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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금성의 신년 조회와
만국래조도

정월초하루 북경의 자금성에서는 청나라황제의 신년을 축하하는 의례를 행하는데, 조회를 열고 연회를 베풉니다. 새해 첫날 열리는 첫 조회이기 때문에, 왕, 신하, 이웃나라 사신들이 모두 참석해 황제를 만납니다. 청나라에서는 이 광경을 “여러 나라가 와서 조회하는 그림”이란 뜻의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라는 그림으로 남겨 대국의 풍모와 황제의 위엄을 과시했습니다. <편집자주>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는 청조 궁정宮廷에서 정월 초하루 신년 하례, 동지 하례, 황제나 황태후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삼대절三大節을 기념하여 북경 자금성에서 세계 각국의 사신단이 모여 황제에게 경하하는 조회朝會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양, 장정언, 김정표, <만국래조도>, 1760년, 견본채색, 299×207cm, 북경고궁박물원


현존하는 만국래조도 중 정월 초하루 황제에게 신년을 하례하는 의식을 그린 것은 북경고궁박물원에 3점이 전한다. 이 작품들은 자금성 태화문 앞에서 약 40개국에 이르는 외국 사신들과 신강, 몽고, 티베트 등 소수민족의 부족장이 가져 온 진귀한 조공물을 갖추고 조회를 위해 대기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화면 속에 건륭제는 정월 초하루 새벽 개필의식을 마치고 양심전養心殿 동난각東暖閣 앞에 앉아 자금성 태화전에서 진행될 조회를 기다리고 있다.


<만국래조도> 동난각 앞 건륭제, 1760년


새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황제는 재계 후 조복을 입고 양심전 동난각에서 신년을 맞이하는 의례로 개필의식開筆儀式을 행하였다. 청대 명창의 정월 초하루 개필의식은 옹정연간부터 정례화되었다. 황제는 매년 12월 그믐에서 정월 초하루로 넘어가는 자시子時에 동난각 명창의 탁안 위에 ‘금구영고金甌永固’라는 글자를 주조한 주배酒杯 형태의 예기禮器에 술을 따르고 옥촉에 불을 밝혀 필관에 ‘만년청관萬年靑管’이라 새긴 붓을 이용하여 붉은 주필과 묵필로 길상어를 적어 한해의 태평과 복을 기원하였다. 금구영고 주배는 청의 강역이 영원할 것과 태평성세를 바라는 황제의 의식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황제가 한해를 두루 살핀다는 의미로 새해의 역서曆書인 시헌서時憲書를 통람하였다.


                  건륭 금구영고배                                                 가경원년 원단 개필


양심전 동난각 내에는 건륭제의 어필로 ‘명창明窓’이라 쓴 편액이 있었는데,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는 청정한 서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황제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 이상적 수행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건륭제가 1776년 지은 「어제명창시」의 주기에서 “맑은 창과 깨끗한 서안, 문방사우는 모두 지극히 정량하여 여기서 인생의 한 가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나, 이를 낙으로 삼은 이는 지극히 드물다.”라는 북송 시인 소순흠蘇舜欽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정사에 피로를 느낄 때 이곳에 앉아 서첩을 대하며 심신을 맑히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륭연간은 강희․옹정연간에 이어 청나라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고 경제․문화적 번영을 이룬 시기이다. 특히 건륭연간 대규모 원정遠征으로 중국 동북부, 몽골, 동투르키스탄을 포함한 천산산맥 양측 지역, 티베트 등으로 구성된 최대 영역이 형성되었다. 1747년(건륭 12)부터 1791년(건륭 56)까지 10차에 걸친 건륭제의 외정外征을 일컫는 소위 ‘십전무공十全武功’이 당시 시대 상황을 잘 말해준다. 결국 대규모 외정으로 인해 건륭연간 청의 지배 영역은 최대 판도가 되었으며, 청조는 주변국과의 안정적 국제 질서 유지와 중국 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통적인 조공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만국래조도>에는 청동사자가 좌우 대칭으로 서있는 태화전 광장 앞 어도 옆으로 시위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운집하였다. 세부적으로는 조선국, 베트남[安南國], 일본국, 미얀마[緬甸], 태국[暹羅], 라오스[南掌], 필리핀[呂宋], 오키나와[琉球], 포르투갈[大西洋], 네덜란드[荷蘭], 인도[小西洋], 프랑스[法蘭西], 영국[英吉利] 등 40여 국가 사신과 부족이 각 깃발 아래 공물을 받들고 서있다.

