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통과 기록
유교문화관
조선의 교육
조선의 가례
옛문서 생활사 박물관
사행록 역사여행
안동 하회마을
조선의 전통건축
스토리 테마파크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공모전
콘퍼런스
테마스토리
가정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개인의 일생과 통과의례
그리운 가족
노비들의 삶
경제
가계경영과 노동
고달픈 세금과 부역
시장과 거래
자연재해와 흉년의 기록
공동체
공동 목표를 위한 조직과 협동
관리와 공조 및 대립
사람 사이 갈등과 범죄
이웃과 어울리는 삶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구국에 나선 의인들
나라를 위한 무장투쟁
신문물의 물결과 변화하는 조선
이역만리에서의 독립운동
혼란한 정국
나라의 정치
관직생활
국가의 경조사
국왕의 명령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
조정의 갈등과 대립
조정의 사건과 사고
외교와 사행
사행길의 사건사고들
사행길의 여정
외교정책의 수행
외국 사람들과의 만남
외국의 자연과 문물의 경험
전쟁, 혼란의 기록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전쟁의 진행과 양상
피난과 궁핍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유람과 감상
유람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유흥의 기록
자연과 고적에 얽힌 이야기
하층민의 놀이와 즐거움
학문과 과거
과거 급제의 영예
과거의 부정부패
끝없는 학문의 세계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
인물스토리
관리
가족, 동료와 교류하는 관리
나라의 변란을 맞이한 관리
무인의 길을 걷는 관리
바른말을 하는 관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
선정을 베푸는 청렴한 관리
외교를 수행하는 관리
인사발령을 받은 관리
정치적 갈등에 직면한 관리
죄를 지은 관리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
양반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양반
고을일에 참여하는 양반
과거시험을 치르는 양반
나랏일을 걱정하는 양반
난리를 만난 양반
대립과 갈등에 놓인 양반
사람들과 교유하는 양반
일상을 고찰하는 양반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양반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풍문과 소식을 듣는 양반
학문하는 양반
여성
기생
양반가의 여성
왕실의 여인들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하층민 여성
왕실
국난을 만난 국왕
국정을 돌보는 국왕
왕실의 사람들
왕을 보필하는 세자
한 집안의 가장인 국왕
외국인
군대를 이끌고 온 외국장수
외국의 외교관
조선인을 만난 외국인
중인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관)
향리
하층민
고된 삶을 사는 노비
기술자의 삶, 장인
무속인
부역과 노동에 지친 백성
장사로 삶을 영위하는 상인
천대받는 승려
배경이야기
경제
군제와 군역
농업과 가계경영
산업과 시장
세금과 부역
환경과 재해
교육과 과거
과거
교육기관
학문과 출판
인물
문화
고사, 고적
관습, 풍속
군제와 군역
놀이
예술
의례
의식주
종교
질병과 의료
사회
가족과 일상의례
신분
지역공동체
질병과 의료
전쟁과 외교
국제정세
민간인 교류
외교
전쟁
정치와 행정
사건
사법
왕실
정쟁
정치행정제도
지방제도
일기정보
서명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저자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멀티미디어
내용유형
공간자료
사건자료
소품자료
인물자료
절차자료
참고자료
미디어유형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이미지
공지사항
활용사례
로그인
소개
웹진담담신청하기
활용가이드
용어사전
전통과기록
페이스북
블로그
▲ top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일기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전체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이야기
검색어
시기
-
검색
다시입력
테마스토리
가정
경제
공동체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나라의 정치
외교와 사행
전쟁, 혼란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학문과 과거
과거 급제의 영예
과거의 부정부패
끝없는 학문의 세계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
Home
>
테마스토리
>
학문과 과거
> 끝없는 학문의 세계
페이스북
스크랩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1845년 3월 26일, 서찬규는 덕우가 선산에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가 이번에 가는 것은, 『주자이동조변』 등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장마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그 정성을 알 만하다. 6월 8일, 덕우가 왔다. 『주자이동조변』을 등사하는 일을 마쳤으니, 그 애쓴 마음을 알 만하다.
1847년 7월 10일, 연일 사보(詞譜)를 베꼈다. 8월 13일,
『장릉지』
를 빌려 보았다.
