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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와 연포회

주영하

우리 음식들 중 가장 많이 거론된 두부


예안현(禮安縣) 오천촌(烏川村, 안동댐으로 수몰)에 살던 김령(金玲, 1577~1641)은 여러 형제들과 1603년 음력 9월 28일 저녁에 안동부(安東府)의 도목촌(道木村,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의 배한림(裵翰林)을 보러 갔다. 배한림은 김령 일행을 인근의 명암사(鳴巖寺)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포(泡)’를 만들어 먹고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기록은 김령의 일기인 《계암일록(溪巖日錄)》에 나온다. 김령이 ‘포’라고 적은 음식은 오늘날의 두부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우리나라 음식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두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자꾸 ‘포’라고 쓴다.”(《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아언지하(雅言指瑕)》)고 비판했다. 사실 한자 ‘豆腐’는 북송 사람 도곡(陶谷, 903~970)이 965년에 쓴 책으로 알려진 《청이록(清異録)》에 처음 나온다. 두부의 유래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한나라 유방(劉邦, 서기전247(추정)~서기전195)의 손자 유안(劉安, 서기전179~서기전122)의 발명설은 명나라 때 조작된 역사이다.

두부의 ‘부(腐)’라는 한자는 동물의 젖을 응고시킨 것을 가리킨다. 치즈의 일종인 ‘유부(乳腐)’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유부’에서 약간 썩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부’의 뜻은 부패와도 통했다. 그러나 ‘포’라는 한자는 액체가 응고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족들이 북방 유목민의 ‘유부’를 모방하여 젖 대신에 대두로 만들었기 때문에 ‘두부’라는 한자 명칭이 생겨났다. 원나라 때인 고려 말에 두부 요리법이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두부가 탄생한 비밀을 몰랐다. 더욱이 이 음식의 이름에 붙은 ‘부(腐)’라는 한자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의 어의였던 전순의(全循義)는 아예 두부를 ‘두포(豆泡)’라고 적었다. 조선시대 글자께나 아는 선비마저도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김유의 요리책 [수운잡방]의 두부 만드는 법


김령은 할아버지인 김유(金綏, 1491~1555)와 함께 《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한문으로 된 요리책을 남겼다. 할아버지 김유는 《수운잡방》의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을, 김령은 〈계암선조유묵(溪巖先祖遺墨)〉을 썼다. 이 책의 〈탁청공유묵〉에는 ‘취포(取泡)’라는 이름으로 두부 만드는 법을 적어 놓았다.


김유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과 [탁청공유묵溪巖先祖遺墨] 표지이다. 수운잡방은 음식을 마련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의미다. 본래 수운需雲은 연회를 베풀어 즐기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역周易에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수괘다. 군자는 이 상징을 취하여 마시고 먹고 잔치하고 즐거워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콩 1말을 맷돌에 타서 껍질을 없애고 또 녹두 1되를 따로 타서 껍질을 없앤다. (이것들을) 물에 담가 불린 다음 천천히 곱게 갈아 고운 베자루에 넣고 찌꺼기가 없도록 정갈하게 거른다. 다시 걸러 솥에 붓고 끓이다가 거품이 넘치면 깨끗한 냉수를 솥 가장자리에 조금씩 붓는다. 대체로 세 번 넘쳐 세 번 찬물을 부어주면 익는다. 콩이 익으면 두꺼운 섬거적을 물에 적셔 불 위에 덮어 불기운을 차단하고 소금물과 냉수를 섞어 심심하게 해서 천천히 부어 넣는다. 조급한 마음이 들면 두부가 단단해져서 좋지 않으므로 천천히 부어 넣어야 한다. 두부가 엉기면 베보자기에 싸고 그 위를 고르게 눌러준다.”


이 두부 만드는 법은 요사이와 비슷하지만, 콩과 함께 녹두를 넣는 것이 다르다. 녹두를 넣으면 응고가 쉽게 된다. 그래서 더욱 조급하게 만들지 말라고 한 듯하다.


