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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 고양이 집사가 되기까지

‘애완(愛玩)’은 사람 중심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용어이다. 그러나 대표적 애완동물인 개의 경우 인간과 교감하기에 ‘짝이 되는 동무’라는 의미의 ‘반려(伴侶)’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이를 통해 동물을 사람과 동등한 위치로 대우하려는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최근에는 고양이도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하면서 개와 함께 반려동물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문학, 회화,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예술가들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대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단일하지 않다. 더욱이 고양이는 사람 위주로 적응하는 개와 달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의 행동 방식을 유지해 왔기에, 서로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가지 개념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 문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양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러한 기록 속에서 등장하는 고양이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왔을까?




관계 맺기 : 쥐의 사냥꾼


고양이는 애초 인가(人家)에 기르는 동물은 아니었다. 인간과 고양이가 공생한 것은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인간의 생활 방식이 수렵에서 정착 생활로 변모함과 관련된 것이라 한다. 즉, 집안에 저장한 곡식을 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음악과 풍요, 다산의 여신이자 여성의 보호자인 바스테트(Bastet)로 숭배되었으며, 고양이를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이집트인들의 이러한 인식 또한 고양이의 본능적 사냥 능력을 인간에게 유용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고양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시경(詩經)』이다. 여기에서 고양이는 호랑이와 함께 농사에 이로움을 주는 신(神)의 위치로 설정되어 있는데, 12월에 그들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고양이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제사의 대상이자 농사에 이로움을 주는 동물로 형상화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 문인에게 있어서 고양이라는 동물의 기본정보와 인간에게 인식되는 상징적 전형성을 제공하였다. 조선 전기 문인인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은 「축묘설(畜猫說)」이라는 글에서 고양이를 기르게 된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내 집은 본래 가난하여 곳간에 쌓여 있는 게 없었으니 살림살이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에 곡식을 모을 때면 쥐 떼가 갑자기 모여서 벽을 뚫고 문을 엿보았다. 대들보에서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침상에서 뛰어다니기도 하였으며 옷을 물어뜯어 여러 군데 구멍을 내고 곡식을 훔쳐서 곳간 이곳저곳에 구멍을 내었다. 피해가 막심하여도 제거할 방법이 없자 이웃집에서 작은 고양이를 빌려와 정성스레 길렀다.”


여기에 등장하는 쥐는 단순히 저장된 곡식만 훔쳐 먹을 뿐만 아니라 살림살이도 물어뜯고 구멍을 내는 등, 인간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는 동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쥐를 박멸하기 위해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에 고양이는 쥐의 상위포식자로서 인간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양이와의 이러한 관계 맺음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양상으로, ‘고양이를 집으로 들이다’라는 뜻인 납묘(納猫)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조선 전기 세종 말년에 저술된 이순지(李純之, ?~1465)의 『선택요략(選擇要略)』에 의하면 특별한 날을 정해 고양이를 들였다고 한다.




관심 갖기 : 고양이 바라보기


인간의 영역으로 편입된 고양이는 조선 문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모든 고양이가 환영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떤 문인들은 단순히 쥐를 제거하는 사냥꾼의 역할이 아닌 하나의 생물로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떠돌아다니는 고양이가 밖에서 들어왔는데, 본성이 도둑질을 잘하였다. 더구나 쥐가 적어서 잡아먹을 수 없게 되자 단속을 조금만 소홀히 하면 상에 차려 놓은 음식을 훔쳐 먹었다.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여 잡아 죽이려 하면 또 도망치기를 잘하였다. 얼마 후에 떠나 다른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 사람들이 본래부터 고양이를 좋아하여 먹을 것을 주어 더 배고프지 않게 하였다. 쥐도 많고 사냥을 잘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자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좋은 고양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일명 도둑고양이라 불리는 놈인데, 먹을 걸 충분히 주자 인간의 음식을 훔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이익(李瀷, 1681~1763)은 「투묘(偸猫)」라는 글로 남겼다. 또한 이수광(李睟光)은 「이묘설(二貓說)」에서 두 마리의 고양이가 먹을 것을 양보하는 장면을 기록하였고, 이육(李陸, 1438~1498)은 「묘상지설(貓相䑛說)」에서 어미 고양이가 죽은 새끼 고양이를 자신의 새끼처럼 키우는 고양이의 모습을 담기도 하였다.


