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한 시대가 왔다. 식민지 조선에 맛난 것, 좋은 것, 최첨단의 것들이 도착했으니 모든 길은 경성으로 통했다. 쭉 뻗은 도로 양쪽에는 붉은 벽돌로 반듯반듯 지어진 주택과 서양식 상업용 빌딩이 빽빽하게 늘어섰고 기모노와 한복과 양장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국제도시의 풍광을 자아냈다. 새로 들어선 양복점에는 쇼윈도에 값나가는 물건을 모셔놓고 행인들의 발길을 끌었고 손님들은 가격흥정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으며 “아이스 꾸리잇!” 아이스크림 장사꾼이 등장하자 젊은 부인과 아이들이 그쪽으로 와아 몰려갔다. 나팔통바지에 넥타이를 맨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태우고 짧은 통치마에 뾰족구두를 신은 젊은 아가씨들이 목에는 하늘거리는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에는 레이스 달린 모자,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을 끼고서 거리를 활보했다.
저 언니들이 그 유명한 모던걸이구나. 기선은 예쁜 언니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홀린 듯 보았다. 새로운 시대. 도약하는 경성의 얼굴들. 당당한 걸음걸이는 세계의 문명과 다가올 미래를 현재로 바짝 당겨올 듯 보였다. 그녀들이 기선 쪽으로 걸어오자 분 냄새가 향긋하게 퍼졌다. 신세계에서 불어오는 향기다. 기선은 문득 제 낡은 치마저고리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빨리 커서 기선도 모던걸의 대열에 끼고 싶었다. 입술에 새빨간 루즈를 칠하고 볼에 하얗게 코티 분을 바르고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고. 그뿐인가.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카페에서 씁쓸하고 달콤하다는 커피 한잔도 해야지. 쓰고 달콤한 맛은 어떤 것일까. 기선은 용선언니가 침을 튀겨가며 연모하는 커피 맛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쓴 것을 무슨 용도로 먹는담. 기선은 아이스빙수나 먹어봤으면 싶었다.
딸랑딸랑. 남대문에서 출발한 전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우마차와 인력거가 방향을 틀고 땅바닥에서 천방지축 뛰어 놀던 아이들이 한쪽 구석으로 뛰어갔다. 저기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가 치였다지. 섬뜩한 장면을 떠올리자 들떴던 마음이 폭삭 내려앉았다. 경성 한복판에서 혼자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기선은 명신상회의 간판을 속으로 또박또박 읽고 바로 앞에 서 있는 전신주에 몸을 바짝 기댔다. 본정골목은 길이 워낙 번화하고 상점의 생김새가 비슷비슷해서 한번 길을 잃으면 되돌아가기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상점을 구분해주는 것이 큼직하게 쓰인 간판이었는데 모두 일본어로 쓰여 있으니 어린 기선에게는 그림이나 마찬가지.
“반드시 여기서 기다려.”
용선 언니는 무섭게 내뱉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만 두고 어딜 가려고? 따지기도 전에 언니는 벌써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명신상회 앞 전신주. 꼼짝 않고 있어. 십 분이면 돼.
기선은 그 말을 믿고 한 시간 째 전신주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한테 떠밀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기선은 고작 일곱 살 밖에 안 먹었어도 보고 듣는 것이 많았다. 창경원에 벚꽃 야앵을 나갔다가 부모를 잃어버리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는 사내아이 이야기서부터 만국박람회 때 시골서 상경한 가족들이 전시장에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경성 역에서 각자 거지로 다시 상봉한 사연까지. 그중에서 최악은 미츠코시 점원으로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을 믿고 나섰다가 기생으로 팔린 계집아이에 관한 것이었다. 도시의 사건은 끝이 없었고 소문 또한 괴물처럼 덩치를 불렸는데 화려한 경성의 겉모습에 홀려서 사치에 빠진 모던걸이 주로 가십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의 진짜 주인공이 되려면 배워야 했으므로 용선 언니는 학당에 다녔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했던 언니는 학당에 다니면서 머리를 단발로 잘랐고 짧은 치마에 구두를 신었다. 교복이라고 했다. 바뀐 모습이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왠지 멋지다고 기선은 생각했다.
세련미. 그것은 모던걸의 핵심자질이자 모든 것이었다. 용선 언니야 말로 신문과 잡지 그리고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며 성토하는 바로 그 신여성, 모던걸이었는데 머리를 잘라서 모단 걸, 나쁜 것만 골라 배웠으니 못된 걸이었다.
모던 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_yvijnnbgemnqy)
진짜 못됐다. 기선은 이제 다리가 저려왔다. 십 분이 훨씬 지난 것은 분명했다. 동생을 일본인들의 거리에 세워놓고 진짜로 오지 않을 수 있는가. 기선은 이제 용선 언니의 못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요 앞에서 잠깐 동무만 만나고 온다고 그랬다. 그건 거짓말이었을까. 역시 연애인가. 어머니가 용선 언니의 외출에 기선을 몰래 붙여서 보낸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지난주에 두 사람이 크게 다투는 것을 기선은 자면서도 다 들었다.