1850년 4월 5일,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
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
을 읽어라. 『근사록』은 곧 송(宋)나라 때 하나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곧 우리나라의 한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 조헌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4월 6일, 아침 일찍 선생을 모시고 앉았을 때,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온화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선생께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좌하여 천히
도연명
시의 ‘가량비가 동으로부터 오니 좋은 바람 더불어 함께하네.’ 라는 구절을 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좋은 비가 그때에 맞게 오면 만물이 함께 영화를 누린다. 사물을 관찰하면 생각이 일어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기운을 상쾌하게 한다.”
라고 하셨다. 이날 열락재로 물러나 앉아
『소화외사』
(오경원 지음)를 거의 저녁 무렵까지 읽었다.
1851년 5월 14일, 『성학십도』와 『격몽요결』을 등사하는 일을 끝마쳤다.
1852년 2월 19일, 선생을 가서 배알하였다. 근래에
『노주잡지』
한 권을 베꼈다.
1855년 11월 4일, 고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처사 한문오씨가 노량진에서 찾아왔고, 박참봉이
『근재 선생집』
16책을 보내왔다.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울산의 고세중이 내방하였다. 12월 5일, 은암에 올라가서 선생의 유고를 등사하고 『중용』을 읽었다.
1857년 3월 16일, 책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스승의 유고를 등사하니 20책이 되었다. 4월 26일, 화장사로 가서 빼고 넣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월 27일, 낮에는 유집을 교열하고 밤에는 어려운 경서와 『심경』을 강론하니, 이번 일은 진짜로 우리 생애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순간이었다. 여의정사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1858년 8월 11일, 안영집(자는 선응)·이군·조성권·김옥중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邁埜集)』을 부쳐왔다. 12월 18일, 배로 백마강을 건너고 규암에서 아침을 먹었다. 논치를 지나 30리를 가서 홍산(지금의 부여읍)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었다. 20여 리를 가서 어두울 무렵 삼계에 당도하여
숙재 조공
을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정으로 아껴주시는 마음에 감격하였다. 이어 가지고 간 『사익전(明史翼箋)』 6책을 올렸다. 이는 일찍이 베껴서 보내달라던 부탁이 있었다.
1859년 1월 1일, 객지에서 해가 바뀌니 어머님을 떠나 있는 마음이 더욱 말로 하기 어렵다. 오후에 노호를 출발하였다. 광주의 박이휴(자는 양보)가 그 방선조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 한 질을 주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임재일기(林齋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서찬규(徐贊奎)
주제 : 공부와 시험, 서책 마련
시기 : 1845-03-26 ~ 1859-01-0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서찬규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8호
웹진 담談 8호
웹진 담談 1호
웹진 담談 8호
웹진 담談 8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인쇄와 등사문화
조선시대 선비들이 책을 얼마만큼 귀하게 여겼는지, 또한 왜 귀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들이다. 당시 선비들은 공부하는 데 필요한 책을 빌려서 등사하거나 베껴 쓰고,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 지인이 부탁하는 책 등 그렇게 필요한 책은 늘 등사하거나 자주 베껴 썼다. 그러니 실제 저자에게서 책을 선물받는 건 더욱 특별한 의미였다.
조선시대의 인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자인쇄가 고도로 발달했다. 관판인쇄는 중앙관서가 중심이 되어 실시해 왔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소요되는 책은 목판으로 간행한 것도 있지만 주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내어 문신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의 관서·학교·서원 등에 반사(頒賜:임금이 물건이나 녹봉을 내려 나누어 주는 것)하고, 그것이 더 필요한 경우는 다시 번각하여 널리 보급하게 했다.
중앙관서의 활자인쇄가 크게 발달했지만, 인출 부수에 제한을 받아 지방과 민간에까지 두루 보급하기란 어려웠다. 그 결과 지방의 서원·사찰과 같은 사사기관과 특권층에 있는 개인과 민간인들이 도처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찍어 각계각층의 수요를 충당해 주었다.〈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3월 26일. 맑음.
덕우가 선산에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가 이번에 가는 것은, 『주자이동조변朱子異同條辨』 등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장마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그 정성을 알 만하다.
6월 8일. 오후에 비.
덕우德佑가 왔다. 『조변條卞』( 『주자이동조변』)을(삭제) 등사하는 일을 마쳤으니, 그 애쓴 마음을 알 만하다.
