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현(禮安縣) 오천촌(烏川村, 안동댐으로 수몰)에 살던 김령(金玲, 1577~1641)은 여러 형제들과 1603년 음력 9월 28일 저녁에 안동부(安東府)의 도목촌(道木村,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의 배한림(裵翰林)을 보러 갔다. 배한림은 김령 일행을 인근의 명암사(鳴巖寺)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포(泡)’를 만들어 먹고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기록은 김령의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 나온다. 김령이 ‘포’라고 적은 음식은 오늘날의 두부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우리나라 음식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두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자꾸 ‘포’라고 쓴다.”(《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언지하(雅言指瑕)》)고 비판했다. 사실 한자 ‘豆腐’는 북송 사람 도곡(陶谷, 903~970)이 965년에 쓴 책으로 알려진 《청이록(清異録)》에 처음 나온다. 두부의 유래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한나라 유방(劉邦, 서기전247(추정)~서기전195)의 손자 유안(劉安, 서기전179~서기전122)의 발명설은 명나라 때 조작된 역사이다.
두부의 ‘부(腐)’라는 한자는 동물의 젖을 응고시킨 것을 가리킨다. 치즈의 일종인 ‘유부(乳腐)’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유부’에서 약간 썩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부’의 뜻은 부패와도 통했다. 그러나 ‘포’라는 한자는 액체가 응고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족들이 북방 유목민의 ‘유부’를 모방하여 젖 대신에 대두로 만들었기 때문에 ‘두부’라는 한자 명칭이 생겨났다. 원나라 때인 고려 말에 두부 요리법이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두부가 탄생한 비밀을 몰랐다. 더욱이 이 음식의 이름에 붙은 ‘부(腐)’라는 한자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의 어의였던 전순의(全循義)는 아예 두부를 ‘두포(豆泡)’라고 적었다. 조선시대 글자께나 아는 선비마저도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김령은 할아버지인 김유(金綏, 1491~1555)와 함께 《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한문으로 된 요리책을 남겼다. 할아버지 김유는 《수운잡방》의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을, 김령은 〈계암선조유묵(溪巖先祖遺墨)〉을 썼다. 이 책의 〈탁청공유묵〉에는 ‘취포(取泡)’라는 이름으로 두부 만드는 법을 적어 놓았다.
김유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과 [탁청공유묵溪巖先祖遺墨] 표지이다. 수운잡방은 음식을 마련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의미다. 본래 수운需雲은 연회를 베풀어 즐기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역周易에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수괘다. 군자는 이 상징을 취하여 마시고 먹고 잔치하고 즐거워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콩 1말을 맷돌에 타서 껍질을 없애고 또 녹두 1되를 따로 타서 껍질을 없앤다. (이것들을) 물에 담가 불린 다음 천천히 곱게 갈아 고운 베자루에 넣고 찌꺼기가 없도록 정갈하게 거른다. 다시 걸러 솥에 붓고 끓이다가 거품이 넘치면 깨끗한 냉수를 솥 가장자리에 조금씩 붓는다. 대체로 세 번 넘쳐 세 번 찬물을 부어주면 익는다. 콩이 익으면 두꺼운 섬거적을 물에 적셔 불 위에 덮어 불기운을 차단하고 소금물과 냉수를 섞어 심심하게 해서 천천히 부어 넣는다. 조급한 마음이 들면 두부가 단단해져서 좋지 않으므로 천천히 부어 넣어야 한다. 두부가 엉기면 베보자기에 싸고 그 위를 고르게 눌러준다.”
이 두부 만드는 법은 요사이와 비슷하지만, 콩과 함께 녹두를 넣는 것이 다르다. 녹두를 넣으면 응고가 쉽게 된다. 그래서 더욱 조급하게 만들지 말라고 한 듯하다.
[수운잡방]에 조리법에 따라 두부 만드는 과정 재현. 한국국학진흥원은 수운잡방에 기록된 122가지의 조립법
가운데 50종의 음식을 재현하여 화보집으로 간행하였다. (출처: 김유, 김채식 옮김, 《수운잡방》, 글항아리)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두부의 다른 말로는 ‘연포(軟泡)’가 있다. 한자 ‘軟’은 부드럽다는 뜻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연두부’인 셈이다. 김령도 그러했듯이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찰에 가서 두부를 먹었다. 심지어 두부 요리 먹는 모임을 ‘연포회(軟泡會)’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약용은 연포회가 주로 능원이나 사찰에서 개최되는데, 그곳에 두부를 잘 만드는 조포(造泡) 혹은 조포장(造泡匠)이란 직책의 요리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개국 때부터 불교를 탄압하면서도 각종 제향과 잔치에 쓰이는 많은 양의 두부를 조포사(造泡寺)라고 지정한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다. 김령의 일기를 보면 도산서원에도 조포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 두부는 대표적인 제사음식이었다. 그러니 능원·향교·서원에 조포장이 있었을 것이다. 종묘를 비롯하여 서울과 지방 관아의 제향에 쓰이는 두부는 주로 조포사로 지정된 인근의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다. 김령이 묵은 명암사도 안동부의 관아와 향교에 두부를 공급했던 조포사였을 가능성이 많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충청도 덕산의 조극선(趙克善, 1595~1658)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는 연포회 이야기가 수없이 나온다. 조극선이 15세였던 1609년 12월 3일부터 29세였던 1623년 12월 30일까지의 일기를 모은 이 책에 적힌 연포회 모습은 이러하다.