조지운(趙之耘), 〈유하묘도(柳下猫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앞서 사냥본능에 주목한 글과 사뭇 다르다. 농경시대인 조선에서 고양이라는 존재는 필요로 인해 기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애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양이의 습성은 주로 사냥 능력에 제한하여 바라보았다. 반면 고양이라는 동물 자체에 주목한 시선 속의 고양이는 인자하고 사양할 줄도 아는 동물이다. 게다가 음식을 훔쳐먹는 행위는 습성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도 말하고 있다.




다가서기 : 한가로운 고양이


고양이는 하루 수면시간이 평균 18시간이라 한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게으른 동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게으름은 어떤 이에게는 한가로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15세기 문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고양이에 대한 시를 17편이나 남겼다. 그중 12편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졸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의 글은 그림에 부기한 제화시(題畵詩)이다.


“화려한 집의 높은 곳에 고양이 잠들었네,
운모(雲母)로 장식한 병풍 앞 붉은 비단 담요에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모란꽃 밑에서 보았지,
두 눈동자가 야광주처럼 반짝거렸네.”


〈꽃 아래 고양이〉(필자 제공)



서거정은 화강암의 일종인 운모(雲母)로 장식된 병풍 앞 붉은 담요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그림을 보고 예전에 모란꽃 아래에서 보았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반짝반짝 구슬처럼 빛나는 고양이의 눈이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고양이 눈동자는 빛의 정도에 따라 동공의 변화가 뚜렷하다. 아울러 고양이의 눈은 어두운 곳에서는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먼저 포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는 기록은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이익(李瀷, 1579~1624)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서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고양이의 눈은 선인들에게 경외감을 갖게 하는 주요 부위였다. 햇볕의 양에 따라 동공의 크기가 변화하는 고양이의 눈이 시간을 알려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고양이 눈은 변화하는 모양이 달과 유사하기에 음(陰)의 동물로 인식하여 어떤 이를 음해하는 주술적 도구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졸고 있는 고양이는 게으름을 넘어 인간에게 한가로움을 선사한다. 서거정은 고양이를 정서적 등가물로 여기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고양이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거나 감정을 이입하였다. 그는 23년간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40세 이후 소갈증(消渴症)으로 자주 귀거래를 부르짖었음에도, 끝내 관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였을까? 한가롭게 자는 고양이는 서거정에게 있어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함께하기 : 유대감과 동반자


인간은 동물과 유대를 맺으려는 욕구로 인해 때로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그들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그 예로 고양이를 오원(烏圓), 이노(狸奴), 불노(佛奴), 함선(銜蟬), 함접(啣蝶), 가리(家狸), 몽귀(蒙貴), 고이(高伊), 전서장(田鼠將) 등으로 부르기도 한 점을 들 수 있다. 별칭들을 살펴보면 인간이 고양이에게 느꼈던 감정과 인간의 고양이에 대한 이해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함선(銜蟬)이나 함접(啣蝶)은 고양이가 두 입술을 다물면 입 주위의 털과 수염이 꼭 매미나 나비를 물고 있는 것처럼 보여 생긴 애칭이다. 요즘 애묘인들 사이에서 고양이 입 모양을 일명 ‘뽕주댕이’라 부르는 것과 흡사하다.


〈고양이 입 모양〉(필자 제공)



조선 문인들 또한 고양이와 공감하려는 시도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앞서 말했던 서거정은 조선 문인 가운데 대표적인 애묘인이다. 바라보던 고양이에서 머물지 않고 고양이의 집사가 되었다. 입춘이 지나고 3일 된 날에 “침상 곁에선 고양이 자게 놔두고, 주렴 열고 가는 제비를 전송하네”와 같은 구절을 보면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장면은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늙은 스님은 고양이를 손에다 들고 앉아, 손자처럼 털을 빗기고 이마를 쓰다듬네”라 하였다. 산사의 스님과 고양이는 친근한 관계를 넘어 마치 손자와 같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궁궐에서도 집사가 된 이들이 있다. ‘금손이’라는 고양이는 숙종(肅宗)을 집사로 만들었고, 효종(孝宗)의 셋째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도 숙명적인 집사였다. 함께하던 고양이를 떠나보낸 성현(成俔, 1439~1504)은 죽은 고양이를 위한 제문(祭文)을 남겼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문인의 기록 가운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글이다.


