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는 백두산에 당시 오랑캐 사냥꾼의 움막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냥꾼들이 산 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장기간 동안 사냥을 다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냥꾼들은 비단 일반 사냥꾼 뿐만 아니라 군 부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의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이는 사냥꾼들이 지닌 탁월한 사격솜씨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1764년 5월 22일, 박종(朴琮)은 아침 일찍 일어나니 맑은 안개가 호수에서부터 피어올라 큰 무더기를 만들어 못 전체를 덮었다. 조금 있다가 해가 뜨자, 안개는 사라지고 거울 같은 수면이 나타났다.
나무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고, 또 한 줄기 푸른 안개가 물을 질러오니 바람이 문득 말아가 버려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북쪽으로 25리를 가서 천수동(泉水洞)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수목은 고색창연하고 이끼 꽃은 늙은 나무에 걸려 있어 흡사 두꺼운 모피가 걸려 있는 듯했다. 북쪽으로 10리를 가니 포석동이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니 골짜기는 모두 물길인데, 물은 땅 밑으로 흐르고 있을 뿐 포석이 땅에 가득하였다. 천평에서부터는 토맥(土脈)이 모두 이러한 암석들이고 들어갈수록 더욱 많아졌다. 나는 말과 마부를 먼저 가게하고 도보로 천천히 걸었다. 조첨지도 말을 두고 도보로 따라왔다. 개울로 들어가자 두 번씩이나 갈림길 골짜기를 만났다. 그런데 모두 오른쪽을 따라 갔다. 개울이 거의 다하자 다시 갈림길 골짜기가 시작되었다. 오른쪽을 버리고 왼쪽으로 나아가자 백두산 전체가 갑자기 눈앞에 들어왔다. 수목들은 왜소하고 한기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언덕 아래에 눈이 쌓인 봉우리가 있었다. 연지봉(30리)에 도착하여 임시 움막에서 유숙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등정할 계획이었다. 언덕 위에 나무를 꽂아 장막을 친 곳이 있었다. 전통성이 말하기를, “이것은 오랑캐 포수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라고 하였다. 이날은 55리를 갔다. 올 때 노기 몇 건을 가지고 왔지만, 거리가 한결 같지 않아 모두 표준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원지의 노기만이 딱 들어맞아 착오가 없었다.
일찍이 임술년(1742년, 영조 18년)에 담와(澹窩) 홍계희(洪啓禧) 선생이 왕명으로 갑산에서 무산으로 들어와 백두산을 두루 보고 무산 사람 백찬귀(白贊龜)를 시켜 거리를 측량케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