[수운잡방]에 조리법에 따라 두부 만드는 과정 재현. 한국국학진흥원은 수운잡방에 기록된 122가지의 조립법
가운데 50종의 음식을 재현하여 화보집으로 간행하였다. (출처: 김유, 김채식 옮김, 《수운잡방》, 글항아리)


두부 요리 먹는 모임, 연포회


조선시대 문헌에 나오는 두부의 다른 말로는 ‘연포(軟泡)’가 있다. 한자 ‘軟’은 부드럽다는 뜻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연두부’인 셈이다. 김령도 그러했듯이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찰에 가서 두부를 먹었다. 심지어 두부 요리 먹는 모임을 ‘연포회(軟泡會)’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약용은 연포회가 주로 능원이나 사찰에서 개최되는데, 그곳에 두부를 잘 만드는 조포(造泡) 혹은 조포장(造泡匠)이란 직책의 요리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개국 때부터 불교를 탄압하면서도 각종 제향과 잔치에 쓰이는 많은 양의 두부를 조포사(造泡寺)라고 지정한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다. 김령의 일기를 보면 도산서원에도 조포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 두부는 대표적인 제사음식이었다. 그러니 능원·향교·서원에 조포장이 있었을 것이다. 종묘를 비롯하여 서울과 지방 관아의 제향에 쓰이는 두부는 주로 조포사로 지정된 인근의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다. 김령이 묵은 명암사도 안동부의 관아와 향교에 두부를 공급했던 조포사였을 가능성이 많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충청도 덕산의 조극선(趙克善, 1595~1658)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는 연포회 이야기가 수없이 나온다. 조극선이 15세였던 1609년 12월 3일부터 29세였던 1623년 12월 30일까지의 일기를 모은 이 책에 적힌 연포회 모습은 이러하다.

1615년 음력 10월 2일 갓 약관의 나이를 넘긴 조극선은 사돈 이씨와 ‘와사(瓦寺)’라는 사찰에서 다음날 저녁에 연포회를 갖자고 약속을 한다. 양반들이 약속만 한다고 사찰에서 연포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연포회의 경비를 마련하는 설판(設辦)을 정해서 주요 식재료를 마련하고, 그것을 해당 사찰에 미리 보내면서 연포회를 열겠다고 알려야 한다. 당연히 설판이 참석자들에게 통보도 했다.

연포회의 핵심 요리인 연포국의 요리법은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치선(治膳)》(1715년경)에 나온다. 제목은 ‘연두부를 끓이는 법(煮軟泡法)’이다. “두부를 만들 때 단단하게 누르지 않으면 곧 연하게 된다. 이것을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는다. 흰 새우젓국과 물을 타서 그릇에서 끓이되,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빠져 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꼬치를 거꾸로 담가 끓여서 조금 익었을 때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잘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으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매우 좋다.” 홍만선은 이 요리법을 민간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재일록》 음력 10월 3일의 기록을 보면 연포탕 요리법이 반드시 《산림경제·치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설판은 연포회 약속을 하면서 조극선에게 닭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아마도 자신은 콩을 마련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극선은 연포회 당일 아침에 하인을 시켜 닭을 설판의 집으로 보냈다. 홍만선은 요사이 사람이 ‘오젓’이라 부르는 백하해(白蝦醢)의 국물로 연두부국을 만든다고 했지만, 조극선은 닭고기를 준비했던 것이다.

닭고기를 국의 베이스로 하는 요리법은 조극선의 일기로부터 무려 150여 년 뒤인 1766년에 쓰인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에 나온다. 이 책에서는 요리법의 이름을 ‘연두부국 만드는 법(造軟泡羹法)’이라고 적었다. 먼저 살찐 암탉으로 국물을 만든다. 여기에 쇠고기 큰 것 한 덩어리를 넣는데, 이렇게 하면 국물 맛이 더욱 좋다. 두부도 《산림경제·치선》과 달리 단단하게 눌러서 만든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니 이 책의 연포는 연두부라고 보기 어렵다. 조극선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허균(許筠, 1569~1618)은 서울의 장의문 밖 사람이 말할 수 없이 연한 두부를 잘 만든다고 했다. 아마도 조선 중기까지 사람들은 연두부를 좋아했지만, 18세기에 와서 경두부로 그 취향이 변했던 모양이다.