7월 10일. 비 오다가 갬.
연일 사보詞譜를 베꼈다.
8월 13일. 맑음.
『장릉지莊陵誌』(단종의 능인 장릉의 일을 기록한 책)를 빌려 보았다.
4월 5일. 맑음.
이날 덕무의 말을 빌려 타고 노량진[鷺湖]의 매산梅山 홍 선생洪先生을 배알하였다. 도착한 곳은 곧 열락재悅樂齋(문인들의 강습소이다)이니 위의威儀가 의젓하고 큰일을 할 만한 인물(한운성韓運聖·김정수金正洙·김정고金楨皐)들이 읍하고 맞이하여 앉아서 환담을 나누고 선생을 뵙기를 청하니, 먼저 명함을 들이고 한 동자童子가 앞에서 인도하고 또 선생의 명命을 전하여 말하기를,
“요사이 융병癃病이 더하여 베개에 엎드려 신음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를 행하기 어려우니 허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곧 나아가 선생에게 절하니 소매를 들어 읍하고, 이에 말씀하시기를,
“듣자니, 이미 소성小成(생원, 진사시의 별칭) 하였다고 하니 금년에 몇 살이며, 소성은 몇 살에 하였는가?”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금년에 26세이며, 22세에 소성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
“젊은 나이에 소성하였네. 요즈음은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책을 읽는가. 먼 곳에서 나를 찾아온 것은 반드시 잘못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생은 먼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듣고 본 것이 본디 적으며, 학업도 성글어서 걸어가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이 같지 않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민멸할 수 없는 자질이 있어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이제야 찾아뵙고 문안드리게 되어 귀의함이 늦은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라고 하니. 선생께서 빙그레 웃으시고 인하여 손수 한 병의 술과 안주를 집어서 마시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만약 마실 수 있으면, 내 나이가 다소 많다하여[我一日之長] 어렵게 여기지 말게” 하셨다.
감히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모퉁이에 앉아 조금 마셨다. 겨우 조금 있으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송구스러워 감히 자리에 오래도록 있을 수가 없었다. 인하여 사례하고 강가로 물러나와 육신사묘六臣祠墓를 받들어 살피고, 해가 저물어서야 서쪽 행랑채에 들어가 오곡鰲谷 홍공洪公(一純, 선생의 맏아들이다)을 뵈었다.
이날 저녁 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말씀하시기를,
“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近思錄』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어라. 『근사록』은 곧 송宋나라 때 하나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곧 우리나라의 한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시간이 이미 황혼이 되어 동자가 촛불을 들이고 모시는 아이가 차를 올렸다. 차를 마시고 선생이 영남의 산천과 풍토 인물 등을 말씀하시고, 또 대구大邱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선군先君께서 달성재[宰達府]를 4년간(을미1795~무오1798) 하셨는데, 찾아뵙고 문안하려 왕래한 것은 5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다.”
하시고, 인하여 학문하는 선비를 물으시고, 또 산수의 뛰어난 곳과 달성達城을 거론하여 물어 말씀하시기를,
“그대 가문에서 터를 바꾼 내력을 상세하게 말해줄 수 없겠는가?”
하였다. 내가 다음과 같이 갖추어 아뢰었다.
“16대조의 휘는 침으로, (호는 구계龜溪), 세종 조에 삼남(三南:충청·전라·경상) 균전제처사均田制䖏使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거주하던 달성을 주어서, 장차 세록世祿을 더해주려 하였으나 공[徐沈]이 사양하고, 본 읍의 조모糴耗를 1섬에 5되씩 감해주고 인하여 남산南山 고역기(故驛基: 옛 역자리)로 옮겨 살기를 청하였다.) 환곡을 감해준 일 및 남산으로 그 땅을 바꾼 것이 지금까지 지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대략 들었네. 예전에 달성에 갔을 때, 북쪽의 높고 가파른 봉우리를 보니, 백일홍의 꽃이 찬란히 빛났는데, 지금도 여전한가?”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무가 늙고 꽃이 쇠잔하여 예전 같은 번화함은 거의 없습니다. 매양 한번 올라가 보면 스스로 땅은 차마 황폐하게 내버려둘 수 없고, 물은 차마 버려둘 수 없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모시고 대화함에 밤이 이르러 여러 유생들과 함께 절하고 물러나왔다. 이날 속수束脩의 예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다만 형식적인 예의보다는 차라리 돈독한 참마음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나는 일찍이 사도師道로써 자처한 적도 없네. 그러므로 남들에게 폐백을 받을 수 없네.”