청에 파견된 사절단이 거쳐 오는 노정은 각국 마다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압록강 건너 봉황성을 거쳐 정기적 사행을 기준으로 매년 1회, 유구는 복건성을 거쳐 2년 1회, 섬라는 광동성을 거쳐 3년 1회, 안남은 광서성이나 산동성을 거쳐 2~3년에 1회, 소록은 복건성 하문을 거쳐 5년 1회, 남장은 운남성을 거쳐 5~10년에 1회, 면전은 운남성을 거쳐 10년에 1회 사행을 하였다. 순치연간부터 도광연간까지 청에 대한 각국의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조선 477회, 유구 103회, 섬라 44회, 안남 42회, 남장 15회, 면전 14회, 소록은 7회였다. 따라서 <만국래조도>와 같이 많은 국가의 사신들이 함께 모여 조회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그림은 자금성에서 외국 사신들과 번부의 수령이 가져 온 진귀한 공물을 갖추고 조회를 준비하는 장면을 한 화면에 연출하여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 청 황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 의하면, 청 궁정 조회朝會의 주요 절차는 먼저 예부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일제히 조회 준비에 착수하였다. 조회 당일에는 태화전 앞에 황제 의장을 진설하고 표안을 준비한 후 오문에 모여 있던 관원들이 전내로 들어온다. 이때 조선을 비롯한 외국 사신들은 서반을 따라 들어간다. 예부 당관이 건청문에 이르러 황제에게 태화전에 나올 것을 주청하였다. 이후 황제가 중화전에서 문무 관원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禮를 받은 후, 태화전 내의 어좌에 앉는다. 태화전 전첨에서 표문의 선독을 마치면, 왕공 백관과 외국사신이 어전에 나아가 삼궤구고례를 행하고 왕공 이하 외국사신이 다례茶禮를 마치면, 황제는 건청궁으로 환궁하고 왕공 이하는 차례로 물러나온다.