“이게 다 뭐냐?”
어머니는 용선 언니의 면전에 종이뭉치를 날렸다. 기겁을 한 용선 언니가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편지를 빼앗았고 악에 바친 어머니는 보란 듯이 편지를 북북 찢었다.
“이러라고 내가 널 학당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자유연애니 뭐니. 공부는 뒷전이고 유행만 쫓다 신세 망치려니?”
“어머니는 암 것도 모르면서! 왜 남의 물건을 뒤지고 그러셔요?”
용선 언니가 여우 눈을 뜨고 대들었다.
“남? 언제부터 남이 되었든? 이젠 니꺼 내꺼 따지고 들 테냐?”
“내 인생이니까 간섭 마셔요. 진짜 집을 나가버리든지.”
그때 착. 소리가 났고 기선이 이불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용선 언니는 얻어맞은 뺨을 감싼 채 씩씩거렸고 어머니는 방을 나갔다. 기선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와 용선 언니는 정말 이상하게 변했다.
모든 게 아버지 홍재구의 가출 탓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이는 이년 전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기사를 읽으면 되었다. 그 안에 진실은 들어있지 않았어도 줄거리는 있었으므로.
경화다방은 예술가입네 자처하는 이들이 재즈 음악을 들으며 사상과 문학과 신세계를 논하는 장소였다. 경성의 부자들은 일본인 거리 혼마치로 발걸음을 옮아갔지만 경화다방은 파리만 날리는 조선의 가게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끼와 열정으로 가득한 조선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커피 한 잔만 시켜놓고 실컷 떠들 수 있는 경화다방에 모여들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살롱역할을 했던 경화다방은 돈은 되지 않았지만 이들 덕분에 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룸펜중의 한명에 지나지 않던 홍재구가 유명해진 건 이명선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명선은 증권으로 큰 부자가 된 이치룡의 둘째딸인데 야스다 은행 경성지점의 대리와 약혼을 한 처지였음에도 홍재구와 연애를 감행하였다. 자유연애의 시절이었다. 사랑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자 나머지 것들은 전근대적 가치로 하향 평가되며 꼬리를 내렸다. 홍재구는 연애하기 적당한 대상은 아니었다. 부인과 두 딸이 있었다. 잡지 [조선] 에 그의 데뷔작인 단편소설 “가출” 이 실린 이후로 후속 작은 나오지 못했고 남의 작품에 간간이 목탄삽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예술인의 명맥을 유지했다. 하필 그런 자에게 이명선이 반한 이유를 두고 호사가들은 여러 추측을 내어놓았지만 답은 정작 당사자들만이 아는 법이었고 이년 전 두 사람이 실종되면서 영영 미스터리가 되고 말았다.
집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섬뜩한 일이 있을까. 용선이 가출을 입 밖에 꺼낸 후 어머니는 과거로 곤두박질 쳐 졌다. 심장이 토끼처럼 빠르게 뛰다가도 문어처럼 흐느적거리기를 반복했다. 입술이 마르고 집중이 안됐다.
식민지 시대의 셀럽 - 모던 보이, 모던 걸 (출처 : 네이버 포스트_느낌이 있는 책)
어머니는 암 것도 모르면서! 용선의 그 한마디가 어머니의 느리게 뛰는 심장에 흠집을 냈다. 현해탄에서 자살한 연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던 때였다. 사랑. 그 염병할! 남편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면 어머니는 그렇게 내뱉고 끝냈을 것이었다. 죽음은 도처에 흔했다. 전차에 치여서 죽고 일본순사에게 맞아 죽고 배고파 죽고 쌈질하다 죽었다. 죽음은 어찌됐든 종결이다. 실종은 달랐다. 암 것도 모른다. 모른다는 건, 사람을 얕은 맹물에 헤엄치게 만든다. 물음표는 어째서 반복되는가.
딸애는 확실히 변했다. 연애편지. 신식 옷. 서양식 벨벳 모자. 값나가는 레이스 양산. 보라색 뾰족 구두. 낯선 물건들이 하나씩 딸애의 서랍장에 쌓이는 동안 어머니는 점점 딸애를 모르게 되었다. 마침내 등장한 사각형의 커다란 가죽가방. 또 하나의 물음표. 물건이 단서라면 저 애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식민지 경성을 뛰쳐나가 도쿄로 가고 싶은 걸까. 가족도 버리고 누구와. 어쩌려고.
“네 언니를 잘 살펴라. 혹여 내가 없는 사이 가죽가방이라도 들고 나서면 무조건 뜯어말려. 그래도 나가거든 끝까지 따라붙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집에 들어와야 해.”
어머니는 기선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러다 언니가 나만 두고 가버리면요?”
“네 언니가 아무리 모질어도 널 시내 한복판에 놔두고 떠나진 않을 게야.”
그날이 오늘이 될 줄은 기선도 몰랐다. 어머니가 조 사장 댁으로 일을 나가자마자 언니는 기다렸단 듯이 화장을 하고 나갈 채비를 차렸다. 설마 했는데 손에 가방을 들었다. 기선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언니를 뜯어말리는 대신 몰래 뒤를 밟았다. 기선에게 중요한 건 어머니와의 약속이 아니었다. 기선은 캐고 싶었다. 언니의 비밀.