라고 하였다.
4월 6일.
아침 일찍 선생을 모시고 앉았을 때,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온화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선생께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좌하여 천히 도연명陶淵明시의 ‘가량비가 동으로부터 오니 좋은 바람 더불어 함께하네.’ 라는 구절을 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좋은 비가 그 때에 맞게 오면 만물이 함께 영화를 누린다. 사물을 관찰하면 생각이 일어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기운을 상쾌하게 한다.”
라고 하셨다. 이날 열락재로 물러나 앉아 『소화외사小華外史』(오경원吳慶元지음)를 거의 저녁 무렵까지 읽었다. 선생께서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곧 달려가니 선생께서 기별지竒别紙를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일 과거 시험 삼일제三日製가 있다. 이미 과거를 폐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나아가 응해야 한다.”
하시고, 인하여 참먹 한 자루를 주셨다. 절하며 받고 물러나 곧 반궁으로 들어갔다.
5월 14일. 맑음.
『성학십도聖學十圖』와 『격몽요결撃蒙要訣』을 등사하는 일을 끝마쳤다.
2월 19일. 맑음.
선생을 가서 배알하였다. 근래에 『노주잡지老洲雜識』 한 권을 베꼈다.
11월 4일. 맑고 추움.
고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처사 한문오씨가 노량진에서 찾아왔고, 박참봉이 『근재 선생집近齋先生集』 16책을 보내왔다.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울산의 고세중髙世中이 내방하였다.
12월 5일. 맑음.
은암에 올라가서 선생의 유고를 등사謄寫하고 『중용』을 읽었다.
3월 16일. 바람 불고 흐리다가 맑음.
책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스승의 유고를 등사하니 20책이 되었다.
4월 26일. 맑음.
화장사華蔵寺로 가서 존산拵刪(빼고 넣는 일)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정자의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에 이르러서, 어떤 사람은 ‘심성은 즉 기의 성자로 보는 것이 본연이다.’라고 하는데, 한입헌도 옳다고 주장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휩쓸려 그 이야기를 따랐다. 그래서 나는 “문리로 보면 그렇지 않은 듯하다. 아래 위에 드러난 생生이 3개이니 기질의 성이 맞고 본연이라고는 볼 수 없다.”라고 하니, 숙재도 “나도 전부터 이와 같이 보았다. 본연은 일찍이 의미가 맞아지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들은 끝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두 이야기 모두 모자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장任丈(임현회)은 묵묵히 듣고만 있고 옳고 옳지 않음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면서 “너무 싸울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각자가 아는 대로 말을 했으니 우리들은 훗날 보는 눈이 좀 더 진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4월 27일. 맑음.
낮에는 유집을 교열하고 밤에는 어려운 경서와 『심경』을 강론하니, 이번 일은 진짜로 우리 생애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순간이었다. 여의정사蘆漪精舍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8월 11일. 맑음.
안영집安永集(자는 선응善膺)·이군명李君明·조성권趙聖權·김옥중金玉重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元模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邁埜集』을 부쳐왔다.
12월 18일. 맑다가 흐림.
배로 백마강을 건너고 규암窺岩에서 아침을 먹었다. 논치論峙를 지나 30리를 가서 홍산鴻山(지금의 부여읍)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었다. 20여 리를 가서 어두울 무렵 삼계에 당도하여 숙재肅齋 조공趙公을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정으로 아껴주시는 마음에 감격하였다. 이어 가지고 간 『명사익전明史翼箋』 6책을 올렸다. 이는 일찍이 베껴서 보내달라던 부탁이 있었다. 이날 저녁에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조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석촌의 친구 송宋의 상사喪事는 참으로 애석하고 슬픈 일이지. 연전에 방문하였을 때 그의 기개와 도량을 보니 돈후하고 확고한 것이 쇠약한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더구나. 이제 갑자기 떠났다고 하니 사람의 일이란 믿을 것 없음이 이와 같구나. 우리 사문이 더욱 외롭게 되었으니 더욱이 한탄스럽네.”
