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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장으로 달려가다
1636년 12월 29일, 류태영은 검천에 도착하였다. 이미 경상감사 심연, 좌병사 허완이 밤낮으로 군사들을 몰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임금은 강화로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길을 잡았다가, 적들의 진군이 너무 빨라 결국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옮겼다고 한다.
3일 전. 류태영은 오랑캐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아내 오씨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이다.
“대가가 남쪽으로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니, 신자로서 어찌 구차하게 내 삶을 도모할 수 있겠소. 남쪽의 왜놈과 북쪽의 오랑캐가 다른 부류라고는 하나, 똑같이 조정의 원수요.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모두 살아서 나라를 걱정하고 난리를 만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었소. 그분들의 공렬로 볼 때도 내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오. 당신은 가묘를 받들고, 아이들을 잘 기르도록 하시오.”
눈물로 전송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전장에 도착한 그였다. 그리고 오늘 적들과의 교전에 앞서 이계수, 이주천, 최여호 등과 함께 마지막 전별을 나누었다. “이 참혹하고 원통한 광경을 보고 신하라 한다면 털끝만치라도 삶을 도모할 계책을 낼 수 있겠는가. 오랑캐 진중으로 돌격하여 들어가 오랑캐의 목을 벤 뒤에 죽고 말리라.” 류태영은 친구들과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전투가 막 시작될 무렵 류태영의 아들 류천좌가 아버지를 찾아 진중에 왔다. 류태영은 아들만은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엄히 꾸짖고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최여호, 이한서와 함께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오랑캐들 한 둘을 창으로 찌르고 돌아서는 순간, 적의 탄환이 이한서와 최여호, 그리고 류태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탄환을 맞은 류태영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달려가 돌격하다가 다시금 적의 탄환을 맞았다. 쓰러진 류태영은 숨을 거두면서,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들을 따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지하에서 만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겠구나……. 류태영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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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송호유집(松壕遺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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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류정(柳汀)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636-12-26 ~ 1636-12-2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기도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류태영, 심연, 허완, 이계수, 이주천, 최여호, 류천좌, 이한서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허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이주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심연
◆ 병자호란의 원인과 경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전 명나라는 거듭된 황제의 실정과 환관의 전횡,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력이 쇠퇴했고, 청은 강력한 기병전력을 바탕으로 명나라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중원을 압박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중립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세력은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이 있어야 했기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깎아내리게 된다. 인조 즉위교서에는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해준 은총이 있는데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적혀 있다. 인조반정의 주력인 서인세력은 어쩔수 없이 친명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정세속에 병자호란은 후금의 압박과 약탈 등의 정묘조약 파약 행위와 군신관계 요구의 조선에서의 거절 등으로 일어났다.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1638년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양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쳐들어오자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인조는 급히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아들 봉림대군, 셋째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하지 못하자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12월 26일 오랑캐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갑자기 왔다. 