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수마트라·중국·만주·한국·시베리아 흑룡강 연안에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나 일본·대만 등에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 이야기도 이러한 분포지역에 따라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이나 궁궐 안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 문헌설화에 나타나는 호랑이 문헌설화로 전승되는 호랑이 이야기들은 각종의 문헌에 널리 산재되어 있다. 오래되기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신화(檀君神話)〉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 이야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에서 호랑이는 극히 짧은 순간 등장할 뿐이지만, 가장 오래된 호랑이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 속에서 호랑이는 긍정적인 형상의 동물인 곰과 대비되어 부정적인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단군신화 외에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견훤(甄萱)에게 젖을 먹여주었다는 호랑이 이야기가 전한다. 또 고려의 개국 신화 속에 나타나는 〈호경설화(虎景說話)〉와 조선의 건국설화와 관련된 〈목조설화(穆祖說話)〉에도 호랑이 이야기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호랑이는 신령하며 긍정적인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개국의 신성함을 드러내기 위한 신화적인 기능을 지닌 이야기이며, 이러한 신화적 문맥에 따라 신령스러운 호랑이 형상으로 나타나기 일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모든 호랑이 이야기가 신화적인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3대 야담집인 『청구야담(靑丘野譚)』·『동야휘집(東野彙輯)』·『계서야담(溪西野談)』을 비롯하여 여타 야담집에도 다양한 호랑이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들을 보면 대략, 호랑이를 물리친 장사, 호환(虎患)에서 사람을 구한 점쟁이, 효자를 도운 호랑이, 신랑 물어간 호랑이 따라간 신부, 은혜 갚은 호랑이, 호환(虎患) 면한 이야기, 동료 대신 호랑이에게 희생되려다 도리어 구원받은 이야기, 호랑이 등에 탄 사람 이야기, 호랑이 태몽 등 다양한 양상의 호랑이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들 조선 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호랑이는 주로 인물설화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호랑이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시기와 인물을 정확히 밝혀 어느 정도 구체적 사실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이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가끔 보인다.
○ 구비설화에 나타나는 호랑이 구비설화는 문헌설화가 추구하는 기록성·공식성·교훈성보다는 유동성·적층성·흥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문헌설화와 다르다. 호랑이 이야기도 구비설화 형식에서는 보다 높은 흥미를 추구하며, 다양한 변이 형태들을 보여주고 있다. 구비설화 채록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대계』와 『한국구전설화』등에 등장하는 이야기만 하더라도 총 611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러한 구비설화의 바다에서 여러 기록문학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문헌설화도 사실은 이런 방대한 구비설화를 저변으로 하여 나타날 수 있었고, 소설문학도 구비설화를 모태로 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 소설에 나타나는 호랑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 풍부한 호랑이설화의 자산을 배경으로 하여 이를 서사적으로 발전시킨 소설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의 〈호질(虎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질〉은 연암 스스로가 ‘절세의 기문’이라 일컬은 바 있는 우언소설(寓言小說)로 매우 중층적인 알레고리를 함유하고 있다. 〈호질〉은 호랑이가 나타나 부패한 도학자를 꾸짖는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호랑이는 만주 황제, 본질적인 비판자, 호(胡), 청나라 또는 청 황제, 인(人)에 대비되는 물(物), 허(虛)에 대비되는 실(實), 유(儒)에 대비되는 민(民), 종(從)에 대비되는 주(主), 화(華)에 대비되는 이(夷), 생태적 담론자 등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그 후에도 호랑이는 안국선(安國善)이 지은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1908)에서 이른바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호랑이보다 사나운 탐관오리〔가정어맹호(苛政於猛虎)〕들’과 인간들을 비판하는 비판자로, 〈록처사연회(鹿處士宴會)〉에서는 가학적인 관원의 모습으로, 〈노섬상좌기(老蟾上座記)〉에서는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고 진노와 횡포를 부리는 존재로, 〈서동지전(鼠同知傳)〉에서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현명한 판관으로, 김필수(金弼秀)가 지은 〈경세종(警世鐘)〉(1910)에서는 인류문명의 비판자로, 송완식(宋完植)이 지은 〈만국대회록(蠻國大會錄)〉(1926)에서는 인류의 포악함을 비판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호랑이 이야기가 설화형식에서 소설형식으로 이행하면서부터는 호랑이에 대한 의식이 점차 다채롭고도 중층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설화와는 달리 하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 표현은 중층적인 의식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소설 속의 호랑이는 주로 인류문명을 무섭게 비판하는 비판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동물이며, 호랑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동물담을 대표하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는 구비설화와 문헌설화 그리고 소설 및 여타 산문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이 중에서 구비설화에 나타나는 호랑이 이야기가 가장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어 왔다. 그리고 여기에는 흥미성과 현장성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문헌설화에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는 구비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인물이 제시되며 기록성이 강화되었다. 구비설화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호랑이 이야기들이 문헌설화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이런 풍부한 호랑이설화들을 저변으로 하여 호랑이 이야기를 다룬 소설문학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구비설화와 문헌설화에 비하면 적은 수이지만 상당히 높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며 특히 문명 비판자로서의 호랑이 형상이 부각된다. 그리고 호랑이 이야기는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산문으로 실험되어 전승되기도 하여 그 방대한 양에 걸 맞는 다양한 전승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 자료에 나타난 호랑이의 형상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①신령스러운 호랑이, ②어리석은 호랑이, ③인정 많은 호랑이, ④은혜 갚은 호랑이, ⑤변신과 관련된 호랑이, ⑥사나운 호랑이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한 가지 유형 안에서도 세부적인 호랑이의 양상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위의 호랑이 형상들이 중첩되는 양상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에 나타난 호랑이의 형상은 ‘천의 얼굴을 가진 호랑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호랑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양상의 감정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투사되었다는 것은 호랑이가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의 삶과 매우 가까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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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나팔을 불어 호랑이를 쫓으며, 천길 낭떠러지 위의 삐걱대는 다리를 건너며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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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 9월 16일 기사일에, 김도수 일행은 남여를 타고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승려가,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습니다.” 라고 하고는 쌍각(雙角)을 불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길이 험하여 돌비탈을 우러러 몇 리를 올라가니 조금 평평한 곳이 나왔다. 거친 밭 몇 묘가 있다. 또 몇 리를 가니 승려가, “길이 끊어져 가마가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니 앞에 절벽의 허리에 걸려 있는 허술한 잔교가 나왔다.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인데,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러러 불일암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하였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서 차가운 바람이 분다.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암자에서 10여 보 거리에 있는 대(臺)에는 ‘완폭대(翫瀑臺)’라고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랗다. 길다란 폭포가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데, 눈발이 흩날리듯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며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다. 깊숙하고 어두워 만 길 깊이로 음침한 곳은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승려가,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하였기에, 바위틈에 옛날에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준필이 동쪽 담으로부터 와서 똘배 다섯 개를 올렸는데,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병을 찾아서 거듭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나와 바위 위에 앉으니 골짜기의 바람이 솟구쳐 일어 바위의 나무들이 모두 흔들린다. 구름 기운이 넘쳐 일렁거려 마치 거센 파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다. 돌아와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았다. 종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쌍각을 부니 골짜기에 소리가 진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