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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초고속 승진과 파격 인사

이정국


‘승진과 인사이동’과 관련해서는 내 인생에서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대 생활, 영화감독 시절, 그리고 교수 시절이 그것이다. 물론 교수라는 직업도 일종의 공직이겠지만, 나는 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영화 작업을 해왔기에 ‘승진과 인사이동’에 대한 집착이나 관심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군대에서 승진(진급)이나 인사이동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남자로서 대부분 겪는 일이기에 별다른 게 없다. 역시 나는 영화라는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하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 남다른 경험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 연출부 막내에서 조감독을 거쳐 올라가 최종적으로 감독이 되기까지 10여년이 걸리는 게 상례이지만(물론 그래도 감독이 되긴 쉽지 않지만), 다른 직업과 달리 본인의 능력에 따라 그런 중간과정이 모두 생략되기도 한다. 일종의 초고속 승진인 셈인데, 나는 다행히 운 좋게 그런 연출부 과정을 안 겪고 바로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잘하면 명예와 돈이 보장되지만, 실패하면 데뷔작(승진)이 바로 은퇴작(해임)이 되는 경우도 많기에 그야말로 불안한 직업이다. 일반 공직은 대부분 잘하든 못하든 정년이 보장되고, 연금이라도 나오지만, 영화감독은 그런 게 없다. 그러기에 할리우드 같은 경우엔 아예 감독 진급(승진)을 스스로 포기하고 조감독으로 눌러 앉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오히려 현장에서 안정되게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선 뛰어난 능력은 기본이고, 어느 정도 운과 인간관계, 타이밍 등 다양한 요소가 필요하다. 물론 뛰어난 영화적인 능력만 갖추면 정년도 필요 없이 80세 넘어서까지 현역 활동이 가능한 좋은 직업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88세), 우디 앨런(Woody Allen, 83세), 켄 로취(Ken Loach, 82세) 같은 유명 감독들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영화감독은 어찌 보면, 조선시대의 승진제도인 불차탁용(不次擢用)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물론 예술가와 공직자의 세계를 단순 비교하긴 곤란하겠지만, 능력이 되는 사람은 자비에 돌란(Xavier Dolan, 21세에 데뷔)처럼 어린 나이에도 세계적인 감독이 될 수 있고, 이창동처럼 뒤늦게 감독이 되어(44세 때 데뷔) 지금까지도(현재 64세) 활발하게 일할 수도 있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사실 이 글에서 영화감독 얘기보다는, 좀 전에 언급한 ‘불차탁용(不次擢用)’제도 덕에 나라를 구한, 역사적인 인물을 소개하고 싶었다.


불차탁용(不次擢用): 순차를 따지지 않고 품계를 뛰어 넘어 인재를 발탁해 쓰다


요즘 시대에 불차탁용은 능력을 보고 직급을 안 따지고 특채나 초고속 승진을 시키는 것을 의미할 텐데, 긍정적인 의미로는 잘 안 쓰이는 것 같다. 권력자나 대기업 오너들이 자녀나 친인척, 지인들에게 큰 자리를 주기위한 부정적인 방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 포털에서 ‘승진, 인사이동’을 검색해 보면, ‘꽃집’, ‘축하화분’, ‘승진인사’, ‘영전’ 등 주로 긍정적인 단어 일색이다. 사실 ‘승진’과 ‘인사이동’과 관련한 연관검색어로는 부정적인 단어도 많다. 좌천, 강등, 파면, 해임, 청탁, 초고속 승진, 복직, 파격인사, 정실인사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그 모든 긍정적,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되는 상황을 거의 다 거치면서도 나라를 구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이다.



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하고, 조선시대 오백년 역사상 불차탁용 제도가 가장 긍정적으로 적용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처음부터 그 덕을 본 건 아니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말단(종9품)에서 시작해 승진, 좌천, 강등, 다시 초고속 승진, 파직, 백의종군, 복직, 다시 초고속 승진 등을 거치면서 정3품까지 올랐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나중에 장관(해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간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욕을 많이 먹는 선조가 유일하게 잘한 업적으로 1591년 임진왜란 직전에 종6품의 정읍 현감인 이순신을 정3품의 당상관에 해당하는 전라 좌수사로 7단계나 뛰어 넘어(7계급 특진) 불차탁용한 사례를 든다. 지금 군대로 따지자면, 소대장을 장군에 임명한 격이다. 물론 선조의 그런 결심은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가 결정적이었지만 말이다. 류성룡이 선조 주변 대신들의 의심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렴결백하고 능력 있는 이순신을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에,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육지에서 보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해군으로 파격적인 인사이동을 시킨 것 또한 신의 한 수 였다. 이순신의 승진과 인사이동이 얼마나 극적인가는 아래 연보를 보면 알 수 있다.