“네가 스파이야 뭐야?”
들켰다. 본정거리에 들어서기도 전에 용선 언니가 느닷없이 기선을 덮친 것이다.
“그게 뭔데?”
“배신자다. 몰래 미행하고 정보를 빼돌리는 사람.”
용선 언니가 무서운 표정으로 겁을 줬다.
“어디 가는데? 나도 데려가.”
기선은 언니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때 옆에서 토마에 모자점의 문이 열리고 보라색 망사 모자를 쓴 여자가 나왔다. 여자가 용선 언니를 보고 고개를 까딱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용선 언니가 기선의 팔을 세게 움켜잡고 다그쳤다.
“어서 돌아가. 혼자 갈 수 있지?”
“아야야. 아프다. 집에 가자. 언니야.”
기선은 언니가 너무 낯설었다. 스파이는 뭐고 배신자는 뭐고 망사 모자는 또 뭔가. 앞서 가던 여인이 걸음을 잠깐 멈추고 길모퉁이에 섰다.
“너 때문에 다 망치겠어.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동무를 만나고 올 테니. 십 분이면 돼.”
언니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기선이 용선 언니의 옷자락을 채 잡기도 전에 언니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진짜로 갔다. 어머니 말은 틀렸다. 용선 언니는 망사 모자 여인을 따라갔고 기선은 길거리에 버려졌다.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우마차가 속도를 냈으며 전차 소리가 요란했다.
“저것 좀 봐라. 마네킹이 새 옷 입었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쇼윈도에 붙어 섰다. 그 옆으로 자전거가 위협적으로 스치고 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식모, 새하얀 양산을 어깨에 걸친 일본인 여자가 나막신을 끌며 종종 걸음을 쳤다. 조선말과 일본말과 영어가 공중에 섞여서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소란 속에서 기선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멀리 명동성당의 뾰족한 탑 같은 것이 보였는데 기선은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기선은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울면 언니가 영영 안 올까봐 참았다. 눈앞의 사물이 형체를 잃고 흐릿해지더니 사람들이 거대한 그림자로 보였다. 마침내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목덜미에 뚝 떨어지자 눈앞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아니다. 용선 언니가 어머니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어쨌어? 가방은? 모자는? 기선은 언니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어머니와 용선 언니가 이렇게 꼭 빼 닮은 줄은 몰랐다.
“오늘 정말 스펙터클하구나!”
용선 언니가 옷고름을 조이며 다가왔다.
“어떠니. 나 꽤 스파이 같지?”
“아까는 나더러 스파이랬잖아.”
“넌 씨스터.”
“그건 뭔데?”
“여자동생. 언니도 된다.”
용선 언니가 기선의 손을 잡아끌었다. 땀에 흠뻑 젖은 손이 뜨끈했다.
“같이 공부하던 동무들이 상해로 떠났어. 난 암 것도 아냐. 아버지가 갖고 있던 증권을 건네준 것 뿐야. 아버지한테 경성전기회사 증권이 있었어. 난 상해도 싫고 비밀결사도 싫다. 스펙터클도 싫다. 그냥 평범하게 애인도 사귀고.”
용선 언니는 저고리의 명치부위를 탁탁 쳤다.
“그래도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너무 미안해서. 어머니는 모르셔. 그것만 있음 우린 부잔데 어머니는 모르셔. 난 도둑년이야.”
언니는 창피하지도 않은지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난 못된 년이야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용선 언니를 힐끔거렸다.
“그럼 언니야, 우리 아이스빙수도 실컷 먹을 수 있어?”
기선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아이스빙수?”
용선 언니가 눈물을 훔치며 되물었다.
“그거 먹고 싶니?”
“그러엄!”
“까짓. 먹으면 되지.”
용선이 기선의 손을 꼭 잡고 종로로 방향을 틀었다.
“이상하다. 언니.”
“뭐가?”
“어머니 옷 입고 서양여자 구두 신었네.”
“이런 게 패션이다.”
“패션?”
“그래. 모던 패션.”
용선 언니가 하하 웃으며 치맛자락을 치켜 올리자 보라색 구두가 반짝거렸다. 종로에 들어서자 높이 치솟은 빌딩이 사라지고 낮고 소박한 건물들로 풍경이 바뀌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빙수 집은 비좁았다. 가게 안쪽에서 얼음 써는 소리가 썩썩 들려왔다. 이 많은 색깔과 맛 중에 대체 어떤 걸 골라야 하나. 갖가지 색소를 입은 색동빙수, 건포도가 고명으로 올라간 빙수, 흑설탕을 뿌린 빙수. 바나나 물을 먹을까 오렌지 물을 먹을까 아님 새빨간 딸기 빙수는 어때. 용선 언니와 기선은 빙수 가게에 앉아 코앞에 바짝 다가온 미래를 고르느라 고민에 빠졌다. 바깥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가로등에서 노란색 전구가 켜지고 상점의 간판이 깜빡깜빡 희미한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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