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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역사와 역사 콘텐츠, 그리고
한국형 판타지

조정미


사실과 픽션, 역사와 콘텐츠의 멋진 만남


역사와 역사콘텐츠라는 두 단어는 매우 유사하면서도 큰 차이를 갖고 있다. 대중들은 영화, 드라마, 역사소설, 역사만화 등의 역사콘텐츠를 통해 역사를 접하게 되고 그를 통해 역사공부를 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현상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염려스럽기만 하다.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정통사극이 주류를 이루던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소재로 하며 창의적인 해석에 의한 허구적 요소가 많이 반영된 역사소재 창작콘텐츠가 태동하기 시작한 이후로 역사학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염려를 표명하는 많은 논문들이 발표된 것이 그 사례다. 창작자들의 과도한 창작의욕이 역사왜곡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콘텐츠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노하우를 터득한 듯싶다. 역사콘텐츠 창작자들은 역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고증에 힘쓰고 있고, 참신한 소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콘텐츠의 영향력에 대해 감탄이 일어나는 중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방된 ‘미스터션샤인’의 마지막 회를 빛나게 해준 것은 영국 데일리메일 특파원이었던 맥켄지 기자가 1907년에 촬영한 의병사진이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빛나게 해주는 힘은, 사실과 픽션, 즉 역사와 콘텐츠의 멋진 만남을 통해 가능하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맥켄지 기자가 사진 찍은 마지막 장면(위)과 1907년 실제 사진(아래)


역사콘텐츠, 창작 소재를 위한 지식 공유지로


모바일과 인터넷 기술로 대변되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오히려 수많은 역사콘텐츠가 창작되고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간편한 이용이 가능하게 개발된 ‘역사자료 검색 서비스’의 역할이 크다. 역사콘텐츠 창작자들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참신하고 다양한 소재들을 찾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역사자료 검색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최초의 디지털 역사자료라고 할 수 있는 우리말 번역본 ‘조선왕조실록’은 1995년부터 CD롬 형태로 대중에게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CD롬으로 판매되는 디지털 실록은 상당한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극작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05년부터 조선왕조실록이 온라인에서 무료로 서비스되자, 젊은 작가들의 실록 활용은 크게 증가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8억 원의 정부지원을 받아 웹서비스로 구축한 조선왕조실록은 애초에는 학술적 용도로 구축되었지만, 역사콘텐츠 창작자들이 창작소재를 자유롭게 찾아 낼 수 있는 지식공유지로 활용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창작자들이 손쉽게 한국학 자료들을 검색할 수 있는 서비스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한국학 자료들은 한문으로 되어 있거나, 한글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읽기 어려운 고어 필사본인 경우가 많으므로, 우선 원문을 디지털화 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며 현대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웹에서 구동되는 검색서비스로 개발하는 과정도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은 작업들은 국가예산이 쓰이지 않고서는 진행될 수 없는 규모이다. 또한 전문성과 특색을 가진 여러 기관들이 함께 진행해야 할 사업들이다.


2018년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 국내 역사소재 7개 기관이 7년째 개최해 오고 있다.


디지털 역사자료의 구축과 활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있어서 사업 초기에는 구축이 중심이 되었다면, 점차 활용에 무게중심이 실리기 시작한 것은 실제적인 성공사례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12년 11월, 국내 역사소재 전문기관 7개가 최초의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를 개최하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국학진흥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그들이다.

이 콘퍼런스는 애초에 ‘창작’을 염두에 두었다는 데에서 차별점을 갖고 있다. 그동안 공급자 중심의 관점에서 ‘구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사업이 사용자 중심의 관점에서 ‘활용’을 중심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들 기관 중 5개는 교육부 산하이며, 2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로서 각기 다른 소속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간 꾸준히 콘퍼런스를 함께 개최해 왔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구축되었거나 구축 중에 있는 ‘디지털 역사자료’가 창작자들에 의해 풍성하게 활용되고 창작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들 각 기관들이 어떻게 역사콘텐츠를 창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2017년도 콘퍼런스에서 각 기관에 의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인기 창작자들이 발표자로 나선 2018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


지난 7년간 역사전문가와 콘텐츠창작자들의 만남의 자리를 다양하게 모색해온 이 콘퍼런스는 7회째를 맞이하는 2018년에 가장 큰 열매를 거둔 듯 싶다. 지난 10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상상력의 닫힘과 열림, 한국형 판타지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2018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에는, 최근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 콘텐츠 창작자들이 직접 발표자로 나섰다. 웹소설, 웹툰 등으로 두터운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네 명의 작가들이 발표자로 참가한다는 사실이 작가들의 SNS를 통해 알려지자마자 사전참가신청 당일에 마감이 되어버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예년과는 다른 뜨거운 분위기는 콘퍼런스 당일의 행사 현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고,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일찍 도착하여 홍보부스를 관심있게 돌아보기도 했다. 자칫 딱딱한 분위기가 될 수 있는 콘퍼런스 발제자들의 발표는 유연하고 흥미로웠으며, 객석에서는 발표 중간 중간에 박수와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회를 맡은 안전가옥 김홍익 대표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사회자로 나선 안전가옥의 김홍익 대표는 작가들의 영향력이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세션 1의 발표자인 진산 작가와 곽재식 작가, 세션 2의 발표자인 돌배 작가와 김나임 작가가 모두 팬덤을 형성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인기 작가이다. 이들 작가들이 창작하고 있는 콘텐츠는 전통 창작소재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형 판타지로서, 창작자들로부터 창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독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는 콘퍼런스가 되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작가들이 말하는 한국형 판타지와 선인의 상상세계