  • 1576 32세,무과 급제, 함경도 권관(權管, 종9품)으로 부임
  • 1579 35세,한양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 임명
    *정5품 서익의 친인척의 승진을 반대하다 충청절도사 군관으로 좌천
  • 1580 36세,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종4품)파격 승진-전라 수군 첫 인연
  • 1581 37세,1월 서익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5월 다시 훈련원 봉사(종8품)강등
  • 1583 39세,7월 함경도 막하 권관(종9품)으로 강등되어 전근
    오랑캐 토벌로 공을 세워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임명
  • 1985 41세,주부(主簿, 종6품)복직
  • 1587 43세,함경도 조산보 만호, 여진족 패배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
  • 1588 44세,여진족 토벌에 참여 적장 죽이고 공을 세워 백의종군 마침
  • 1589 45세,종6품 정읍현감 부임-전라감사 이광 추천
  • 1591 47세,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본영 여수 부임_7단계 승진_유성룡 추천
    불차탁용의 대표적 사례
  • 1592 48세,4.12. 거북선 완성 / 4.13, 임진왜란 발발
    5월, 옥포, 사천, 당항포, 율포 해전 등에서 연전연승-자헌대부 승진
    7월, 한산도대첩 승리-정헌대부 승진
  • 1593 49세,8월,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
  • 1597 53세,1.12 정유재란
    4.1. 선조 명을 거역해 압송되어 감옥에 갇힌 후, 2번째 백의종군
    8.3.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9.16 명량해전 대승-숭정대부로 서훈하려했으나 대신들 반대
  • 1598 54세,11.19 노량해전에서 전사
  • 1599우의정 증직
  • 1604좌의정 증직
  • 1793영의정 증직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천민 출신의 병사도 불차탁용의 제도를 활용해 능력만 있으면 정9품 군관으로 등용하였다 한다. 그런 인재등용제도는 사실 세종 때부터 이미 적극 활용하였다. 세종은 천민출신 과학자 장영실을 종3품의 대호군까지 고속 승진 시켰고, 아전(중인) 출신의 李藝(이예)를 조선통신사로서의 공을 인정해 재상급인 동지중추원사(종2품)로 발탁해 중용한 바 있다.

若其可用之才면  不次濯用何如오? (쓸 만한 인재가 있다면, 승진 차례를 무시하고 발탁하여 채용함이 어떠한가)

- 세종실록재위12년 12월 27일

지난해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그런 불차탁용이 다시금 회자되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임명이 그런 예에 속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에 ‘최순실 게이트’ 특별검사 수사팀장을 맡았던 윤석열 대전 고검 검사를 승진시키면서 최순실 사건 추가 수사와 공소유지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검사장급으로 첫 승진하면서 서울중앙지검장을 맡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사법연수원 15기)도 대법관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이전 양승태 대법원장(2기)과 연수원 13기수를 뛰어넘어 임명되었다 해서 화제가 되었다. 기수 서열문화가 군대 못지않게 심한 사법기관에서 그야말로 불차탁용의 드문 예라고 회자된다. 물론 정확한 검증을 전제로 해야겠지만,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순신의 성공사례에서 보듯, ‘쓸 만한 인재가 있다면, 승진 차례를 무시하고 발탁하여 채용하는’ 불차탁용 제도가 때로는 나라를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 소개