조회의 서열 반차를 보면 태화전 내에는 호위시위와 내대신이 황제를 보좌하였고, 태화전 처마 좌우에는 표문 선독이나 악부 관련 관원들이 배치되어 주로 행사 진행을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월대 위 단폐에는 왕공, 친왕, 군왕, 패륵, 군왕과 같은 종실 왕공이 위치하여 예를 행하였다. 특히 몽고의 경우는 청의 종실 왕공 아래 배치하고 다른 외번 보다 높은 서열에 위치하여 몽고에 대한 청의 회유 정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태화전 전정의 품급산品級山에는 팔기관료와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위치하였는데, 외국 사신은 서반 백관의 뒤에 위치하였다. 자금성 조회에서 조선국 사신은 외국 사신들 중 맨 앞에 위치하였다. 조선을 유교적 예를 갖춘 국가로 간주하였고, 상대적으로 빈번한 왕래를 하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보다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화전의 우측 동사자 옆으로 각국에서 온 조하 빈객 행렬 중에서 ‘조선국朝鮮國’이라 쓴 깃발 아래 오사모를 쓰고 녹색 단령을 입은 공복 차림의 사신과 군관복을 입은 인물이 공물을 들고 있다. 조선의 종이와 비단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진공하는 물품 중에는 살아있는 코끼리를 비롯하여 상아․영지․비단․법랑․자기․공예품 등 각국의 진귀한 물산이 포함되었다. 또한 각국 사신들의 복식 그리고 기질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풍속지적 요소도 잘 반영되었다. 그러나 <만국래조도>에서는 면전국 깃발과 사신이 조선국 앞에 위치하였다. 이는 면전국의 주요 조공물인 길들인 코끼리와 양탄자를 화면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실제와 달리 조회 때 황제의 의장 중 오문 앞에 세우던 보상寶象과 유사하게 꾸며 조회의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금성 조회에 참여한 조선의 사절단의 정관正官은 30명으로 삼사 외에 역관 23명이 모두 포함되었고, 여기에 비장裨將 4명이 자급資級에 따라 선정되었다. 이들은 황제가 내리는 상사賞賜로 은과 비단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만국래조도>에는 정사와 역관 한명 그리고 군관복을 착용한 비장 몇 명을 제외하고 조회에 참여한 조선국의 정관을 대부분 생략하였다. 이는 제한된 화면에 조공하는 모든 국가의 사절단을 그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만국래조도>에서처럼 각국 사신이 황제에게 공물을 직접 올리는 일은 청궁 조회 의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폐와 방물은 조회 이후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대통관大通官이 일행 중 당상관 이하 압물관押物官을 인도하여 청 내부의 내탕고에 수납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만국래조도>는 각국 사신들이 산지의 조공물을 직접 들고 조회에 참여하는 것처럼 묘사하여, 각국 조공의 정성과 정월 초하루 조회의 성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연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68년경에 궁정화원 서양徐揚이 제작한 <경사생춘시의도京師生春詩意圖>는 건륭제의 태평치세를 주제로 제작된 궁정회화로 새해를 맞아 북경에서 행해지는 각종 풍속을 그린 것이다. 북경의 각 경물 위에 쓴 건륭의 어제시는 「생춘이십수生春二十首」로 모두 “이른 봄은 어디서 오는가(何處生春早).”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총 20수 중 신년하례 행사와 관련된 제13수 원회元會는 정월 초하루 자금성에서 행하는 조회로 “이른 봄은 어디서 오는가, 봄은 정월 초하루 조회에서 온다네. 한해를 천자에 하례하기 위해 만국이 같은 풍속으로 조근하네(何處生春早, 春生元會中. 一年欽首祚, 萬國覲同風).”라고 하여 새해 아침에 각국 사신들이 태화전에서 황제에게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림 중 자금성 오문에서 외국 사신들이 정렬한 장면과 태화문을 지나 태화전 앞 전정에서 조회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림은 북경의 새해 풍속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의의가 있으며, 건륭연간 북경의 태평성세를 배경으로 한 황제의 생춘시生春詩를 그림으로 도해한 시의도詩意圖로, <만국래조도>의 제작배경과 같은 맥락으로 제작된 것이다.


서양, <경사생춘시의도> 부분, 1768년, 북경고궁박물원


청 건륭연간에 제작된 <만국래조도>는 건륭연간 외번이 확대되면서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 수집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국 사신, 즉 문관과 민인의 모습을 개별적으로 그려 도설을 통해 해당 지역의 역사와 풍습, 토산물 등을 자세히 기술하여 정보를 더욱 보강하였던 《직공도》와 같은 맥락으로 제공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만국래조도>는 세계 각국에서 자금성에 내조하여 행하는 조회 의식을 성대하게 연출하여 청의 대국적 이미지와 조공을 받는 대상인 황권의 위엄을 극대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청대 궁정의 정월 초하루 조회가 끝난 후 베푸는 연회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시기는 건륭연간이다. 순치와 강희․옹정연간에는 북경에 입관入關하기 전보다 정월 초하루 연회의 봉행 횟수가 상대적으로 줄었다. 61년에 걸친 강희연간에는 15회 진행되었고, 옹정연간에도 정월 초하루 연회가 자주 취소되었다. 그러나 건륭연간 이후 북경 입관 전 상황으로 복귀되어 황제의 출궁出宮, 신병身病, 국상國喪, 일식日蝕, 기곡祈穀 등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정월 초하루 연회가 진행되었다. 이때도 조선 사신은 타국 사신들의 서열보다 윗자리로, 연회에서는 타국 사신 일행에게는 한상만 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의 삼사에게는 각각 한상씩을 주고, 대통관 이하에게는 3인당 한상씩을 주어 우대하였다.