세션 1은 ‘한국형 판타지를 말하다’를 주제로 ‘괴물’을 중심으로 한국의 환상적 상상세계에 관해 알아보고, 한국무협 소설의 시대에 따라 변화된 ‘영웅’과 그에 따른 서사방식의 변화를 살펴보는 시간으로 기획되었다. 진산 작가는 남성 작가 일색의 국내 무협소설 계에서 활동하는 최초의 여성 작가인 동시에 한국무협을 창작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진산 작가는 ‘한국형 판타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세계 각국 판타지의 특성은 그 나라의 특정문화와 판타지의 결합으로 의미있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임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형 판타지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며, 한국형 판타지가 가야할 길은 한국적으로 왜곡시킨 한국적 판타지가 좋은 한국적 소재를 파고 들어가서 한국적으로 잘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형 판타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진산 작가


카이스트 출신의 소설 쓰는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곽재식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는 괴물백과사전을 기반으로 한국의 괴물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발표를 진행하였다. 그의 블로그에는 현재 어우야담, 용재총화, 삼국사기 등 한국의 고문헌에 나타나는 특이한 괴물 이야기가 약 260 건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분석의 결과 한국적 괴물 이야기의 특성은 매우 다양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오히려 현대 대중문화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좁아지는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 안타깝다고 언급하였다.

세션 2는 ‘선인의 상상세계, 판타지로 그리다’라는 주제로 국내의 민담이나 설화를 모티브로 하는 웹툰작가인 돌배(장혜원) 작가와 김나임 작가가 발표자로 참여하였다. 돌배 작가는 선녀와 나무꾼을 모티프로 한 웹툰 ‘계룡선녀전’의 작가로서, “‘선녀와 나무꾼’의 변주, 21세기 선녀”라는 주제로, 자신의 웹툰 ‘계룡선녀전’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창작하였는지의 과정을 발표하였다.

김나임 작가는 바리데기 신화를 모티프로 한 웹툰 ‘바리공주’의 작가로서, 평소 우리나라의 귀신 만화가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으며, 처녀귀신인 손말명, 총각귀신인 몽달귀신, 광대가 죽어서 된 귀신 청계, 잉어 도령, 업신 등 우리나라의 전통 귀신들의 모습과 그들이 품고 있는 아픔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한, 귀신과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존재인 무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 무조(巫祖)로 여겨지는 바리데기 설화를 소재로 하여 바리공주가 전하는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우리나라의 전통 귀신들의 모습과 그들이 품고 있는 아픔을 보여주는 웹툰을 창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세션 2의 발표가 끝난 후 웹툰 작가들과 역사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토론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한국적으로 왜곡하는 한국형 판타지의 길


2018 전통창작 콘퍼런스는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역사콘텐츠 창작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피부로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단지 독자로서 창작자들과의 만남을 갖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작가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독자이자 작가지망생들의 뜨거운 관심은 각 기관에서 운영하는 홍보부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참가자들은 홍보부스를 모두 들러보면서 스탬프를 찍어 오면 기념품을 받는 콘퍼런스 운영에 흥미롭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션 1과 세션 2 사이의 쉬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홍보부스를 충분히 방문하지 못하여 아쉬웠고, 내년 콘퍼런스에는 행사가 끝난 뒤에도 홍보부스가 운영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벌써 내년 콘퍼런스를 기대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2019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행복한 부담이 될 듯도 싶다.

또한 역사콘텐츠를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콘퍼런스는 항상 역사전문가에게 고증 여부를 지적당하며 짓눌리곤 하던 어깨가 쫙 펴지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역사콘텐츠가 판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상상력이 열리고 닫히는 그 틈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춘향전의 춘향이가 판타지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아무리 일부종사를 목숨걸고 지켰기로소니 기생의 딸로서 어떻게 정경부인이 될 수 있었을까? 최근 창작된 영화 ‘방자전’은 어릴 때부터 춘향전을 듣고 읽고 보면서 자란 한국인들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아름답고 슬픈 판타지로 충분하지 않은가?

진산작가의 말처럼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파고들어가서 가장 한국적으로 왜곡하는 것 그것이 한국형 판타지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 싶다.





집필자 소개

조정미
조정미
스토리텔러 조정미는 다양한 기록에서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를 찾아내는 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며,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언론대학원에서 문학과 출판을 전공하였으며, 월간 《현대시》의 신인추천문학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자 상명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역사콘텐츠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콘텐츠 전문 기업인 ㈜스토리미디어랩 대표 이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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