이정국
이정국
영화감독/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
장편영화 <편지>(1997), <산책>(2000)외 6편 연출
단편 <엄마의 편지>(2016)외 20여 편 연출
“예조정랑이 되자마자 청탁을 받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1-21 ~ 1720-01-22
1720년 1월 하순, 정기 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권상일은 지난해 성균관 직강으로 내부 승진이 된 상태였다. 그는 꽤 성균관에 오래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직강이 되었던 그가 정기 인사 대상에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인사대상에 올라 있었다. 예조정랑 수망에 권상일, 부망에 홍구, 말망에 여길에 올라와 있었다. 결국 예조정랑은 권상일이 낙점되었다. 예조는 성균관의 상급 관청이었으므로 같은 5품직이라고 하더라고 성균관보다는 예조가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또한 예조참판과 예조참의 또한 새로 교체되었으므로 예조 관원의 절반 이상이 이번 인사에서 새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예조정랑으로 부임한지 하루도 안되어 청탁이 들어왔다. 역관과 의학 5~6명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 청탁 편지는 대개 취재(取才)와 고강(考講)에 대한 것이었다. 본래 과거는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그런데 기술직 관원인 사역원(司譯院)의 역관, 전의감(典醫監)의 의학, 관상감(觀象監)의 역학 등은 모두 취재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다. 그런데 그 취재 담당 기관이 예조였던 것이다.

“이괄의 난 (5) - 피난하는 임금의 가마를 뒤따른 자들, 승진 리스트에 오르다”


김령, 계암일록, 1624-03-08 ~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인조반정에서의 공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 요소로 경계하는 조정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으킨 난은 순식간에 조선을 강타했다. 영변에서 시작된 난은 보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도성까지 내려왔고, 국왕 인조는 급기야 파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변란의 공과 죄를 물어 체직과 임명이 계속되었다.
이 때 인조의 파천 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수행한 공으로 4품 이상의 관리는 모두 승격을 시켜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기까지 승진 리스트에 오른 관리가 모두 1백 5명이었다.
대간(臺諫)에서는 이를 논계하여 상이 너무 남발되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 결정을 거둬달라는 대간의 논계는 4품 관리는 통정대부로 올린 것만 개정하자고 청하는데 그쳤다. 임금의 가마를 따랐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귀와 김류가 관직임명을 두고 갈등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7-27 ~
1625년 7월 27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내렸다. 식사 때쯤 그치더니, 이 비로 냇물이 불었다. 저녁에는 김시익이 찾아와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김령은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에 남이공이 대사헌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것은 전적으로 김류를 통해서인 듯 하였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와 친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직을 제수받았다. 이를 전해듣고 이귀가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귀가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전하가 하교하여 ‘이귀가 공믈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고 명하시고는 또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인데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우의정 신흠 등이 차자를 올려 겨우 주상전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유배의 명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이 일로 김류 역시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이란 이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의 군적 어사도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이고, 우도는 김시양이란 이가 뽑혔다. 영의정 자리는 이미 봄부터 비어있었는데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정승자리는 비어 있고, 또 반정의 공신들 사이는 저렇듯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었다.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인사 대상에 오르다 번번히 떨어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19년 7월 22일, 정기 인사 기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사를 담당해야 하는 이조참의가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으므로 이조참의를 교체시켜 이병상(李秉常)을 임명했다. 그래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사가 열렸다. 이날 인사에서 권상일은 그토록 바라던 지방관 후보에 올랐다.
강진현감의 말망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망은 실제 거의 가망이 없었다. 3후보 중에서 가장 꼴지가 말망이었기 때문이다. 병조좌랑이었던 김성발이 1순위인 수망으로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와서 벼슬살이 하면서 단지 쇠잔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부친을 영화롭게 모시려 했지만 지금 또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튿날 다시 정사가 진행되었다.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병조좌랑을 대신하기 위한 인사로 권상일이 2순위인 부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못했다. 다음날 또 정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병조좌랑 한자리에 그가 3순위 말망에 올랐고 또 한번은 예조정랑 자리에 2순위 부망에 올랐으나 그는 낙점을 받지 못했다. 다시 성균관에서 몇 개월의 관직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복직 (2) - 성주목사로 복직 될 뻔 했으나…”


권문해, 초간일기,
1582-11-20 ~ 1583-01-16
1582년 11월 20일, 권문해는 공주목사 재직 시절의 모든 사건과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책임을 벗게 되자 관직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주목사로 추천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성주목사로 세 번이나 추천을 받아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탄핵을 받아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때 권문해가 성주목사의 세 명의 후보자 중 말망(末望)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 후보자 모두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임금을 모셨던 사람들로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가장 첫 번째로 추천을 받아 수망(首望)에 오른 윤희길(尹希吉)이 성주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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