“너의 모습을 사랑해서 특별한 날에 맞이하였다네. 내 집에서 먹이고 기른 지 4년이나 되었지. 비단으로 자리 만들어 깔아주니, 배불리 먹고 재롱도 피웠다네. (중략) 개가 사납게 짖어 대며 떼지어 오는데도 너는 피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따라다녔지. 그러다 생각지도 못하게 물려버렸으니 위태로운 때를 만난 거라 생각할 수밖에. 임강(臨江)의 사슴처럼 적인 줄 몰랐더냐? 쥐들은 서로 축하하며 떼지어 느릿느릿 다니니 이제 창고엔 온전한 곡식 없고 옷장엔 성한 옷이 없겠지. 그럴 때마다 널 생각하며 슬픔과 그리움만 더하겠구나.”


성현은 이 글 앞에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집에 기르는 고양이가 있었는데 눈처럼 희고 성질도 온순해 사랑하며 길렀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개떼에 물려 죽자, 종에게 명하여 산언덕에 묻어 주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최근에는 함께하던 고양이가 죽자 그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를 ‘펫로스(Pet loss) 증후군’이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상실에 대한 고통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 같다.

고양이와 인간의 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였다. 애초 고양이는 인간에게 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다 인간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일상적이고 친근한 존재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양이가 지닌 전형성을 인간의 생태에다 일치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양이에 대한 대부분의 고전 문헌 속 기록은 고양이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통한 교훈과 경계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고양이와 인연(因緣)을 맺은 이들의 기록에서, 고양이는 아끼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집필자 소개

김경
김경
고려대학교에서 18세기 한문산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 및 논문으로는 『조선문인, 기이함을 추구하다』, 「조선후기 類書에서의 ‘고양이’ 기록과 그 의미」 등이 있다. 잗다란 것들로 한국 한문학을 이해하려 노력 중이다.
“물고기잡이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01 ~

1597년 4월 1일, 낮에 후전리에 사는 별감 김린, 교생 허충, 김애일 등이 오희문을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동쪽 큰 언덕에 올라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 주인인 시중이 국수를 만들어 찾아왔다. 언덕 위 공터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국수를 먹는데, 큰 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깊은 못을 만들어 놓아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의 북쪽은 낭떠러지 절벽이 둘러쳐 있었는데, 이것이 한바퀴 빙 둘러서 반대편에 이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생긴 것이 마치 누각의 머리같이 생겼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낭떠러지라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물결도 잔잔하여 티 하나 없이 맑은데다가, 햇볕도 내려 비치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물도 맑았다. 무리지어 노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다가, 옆에 따라온 아이에게 그물을 쳐서 몰게 하였는데, 몰기가 무섭게 물고기들이 번득거리고 엎어지는 것이 볼만하였다. 간단히 그물질을 하였는데도 60여 마리나 잡아 올리고, 또 낚시대를 가지고 오게 하여 낚으니 이번에도 40여 마리가 잡혔다.