집필자 소개

정은주(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며 미술사학을 전공하여 조선시대 대외관계 기록화와 회화식 고지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조선지식인 중국을 거닐다"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청나라 새 황제에 대하여 묻다”

옹정제 (출처: 위키백과) 황정, 계묘연행록, 1723-10-10 ~

1723년 10월 10일, 황정은 요동에 있었다. 사행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신요동이란 곳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는데, 추운 날씨에 객사의 온돌이 따뜻하지 않아 민가를 찾아 유숙하였다.
그런데 민가의 주인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역관을 통해서 이번에 새로 등극한 황제가 새로운 정치를 시행하면서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이 그전 황제에 비하여 나은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사행단의 역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나라 황제의 정치 시행에 관한 것인데 어찌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묻는가?”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황제가 계신 북경에서 오신 길이시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역관이 대답하였다.
“먼저 황제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 새로 등극한 황제는 오직 은자(銀子)만 아끼고 좋아한다 합니다”
황정은 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비록 변방의 늙은이라고 하나, 새로운 황제에 대한 인상이 이러하니, 새로운 황제가 탐욕이 많고 어질지 않음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면서 태국 사신들을 보다”

1860년 자금성의 정문 – 오문(午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1-12-29 ~

1801년 12월 29일, 이기헌(李基憲)은 사신단의 서장관 신분으로 명나라 수도에 와 있었다. 한 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오늘, 조선의 사행단은 오문 밖 조방에서 황제의 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오늘 태묘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겠다고 하여서, 궁을 떠나는 황제를 전송하기 위해 명나라의 관료들과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는데, 황색 지붕을 얹은 작은 가마를 타고 있어서 실제 황제의 용안을 보지는 못하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황제의 의장물은 매우 간단하였다.
황제의 어가는 오랫동안 머물면서 신료들을 돌아보다가, 태국에서 온 사신들을 지나쳐 갔다. 그는 아래 반열에 자리한 채로 어가를 맞이하고 서 있었다. 이기헌은 태국 사신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입은 조복(朝服)을 보니 얼룩얼룩한 무늬의 비단에 소매가 없는 긴 도포를 입었고, 쓰고 있는 관은 반자쯤 되는 길이에 동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하여 그 형태가 마치 뿔과 같았다. 머리카락은 자르고 땋아 내리지 않았다. 조회를 마치고 태국 사신들에게 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사석에서는 의관이나 허리띠, 신발 모두 청나라의 제도를 따르지만, 조회를 하고 어가를 맞이할 때에는 본국의 의관을 따른다고 한다.

“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미상, 계산기정, 1804-01-24 ~
왕자정(王柘庭)ㆍ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으로 갔는데, 경암(絅菴)과 추양(秋陽)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 및 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입니까?” 했다.

“청나라의 조참례에 참여하다”

1901년 자금성의 정문 – 단문(端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9-25 ~

1662년 9월 25일, 정태화(鄭太和)는 아침 일찍부터 자금성으로 갔다. 오늘은 청나라 조정의 조참(朝參)례가 있는 날이었는데, 조선 사신도 여기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 일행은 자금성의 승천문을 경유하여 오문을 지나 단문 밖에 이르렀다. 단문 안으로 들어가 서반의 앞 행렬 끝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울리면서 황제가 등장하였다. 3번의 호령소리가 울리더니 황제가 용상에 앉았다. 청나라 관리들 중에서 새로 관직을 제수 받은 사람과 새로 상을 받게 된 사람들이 뜰의 동서로 나누어서 북쪽을 향해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나서 각각 자기의 반열로 돌아갔다.
홍로시 관원들이 청나라에 들어온 사신 일행을 이끌고 다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는데, 정태화의 일행도 이에 참석하였다. 례를 마치자 정사와 부사, 서장관 3명의 사람을 인도하여 황제가 있는 황극전의 계단 위로 올라가게 하여 서쪽 기둥 밖에 앉게 하였다.

“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황중윤, 서정일록, 1620-05-10 ~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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