1615년 음력 10월 2일 갓 약관의 나이를 넘긴 조극선은 사돈 이씨와 ‘와사(瓦寺)’라는 사찰에서 다음날 저녁에 연포회를 갖자고 약속을 한다. 양반들이 약속만 한다고 사찰에서 연포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연포회의 경비를 마련하는 설판(設辦)을 정해서 주요 식재료를 마련하고, 그것을 해당 사찰에 미리 보내면서 연포회를 열겠다고 알려야 한다. 당연히 설판이 참석자들에게 통보도 했다.
연포회의 핵심 요리인 연포국의 요리법은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치선(治膳)》(1715년경)에 나온다. 제목은 ‘연두부를 끓이는 법(煮軟泡法)’이다. “두부를 만들 때 단단하게 누르지 않으면 곧 연하게 된다. 이것을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는다. 흰 새우젓국과 물을 타서 그릇에서 끓이되,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빠져 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꼬치를 거꾸로 담가 끓여서 조금 익었을 때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잘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으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매우 좋다.” 홍만선은 이 요리법을 민간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재일록》 음력 10월 3일의 기록을 보면 연포탕 요리법이 반드시 《산림경제·치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설판은 연포회 약속을 하면서 조극선에게 닭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아마도 자신은 콩을 마련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극선은 연포회 당일 아침에 하인을 시켜 닭을 설판의 집으로 보냈다. 홍만선은 요사이 사람이 ‘오젓’이라 부르는 백하해(白蝦醢)의 국물로 연두부국을 만든다고 했지만, 조극선은 닭고기를 준비했던 것이다.
닭고기를 국의 베이스로 하는 요리법은 조극선의 일기로부터 무려 150여 년 뒤인 1766년에 쓰인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에 나온다. 이 책에서는 요리법의 이름을 ‘연두부국 만드는 법(造軟泡羹法)’이라고 적었다. 먼저 살찐 암탉으로 국물을 만든다. 여기에 쇠고기 큰 것 한 덩어리를 넣는데, 이렇게 하면 국물 맛이 더욱 좋다. 두부도 《산림경제·치선》과 달리 단단하게 눌러서 만든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니 이 책의 연포는 연두부라고 보기 어렵다. 조극선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균(許筠, 1569~1618)은 서울의 장의문 밖 사람이 말할 수 없이 연한 두부를 잘 만든다고 했다. 아마도 조선 중기까지 사람들은 연두부를 좋아했지만, 18세기에 와서 경두부로 그 취향이 변했던 모양이다.
유중림은 이 단단한 두부를 숯불 위에 올려놓은 솥뚜껑에 기름을 많고 붓고 지진다고 했다. 이렇게 지진 두부를 닭 국물에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다음, 생강·파·참버섯·표고·석이 등을 곱게 채를 썰어서 넣고 다시 끓인다. 또 그릇에 고기국물을 조금 담아 곱게 썬 무와 밀가루를 조금 넣고 골고루 갠다. 여기에 계란 여러 개를 깨뜨려 넣고 빠르게 저어서 국물에 넣는다. 여러 재료들이 골고루 섞이도록 5~6번 끓어오를 때까지 끓인 다음에 떠서 먹는다. 잘 삶아진 암탉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찧어 발긴다. 또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나누어서 기름에 지져 납작한 조각으로 부치고 칼로 실처럼 가늘게 채를 썰어둔다. 주발에 연포를 붓고 여기에 암탉고기 바른 것과 채 썬 계란을 올리고 초피가루와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너무나 화려한 두붓국이다.
19세기 초반에 정약용이 지은 시에서도 닭고기와 단단한 두부, 그리고 각종 버섯과 후추가 연포국의 재료로 쓰였다. 다만 승려가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젊은 선비가 닭고기를 썰어서 솥에 넣어서 끓였다고 했다. 그러나 조극선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찰의 승려들이 두부 만들기를 거부하여 연포회가 열리지 못할 뻔 한 일도 있었다.(1623년 음력 11월 14일자) 그러니 권력을 쥔 양반들이 막무가내로 연포회를 준비하라고 승려들을 겁박한 일은 18세기 이후에나 나타났던 일이다.
사실 조선시대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는 집 인근의 사찰 승려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선비들은 과거시험장에서 쓸 답안지의 종이를 직접 마련하여야 했고 그 종이를 제작하는 사찰의 승려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이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 역시 사찰의 암자가 적격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곁으로 불교를 억압하면서도 절묘하게 사찰을 활용한 셈이었다.
16세기만 해도 연포회는 담백한 음식인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을 논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그래서 고기가 아니라 새우젓이 국물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포회가 유행을 하면서 연포국에 닭고기가 들어갔다. 연포회를 빙자하여 업무를 방기한 채 산사나 능원에서 며칠씩 노는 관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같은 문하의 선비들이 연포회를 핑계로 자주 모이다 보니 세력화의 모임으로 변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연포회를 연다고 하면서 사적 결사 모임인 계를 조직하는 선비들도 있었다. 연포회를 통해서 세력을 모으려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이 닭고기는 물론이고 평소에 불법이었던 쇠고기까지 넣어서 연포국을 끓였다.
결국 영조는 1754년 음력 윤4월 7일, 신하들과 사찰의 연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지시까지 내린다. 그랬던 탓일까? 19세기 초반 이후의 문헌에서는 연포회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던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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