잡은 생선 중 큰 놈을 골라 뼈를 발라내어 말려 놓고, 남은 잔 생선으로 탕을 만들어 밥과 함께 먹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는 것이 몹시 유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아까 잡아 말려놓은 큰 생선이 반이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서편에 사는 강아지놈이 사람들이 부산한 틈을 타서 반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아지가 몹시도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뛰어난 경치와 흥겨운 물고기 잡이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동고동락한 개 이야기”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919년 8월 22일. 장석영은 어제 항소심에서 극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이곳 대구에서 성주까지는 하룻길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집으로 가기로 하고 하루를 묵었다. 밤에 창을 열고 지난 몇 개월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떤 짐승이 창 앞에 마주하여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쫓아도 일어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거기에 있길래 다시 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석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개는 일본인의 개인데 집을 떠나 얼마간 있다가, 댁의 아드님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짓고 음식을 마련하여 밥그릇을 받들어 감옥으로 가기 전에 이 문을 나서면 곧바로 아드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일찍이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감옥 문 앞에 이르러 아드님이 문밖에 서서 밥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 이 개도 그 곁을 지키면서 머물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밥그릇이 나와서 아드님이 돌아오면 개도 따라서 돌아왔다가 이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떠났습니다. 하루가 일상이 되어 출옥하는 날에도 여기 와서 지키며 몰아내도 가지 않는 것은, 필시 아드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장석영 역시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혹 사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일본인이 개를 팔 리도 없지만, 판다고 하여도 값을 많이 부를 것이라 만류하였다.

결국 장석영은 개를 사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아들에게 떠날 때 강아지를 쓰다듬고 따뜻하게 작별의 정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준 감정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강아지를 사서 함께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또한 강아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아들의 효성을 전해 듣게 된 장석영은 한 번 더 감동을 자아내는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골린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하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닭의 발톱에 얼굴을 다쳐 숙모의 상여도 따라가지 못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2-10-16 ~ 1922-10-19

1922년 10월 16일, 남붕은 숙모의 장례가 내일 있어서, 종일 조문객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남붕의 집에서 기르는 닭을 도둑고양이가 물어가는 일이 있었다. 남붕은 놀라 흩어진 남은 닭들을 잡아다가 닭 둥지 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닭을 살펴보려고 둥지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며 남붕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닭의 발톱이 남붕의 눈 아랫부분을 할퀸 것이다.

남붕은 상처가 바람을 맞으면 부스럼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약을 바르고 나가는 일을 삼갔다. 다음날 새벽에 영구를 마을 밖으로 전송하였는데 하필이면 바람이 거세 얼굴에 바람을 맞을까봐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숙모와 조카의 심정과 처지에 있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저물 때에, 윤초(允初) 아재의 모친 장사가 내일 있기 때문에 곡을 하러 가야 했는데, 상처 때문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다녀왔다.

10월 19일에는 숙모의 빈소에 가서 재우(再虞)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굴이 상처로 부어서 상여를 따라가지는 못 하였다.

“소를 가둔 죄로 파직당한 나무송(羅茂松)의 이야기”

김령, 계암일록, 1631-08-30 ~

1631년 8월 30일, 날씨는 종일 맑다가 흐리기를 반복하고, 늦가을 동풍이 몹시 쌀쌀하였다. 저녁 무렵 김령은 전에 예안 현감이었던 담양에 사는 나무송(羅茂松)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그가 파직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 봄 2월 무렵 김시익의 여자 종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소를 훔친 일이 있었다. 본래 흰 점을 가진 소였는데, 소를 훔친 자는 이후 일이 들킬까 염려하여 소의 흰 점을 검게 물들였다. 김시익의 또 다른 종 논복이란 놈도 소를 훔친 자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소가 새로 생긴 것을 관아에 고하고 입안(立案)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듣고 난 후 당시 예안 현감이었던 나무송은 곧 소를 데려다가 물로 씻어보도록 명령하였다. 과연 소 주인의 말대로 검은 부분이 물에 씻기자 곧 흰빛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를 옥에 가둔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형을 가하여 심문하였다. 또 장물인 소도 관아에 가두었다가 곧바로 소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현감의 처사에 매우 감사해하고 소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무송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사헌부 관원이 나무송이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죄로 삼은 것이다. 억울한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준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 분명한데,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나무송의 허물이라고 윽박지르니 나무송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로 나무송이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소 한 마리를 잠시 가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무송은 아직도 그때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듯하였다. 현명한 송사로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고도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니, 김령은 진심으로 나무송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소를 가둔 것을 문제 삼아 현감을 파직시킬 기발한 생각은 대체 누가 했는지, 그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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