늙은 아내 오씨吳氏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니, 신자로서 어찌 구차하게 내 삶을 도모할 수 있겠소. 남쪽의 왜놈과 북쪽의 오랑캐가 다른 부류라고는 하나 다 똑같은 성조聖朝의 원수요. 선조의 공렬로 볼 때 살아서는 나라를 걱정하고 난리를 만나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전부터 정해진 것이오. 아, 당신은 가묘家廟를 받들고 아이들을 잘 기르도록 하시오. 아내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날 밤에 임진년에 쓰던 무기를 찾아내어 종 은대銀大·은철銀哲·노익老益·성우聖右 등을 거느리고 검천黔川 군진으로 갔다. 12월 29일 밤낮으로 길을 달려 검천에 도착하니, 경상 감사 심연沈演과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 참혹하도다. 이때 상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먼저 빈궁嬪宮과 봉림鳳林·인평獜平 두 왕자를 보냈고, 대신 윤방尹昉과 예조 판서 조익趙翼이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갔으며, 노병이 있는 재상 김상용金尙容 등은 모두 먼저 가도록 하였다. 당시에 상하가 모두 강화도가 공고하고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영상 김류金瑬의 아들인 김경징金慶徵을 체찰사體察使로 삼고,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인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고, 좌상 홍서봉洪瑞鳳의 아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군사들을 독려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이튿날 대가가 출발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나가는데 오랑캐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이미 사현沙峴에 도착해 있었다. 어가가 허둥지둥 도로 성으로 들어와 수구문水口門을 통하여 나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강화도로 가게 되면 오랑캐 병사가 반드시 요로에서 습격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윤방과 김경징이 도중에 듣게 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조익은 그 아비를 뵈러 간다는 핑계로 도망하였다. 빈궁 일행이 강화도에 이르니, 해변의 군사가 오랑캐 군사들이 곧 온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김경징은 그 가족과 짐을 가지고 먼저 건넜고, 두 대군도 허둥지둥하다가 배를 구하여 건넜다. 이에 빈궁이 큰 소리로 곡하며 “경징은 따질 것도 없지만, 어찌 두 대군이 나를 버리고 갈 줄 알았겠는가.” 하였다. 배행승지陪行承旨 한흥일韓興一과 부사 이민구李敏求가 어렵게 배 한 척을 구하여 밤중에 갈 계획을 하였는데, 밤이 깊어 또 오랑캐의 동태를 살피느라 늦어져 다음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신방申昉이 종묘 신주를 모시고 통진通津에서 묵었는데, 현감 채충원蔡忠元이 오지 않았다. 빈궁이 저녁밥을 거르게 되어 흥일興一이 인가에서 쌀을 구하여 죽을 끓여 올렸다. 경징이 가족을 강화도 성내에 안주시켜 놓고 빈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배를 타고 왔다. 흥일이 빈궁을 모시고 나루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유수 장신張紳은 평소 백성들에게 구차하게 아첨하여 명예를 구하였고, 천연의 요새여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여 군사와 백성이 모두 집에 있으면서 기다렸고, 군기도 한 곳에 모아두고서 나누어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 모두 겁쟁이라고 하면서 들어 주지 않았으며, 오랑캐 군사가 곧 이르는 상황에서도 요로에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오랑캐 군사가 나루 옆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경징과 장신이 비로소 갑곶甲串에 이르렀으나 군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급히 포수炮手를 불러 약환藥丸을 나누어 주었는데, 다 마치기 전에 오랑캐 군사가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서 배 몇 척으로 먼저 건너왔다. 이에 경징과 장신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고, 충청 수사 강진흔姜晉昕 등도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오랑캐 군사가 드디어 강화도에 진입하였다. 김상용金尙容과 홍명형洪命亨·이시직李時稷 등은 문루에 올라가 스스로 분사焚死하였다. 오랑캐 장수가 두 대군과 윤방·한흥일과 예조 판서 여이징呂爾徵 등을 협박하여 장계를 만들게 하여 중군中軍 나업羅業을 시켜 남한산성에 고하게 하였다. 성 안에 있는 사대부의 가족이 다 강화도에 있었으므로 인심이 깜짝 놀라 성을 지킬 뜻이 없었기에, 드디어 대가가 성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때 이계수李繼秀·이주천李柱天과 최여호崔汝琥가 절하고 나와 손을 잡고 통곡하며 “이 참혹하고 원통한 광경을 보고 신하라 한다면 털끝만치라도 삶을 도모할 계책을 할 수 있겠는가. 오랑캐 진중으로 돌격하여 들어가 오랑캐의 목을 벤 뒤에 죽고 말리라.” 하였다. 사시巳時에 아들 천좌天佐가 뒤따라 찾아왔기에 “네가 어떻게 강한 오랑캐의 화살을 감당하겠느냐. 즉시 내려가라.”라고 하고, 즉시 최여호崔汝琥·이한서李漢瑞와 함께 달려서 쌍령雙嶺에 이르렀다. 이한서와 최여호가 창을 메고 오랑캐를 찌르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져 죽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다시 달려가 돌격하면서 또한 적의 탄환에 맞았다. 그 탄환은 벼락같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시신이 쌓인 가운데서 죽었다. 주천과 함께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초혼하여 돌아왔다. 망극한 슬픔에 통곡하면서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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