 찾아왔고, 박참봉이 『근재 선생집』 16책을 보내왔다.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울산의 고세중이 내방하였다. 12월 5일, 은암에 올라가서 선생의 유고를 등사하고 『중용』을 읽었다.

1857년 3월 16일, 책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스승의 유고를 등사하니 20책이 되었다. 4월 26일, 화장사로 가서 빼고 넣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월 27일, 낮에는 유집을 교열하고 밤에는 어려운 경서와 『심경』을 강론하니, 이번 일은 진짜로 우리 생애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순간이었다. 여의정사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1858년 8월 11일, 안영집(자는 선응)·이군·조성권·김옥중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邁埜集)』을 부쳐왔다. 12월 18일, 배로 백마강을 건너고 규암에서 아침을 먹었다. 논치를 지나 30리를 가서 홍산(지금의 부여읍)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었다. 20여 리를 가서 어두울 무렵 삼계에 당도하여 숙재 조공을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정으로 아껴주시는 마음에 감격하였다. 이어 가지고 간 『사익전(明史翼箋)』 6책을 올렸다. 이는 일찍이 베껴서 보내달라던 부탁이 있었다.

1859년 1월 1일, 객지에서 해가 바뀌니 어머님을 떠나 있는 마음이 더욱 말로 하기 어렵다. 오후에 노호를 출발하였다. 광주의 박이휴(자는 양보)가 그 방선조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 한 질을 주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