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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서원에서 8대조 우암 선생을 만나다
1857년 3월 말, 송달수는 동경 여행을 떠났다. 길을 나선지 일주일째, 송달수 일행은 김천에 이르렀다. 김천에는 송달수에게 8대조가 도는 우암 송시열을 모신 춘천서원이 있었다. 송달수는 우암 할아버지를 뵙고 경주로 가기 위하여 춘천서원으로 향했다. 서원에 도달할 무렵 날이 저물어 참배를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러나 사당에 참배하였다. 그런데 사당에 우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진짜 모습은 사라졌는데 이렇듯 그림을 걸어놓고 ‘선생을 존경하고 추모한다’라고 하니 도리에 맞지 않는 듯하였다. 유학의 도에서는 위패를 모시는 것이 올바른 법도인데 아직도 이렇듯 영정을 모시고 있다니...송달수는 앞으로 어떤 서원에도 영정을 봉안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춘천서원을 관리하는 선비들에게도 위와 같은 뜻을 거듭 이야기했으나, 그들이 이해하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서원 앞의 세심대란 곳에서 휴식하였다. 세심대는 물이 꽤 깊고 맑았다. 이곳은 방초정이란 곳에서부터 약 30리 떨어진 곳인데, 두 산 사이의 시내가 흐르고 있다. 이 시내를 거슬러 올라야 세심대에 오를 수가 있었다. 세심대 옆에는 큰 바위가 시내 가까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큰 소나무 10여 그루가 세심대를 둘러싸고 창연하게 서있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이 마치 돌에 쏟아져 구슬을 이루는 듯하였고 돌들의 빛깔은 흰색을 띠고 있었다. ‘세심대’ 란 세 글자가 석면에 새겨져 있었는데, 집안의 조상이신 송능상 할아버지가 쓴 것이었다. 맑은 계곡물과 멋진 글씨가 어울려 한 폭의 소박한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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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남유일기(南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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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송달수(宋達洙)
주제 : 명승유람
시기 : ( 미상 )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송달수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영남에 위치한 노론계 서원, 춘천서원
이 이야기는 송달수가 경주로 유람하러 가는 길에 김천에 들러 춘천서원을 방문한 내용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춘천서원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파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노론파의 영수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증손자인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을 제사하기 위해 연안 이씨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 등이 1756년(영조 32)에 건립하였다. 이의조가 강학하니 지역 내 노론파 유림인 이수점(李遂漸), 이천복(李天復), 이덕근(李德根) 등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어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것이 춘천서원 강당이다. 서당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 한 곳은 기암(奇岩)이 엉겨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큼직한 글씨로 ‘세심대(洗心臺)’라 새겨져 있다. 건물은 일반 서당처럼 크지 않고 일반 한옥 주택과 비슷하며, 강당에는 ‘춘천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매년 곡우(穀雨)가 되면 함께 공부했던 연안 이씨와 하빈 이씨, 벽진 이씨, 순천 박씨, 거창 신씨, 성산 이씨 여섯 가문의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조상을 기린다. 이들이 현재도 춘천서원 강당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본래 경상도는 퇴계 문하인 남인들의 근거지이지만, 특이하게 춘천서원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아울러 이 지역에도 노론 학맥의 학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초5일. 맑음 아침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니, 곧 영본影本은 온전했으나 진형眞形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봉안奉安하여 ‘선생을 존모尊慕한다.’고 하니, 이 어찌 도리에 맞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보니, 당초에 광봉廣奉한 영정은 후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결코 다시 사당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속히 임모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거듭 서원의 선비들에게 말하였으나 끝내 어떠한지를 알지 못했다. 잠깐 세심대洗心臺에 쉬었는데, 수심水心이 자못 기이했다. 대개 방초정芳草亭으로부터 이 마을까지 30리인데, 마을 입구로부터 10여리를 가다가 다시 유심幽深함을 느낀다. 두 산 사이에 시내가 있어, 흐름을 거슬러 올라야 세심대에 이른다. 큰 바위가 시내 가까이에 웅크리고 있다. 장송長松 10여 그루가 세심대를 둘러 창연蒼然하게 정립挺立했다. 수중水中에 돌이 있어 층계를 만들었고, 또 큰 바위가 있어 중류에 서 있다. 시내의 흐름이 돌에 쏟아져 구슬을 이루었고, 돌의 빛은 자못 흰 색이었으며, 조금 아래에 못을 이루었다. 옛날에 세심대洗心臺 3자를 석면石面에 새겼으니, 운평雲坪이 쓴 것이었다. 지주砥柱와 심담深潭 4자는 서원의 선비가 연전年前에 나에게 와서 글을 요청하여 새긴 것이었다. 산이 깊고 골이 깊어 세인世人이 드물게 보이니, 바로 고인高人과 일사逸士가 임천林泉에 숨어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것 같았다. 오후에 방초정芳草亭에서 돌아와서 금정金井에 묵었다. 봉계鳳溪의 조윤영曹胤永 군이 주찬酒饌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또 중로中路에 맞이하여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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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평선생문집(雲坪先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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