라고 하셨다. 말이 관례冠禮에 미치자 조공께서,
“근래에 이른바 ‘단가單加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임녹문任鹿門이 매우 엄히 배척하였던 것인데, 그가 송성주宋星州 시연時淵(자는 정심靜深)에게 보낸 답장 편지에, ‘단가는 제가 평소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옛 예법에 있으니 이를 간소하게 하면 행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옛 예법 외에 이른바 단가라고 하는 것을 다시 만들어 냈으니, 이는 옛 법도 아니고 오늘날 법도 아니며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세속에서 구차하게 지름길로 가기 좋아하는 마음에 아주 들어맞을 뿐으로, 이른바 예가 아닌 예이니, 손바닥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꼴입니다. 운운’하셨지. 노주老洲와 매산梅山 두 선생께서도 일찍이 녹문의 설이 ‘도가 진실하고 절실함을 얻었다.’고 하였다네.”
라고 하였다. 조공이 또 말씀하시기를,
“선사先師께서는 노주 선생의 의견과 합치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다만 예설禮說의 2개 조항이 서로 합치하지 않았다네. 5대조의 승중承重에 대하여, 선사께서는 가하다고 하시었고 노주 선생은 불가하다고 하셨지. 출가한 딸이 친정에서 죽었을 때 조조朝祖하는 절차에 대하여, 선사께서는 가하다고 하시었고 노주 선생은 불가하다고 하셨지.”
라고 하였다. 조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사께서는 매번 옷깃을 단정히 하고 정좌하고 계셨는데, 태산과 같은 엄숙한 기상이 있으셨지. 그래서 이금계李襟溪 어른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당세에 제일가는 인물’이라고 하시고, 또 ‘백년의 간기間氣’라고 하셨으며, 또 ‘천리天理를 익숙하게 운용하셨다.’라고 하셨으며, 노주 선생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에게 크게 마음을 쓰는[大心衆生] 생각이 있었다.’고 하셨지.”
라고 하셨다. 조공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당세에 송오촌宋鰲村·오노주·홍매산 세 분 선생이 한 세대에 나란히 나시어 유도儒道의 큰 매듭을 짓는 분들이 되셨지.”
라고 하였다.
1월 1일. 임신壬申. 맑음.
객지에서 해가 바뀌니 어머님을 떠나 있는 마음이 더욱 말로 하기 어렵다. 오후에 노호를 출발하였다. 광주光州의 박이휴朴頤休(자는 양보養甫)가 그 방선조傍先祖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 한 질을 주었다.
이미지
『중용』
『근사록』
성학십도 책판
성학십도 책판
성학십도 책판
성학십도 책판
성학십도 책판 인출본
성학십도 책판 인출본
성학십도 제1도 태극도
성학십도 제2도 서명도
성학십도 제3도 소학도
성학십도 제4도 대학도
성학십도 제5도 백록동규...
성학십도 제6도 심통성정...
성학십도 제7도 인설도
성학십도 제8도 심학도
성학십도 제9도 경재잠도
성학십도 제10도 숙홍야...
3D
목두
죽변
서산(書算)
죽첨(휴대용 경서통)
희준(犧尊)
상준(象尊)
목어(木魚)
활자장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날짜
장소
멀티미디어
1
한강 선생이 요청한 대동군부군옥의 필사를 맡다
1607-09-11
경상북도 안동시
2
『심경강록간보』필사를 위해 종이를 준비하다
1924-03-21
경상북도 영덕군
3
이가후가 조부 이효연의 수택본을 빌려주다
1926-07-01
경상북도 영덕군
4
문장 하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수일을 전념하다
1926-06-26
경상북도 영덕군
5
빌린 책을 베껴 쓰다
1643-02-11
경상북도 안동시
6
책장 사이에 바람을 쐬어주며 서책을 관리하다
1628-06-22
경상북도 안동시
7
서책을 빌리기 위해 아버지의 편지를 안고 찾아오다
1623-03-05
경상북도 안동시
닫기
출전정보
출전정보가 없습니다.
저자정보
저자미상
저자정보가 없습니다.
원문보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