유중림은 이 단단한 두부를 숯불 위에 올려놓은 솥뚜껑에 기름을 많고 붓고 지진다고 했다. 이렇게 지진 두부를 닭 국물에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다음, 생강·파·참버섯·표고·석이 등을 곱게 채를 썰어서 넣고 다시 끓인다. 또 그릇에 고기국물을 조금 담아 곱게 썬 무와 밀가루를 조금 넣고 골고루 갠다. 여기에 계란 여러 개를 깨뜨려 넣고 빠르게 저어서 국물에 넣는다. 여러 재료들이 골고루 섞이도록 5~6번 끓어오를 때까지 끓인 다음에 떠서 먹는다. 잘 삶아진 암탉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찧어 발긴다. 또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나누어서 기름에 지져 납작한 조각으로 부치고 칼로 실처럼 가늘게 채를 썰어둔다. 주발에 연포를 붓고 여기에 암탉고기 바른 것과 채 썬 계란을 올리고 초피가루와 후춧가루를 뿌려서 먹는다. 너무나 화려한 두붓국이다.

19세기 초반에 정약용이 지은 시에서도 닭고기와 단단한 두부, 그리고 각종 버섯과 후추가 연포국의 재료로 쓰였다. 다만 승려가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젊은 선비가 닭고기를 썰어서 솥에 넣어서 끓였다고 했다. 그러나 조극선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찰의 승려들이 두부 만들기를 거부하여 연포회가 열리지 못할 뻔 한 일도 있었다.(1623년 음력 11월 14일자) 그러니 권력을 쥔 양반들이 막무가내로 연포회를 준비하라고 승려들을 겁박한 일은 18세기 이후에나 나타났던 일이다.

사실 조선시대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는 집 인근의 사찰 승려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선비들은 과거시험장에서 쓸 답안지의 종이를 직접 마련하여야 했고 그 종이를 제작하는 사찰의 승려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이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과거시험 준비 역시 사찰의 암자가 적격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곁으로 불교를 억압하면서도 절묘하게 사찰을 활용한 셈이었다.

16세기만 해도 연포회는 담백한 음식인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을 논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그래서 고기가 아니라 새우젓이 국물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포회가 유행을 하면서 연포국에 닭고기가 들어갔다. 연포회를 빙자하여 업무를 방기한 채 산사나 능원에서 며칠씩 노는 관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같은 문하의 선비들이 연포회를 핑계로 자주 모이다 보니 세력화의 모임으로 변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연포회를 연다고 하면서 사적 결사 모임인 계를 조직하는 선비들도 있었다. 연포회를 통해서 세력을 모으려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이 닭고기는 물론이고 평소에 불법이었던 쇠고기까지 넣어서 연포국을 끓였다.

결국 영조는 1754년 음력 윤4월 7일, 신하들과 사찰의 연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지시까지 내린다. 그랬던 탓일까? 19세기 초반 이후의 문헌에서는 연포회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 《영조실록》
  • 김령(金玲), 《계암일록(溪巖日錄)
  • 김유, 김채식 옮김, 《수운잡방》, 글항아리, 2015,
  • 도곡(陶谷), 《청이록(清異録)》
  •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
  • 전순의(全循義), 《산가요록(山家要錄)》
  •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조극선(趙克善), 《인재일록(忍齋日錄)》
  • 주영하, 〈1609~1623년 忠淸道 德山縣 士大夫家의 歲時飮食〉, 《장서각》38집, 2017. 허균(許筠), 《도문대작(屠門大嚼)》
  • 홍만선(洪萬選), 《산림경제(山林經濟)·치선(治膳)》



집필자 소개

주영하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이면서 장서각 관장이다.
저서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음식인문학: 음식으로 본 한국의 역사와 문화》, 《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장수한 영조의 식생활》, 《밥상을 차리다: 한반도 음식 문화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 현대 식생활사》,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식사 방식으로 본 한국 음식문화사》 등이 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09-28 ~ 1619-10-04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흰죽부터 개장국까지, 끼니도 되고 보신도 하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12 ~ 1626-11-06

