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사람의 상투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물길 - 안동에 대홍수가 나다
1605년 7월 2일, 김령이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현(梨峴)에 이르렀을 때 소나기가 몹시 사납게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함께 쳤다. 7월 7일에는 저녁부터 내린 비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11일에는 비가 내리더니 저녁부터 밤새도록 큰비가 쏟아졌다.

7월 13일에는 비가 내렸다. 앞 내가 크게 불어 모랫둑이 터지고 수양버들의 뿌리가 드러나도 조치하지 못했다. 적잖이 걱정되어 김령은 급히 물을 막으라고 명했다.

14일에는 흐리고 비가 내리더니 저녁에는 날이 개고 달빛이 밝았다. 15일에는 밤에 달이 대낮같이 밝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7월 16일부터 흐리고 비가 내렸고, 19일도 저녁부터 비가 몹시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20일에는 비 내리는 기세가 어제와 같고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김령은 앞 강물이 크게 불었다는 말을 듣고 종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넓은 물결이 산과 들을 뒤덮고 끝없이 펼쳐졌다. 현의 객관과 역촌(驛村)은 물 위로 반쯤 드러나 있고, 내 앞 조산숲[造山藪] 등 눈 닿는 모든 것이 누런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집과 나무들이 강을 뒤덮으며 떠내려 오는데, 사람 형체 같은 것이 혹은 둘씩 혹은 셋씩 떠내려 오는 것도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어둡고 희미해서 똑똑히 보이진 않았지만 종자들이 말하길 모두 사람이라고 했다.
물은 이미 아랫마을에까지 이르러서 일휴당(日休堂)안음댁(安陰宅)이 거의 물에 잠겼다. 마을 집은 돗자리만큼 드러나 있었다. 물의 기세가 이렇게 세차고 크게 범람하기가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너무도 참혹해서 더 이상 내려다볼 마음이 없어졌다.

7월 21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어젯밤에 물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져서 탁청정까지 이르렀고 중촌(中村)과 하촌(下村)에 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김령이 가서 살펴보니, 하양댁(河陽宅), 제천댁(堤川宅), 안음댁(安陰宅) 세 집이 모조리 물에 잠겼고, 일휴당(日休堂) 기둥 위의 물 흔적이 사람의 상투 꼭대기보다 훨씬 위를 지나갔다. 파괴된 촌집이 5십여 가구인데, 바라보니 휑하여 전쟁을 겪은 것보다 심했다.
사람들이 산기슭에 임시 거처를 정했고, 하양댁과 제천댁 두 집은 겨우 피해 나와서 이지(以志)의 집에 임시로 기거했다. 수재를 당한 집은 담장과 벽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지붕 뚜껑만 남았으며, 진흙이 방에 가득 차서 더러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솥이며 가마솥이 방문 위에 높이 걸린 것도 있으니 집이 물에 떴기 때문이었다. 하양댁에 있던 퇴계 선생이 쓴 병풍 두 틀이 강변에 떠내려가 훼손되어 애석했다.
예안객관(禮安客舘)의 담장과 벽이 모두 무너져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대문 밖 느티나무에 떠내려 온 나무가 걸렸는데 크기가 한 아름씩 되는 것이 도로에 쌓여 있었다. 애일당(愛日堂), 척금정(滌襟亭), 쌍벽정(雙碧亭)이 모조리 거센 물결 속으로 들어갔지만, 오직 침류정(枕流亭) 방옥(房屋)만이 화를 면했다. 참 다행한 일이었다.

저녁에 들으니 안동의 영호루(暎湖楼)와 남문(南門)도 떠내려가고 물이 객관에까지 이르렀으며, 동남의 촌집들이 휩쓸려가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영호루는 안동의 웅장한 건물이며 고려의 유적인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니 애석하다.
여강서원(廬江書院)도 떠내려갔는데 위판은 겨우 옮겨냈다고 했다. 들려오는 소식마다 놀라워서 더욱 망극했다.
물이 한창 거셀 때는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가고 집들이 부서지지도 않은 채로 떠내려가기도 했다. 수위가 내려가자 강가 들판에 나무가 이리저리 쌓였는데 사람들이 가져가서 이익을 본 자들이 많았다. 밭 가운데서 물을 잃은 물고기들이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 죽어 백성들이 다 주워 갔고, 닭과 개도 또한 많이 죽었다.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들조차도 오히려 화를 당했으니 이것이 바로 변괴가 아니겠는가.

7월 22일에는 흐렸다가 개었다가를 반복했다. 김령은 밥을 먹고 산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조산숲[造山藪]과 내 앞의 백사장이 아득히 깨끗이 쓸려가서 풀싹조차 하나 없고, 앞들에 진흙 깊이가 몇 길이나 되어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었다. 오시에 제천댁으로 내려가다가 길에서 ‘도산(陶山)에서 배가 전복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급히 일휴당에 당도하니 뱃사공이 와서 말하기를, ‘열 사람이 빠져 죽었다’고 했다. 그 중에 김령의 노비 승수(承守)도 있다 해서 몹시 참담하고 애통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분천(汾川)의 상인(喪人) 이협(李莢)이 의인(冝仁) 마을의 들판에 나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는 말을 듣고, 얼족(孽族) 이필종(李必從)이운(李芸) 및 황씨 성을 가진 양반을 데리고 탁영담(濯纓潭)으로 와서 건너가려고 했다. 그런데 풍파가 크게 일고 물결이 거세지자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이협이 사공을 야단치고 도산 사람이 때리려고 하자 사공이 성이 나서 말했다 한다.
“이렇게 험한 물을 억지로 건너려고 하니, 비록 사람들이 많이 죽더라도 나는 모르겠다.”
이협과 이필종이 억지로 도산과 분천 사람들을 몰아서 배에 오르게 하고, 건너가려고 하지 않던 행인들까지 함께 싣고 가다가 중류에서 배가 뒤집혔다고 한다. 수영을 잘하는 이협과 이필종은 살아 나왔으나 도산의 노비 두 명과 서원 사람 세 명은 모두 죽고, 이운은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 나왔으며, 승수는 평소에 헤엄을 잘 하지 못해 홀연히 비명에 죽었다고 한다.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7월 23일, 하회(河回) 마을도 많이 떠내려가고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한다. 구담(九潭) 건너편에 떠내려 와서 죽은 자가 4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예안의 새로 부임하는 수령의 하인과 말이 단양까지 왔다가 물난리를 만나서 일곱 사람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