1625년 1월 12일, 신유. 권별의 안색은 완전히 희게 되었고, 소변이 붉던 것도 맑아졌다. 조금씩 밥맛을 알게 되어 녹두죽과 백원미(흰쌀 죽)를 4~5차례 마셨다. 밤에도 3~4차례 마셨다. 주부의 기생이 각종 진미를 연이어 보내주셨다. 야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은 지난밤과 다름이 없었다. 달보가 병문안을 왔다.
1625년 1월 14일, 계해. 증세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은 민물고기로, 혹은 새우젓갈로 반찬을 하여 연이어서 미음을 먹었는데, 다 뜨거운 물로 타서 넘겼다.
1625년 1월 26일, 을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꼈다. 청어 1마리를 구워서 먹었는데 해롭지 않았다. 밤에는 기장쌀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숟가락 넘겼다.
1625년 2월 4일, 계미.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식후에 비를 잠시 뿌렸다. 유량의 집은 방이 비좁고 창문이 없는 데다가 또한 날씨마저도 점차 따뜻해져 권별은 기운이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오늘 사랑으로 옮겨 들어갔더니 기운이 갑자기 깨어나고 밝아졌다. 이봉이 민물고기 여러 마리를 들여보냈다. 회를 쳐서 먹었는데, 또한 체하지 않았다.
1625년 2월 9일, 무자.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오후에 빛이 났다. 서비가 7일부터 앓아누웠는데, 증세가 수상하니 염려스러웠다. 안채 변소를 수리하였다. 주부 댁에서 민어 반 마리, 생강 6각을 보냈다.

“새해 첫날 노인이 된 친구들끼리 모이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1-01 ~ 1745-01-03

1745년 1월 1일, 을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차리고 사당에 나아가 차례를 지냈다. 첫날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둘째 날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며, 잠깐 바람이 불기는 했다. 계부를 모시고 추동에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새해 셋째 날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연이어 들렀다. 을축년은 권상일에게 67세가 되는 해이다. 이미 권상일도 환갑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도 두루 거친 그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도 느껴졌다.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였다.
1월 3일 밤에 여러 노인들과 함께 이순(而順)의 집에서 입춘(立春)의 밤을 보냈다. 후경(厚卿)도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 권상일은 오히려 젊은 축이었다. 계삼(季三) 아저씨는 73세, 문언(文彦)은 71세, 계부는 69세, 권상일은 67세, 이순은 63세였다. 그의 동네에 사는 노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노인이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김령, 계암일록
1603-09-08 ~ 1619-10-27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 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온 집안이 병으로 신음하여 개를 잡아 보양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4 ~

1912년 11월 14일, 김대락의 집안은 병마와 싸우느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사촌 제수씨는 이전부터 지병이 있어 상당 기간을 앓고 있었고, 며느리는 최근 감기가 들어 며칠째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들 형식이는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었고, 손자 창로는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바짝 여위였다. 그나마 창로는 누워서 앓는 병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한창 나이에 먹어야 제대로 자랄 터인데 음식을 마다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과 싸우고 있지만, 집에는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김대락은 크게 마음을 먹고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기로 하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을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을 나누어 먹던 녀석이었다. 짐승의 목숨을 버려 사람의 식욕을 돋우려 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는 평소 잘 짖지도 않고 사람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잡아먹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장자가 말한 닭과 산 나무의 교훈은 제법 그럴 듯한 가르침이었다. 개를 잡아 국을 끓이니, 오랜만에 식구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마다하던 창로도 오늘만큼은 제법 요기를 한 모양이었다.
한 끼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가혹한 현실이 돌아왔다. 상점 주인이 와서 외상값을 독촉하였다. 몇 번이나 기일을 미루어 놓았는데, 매번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동짓날이었는데, 팥죽 끓일 재료도 없어 그냥 지나쳤다. 명색이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절기도 그냥 지나치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지라고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에게 인사도 못하였으니, 팥죽 재료가 있다한들 입맛이나 다실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탄식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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