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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멋쟁이

옷보다 중요한 헤어스타일


조선시대 사람들의 옷차림은 머리에서부터 출발한다. 남자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는지, 망건을 어떻게 둘렀는지에 따라 한양의 ‘멋쟁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자 역시 머리를 얼마나 높고 크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미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남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세수하고 상투를 트는 일이다. 늘 하는 일이고 누구나 트는 상투지만 멋진 상투를 만들기 위한 남성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더욱이 멋진 상투는 그냥 되지 않는다.

조선의 남자들은 10대 중후반에 관례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상투를 틀게 된다. 이때는 대체로 머리숱이 많다. 이럴 때는 먼저 빗살이 성근 얼레빗과 참빗을 이용해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밀어야 한다. 이후 적당한 머리숱이 만들어지면 기름을 발라 터럭 한 올이라도 빠져나오지 않도록 정수리로 머리카락을 모아 하나로 묶는다. 이때 상투의 높이는 5~8cm, 직경은 2.5cm 정도의 ‘알’만한 크기가 되도록 짜주는 것이 포인트다. 〈그림 1~3〉




그렇다면 반대로 머리숱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오히려 넓은 이마를 가진 경우에는 출세상이라 하여 선호하였으니 큰 문제가 없다. 또 상투가 작다 할지라도 알만한 크기의 상투관을 쓰면 되니 누구나 멋진 상투를 만들 수 있다.

상투를 튼 후에는 망건을 두른다. 망건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없도록 이마에 두르는 헤어밴드이다. 망건의 앞은 망사로 되어 있다. 망건의 위를 ‘당’, 아래를 ‘편자’라 하며, 여기에 달린 당줄을 잡아 당겨 관자에 걸고 다시 상투로 올려 망건을 고정시킨다. 이때 멋쟁이들은 망건을 어찌나 단단히 맸는지 망건을 풀고 나면 이마의 위아래가 0.3cm정도 파여 자국이 남을 뿐 아니라 상처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가 흥건할 정도였다. 망건의 원래 목적인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동여매는 용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망건이란 “머리털을 싸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바싹 죄어 매서 이마에 눌린 흔적이 있게 해서는 안 되고, 늘어지게 매서 귀밑에 흩어진 털이 있게 해서도 안 되며, 눈썹을 눌리게 매지도 말고 눈꼬리가 위로 치켜들게 매지도 말라”고 했다.

〈그림 4〉 강이오의 초상화를 보자. 망건을 얼마나 단단히 쳤는지 귀 위로 망건의 편자 부분이 눌려 옆머리의 위아래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다. 지금은 사모로 인해 가려졌지만 망사 속 이마는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평평해졌을 것이다. 지금의 보톡스 효과와 같지 않을까? 이뿐 아니다.

〈그림 5〉를 보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얼굴 전체가 위로 당겨져 있다. 최적의 리프팅 효과이고, 젊음은 덤이다.


〈그림 4〉 이재관, 〈강이오 초상〉 부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5〉 미상, 〈조씨 삼형제 초상〉 부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림 6〉 살쩍밀이(출처: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망건을 풀고 나면 피가 날 정도로 단단히 매다 보니 편두통을 불러오기 일쑤였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살쩍밀이’라는 도구가 있어 이 고통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대모(玳瑁) 또는 서각(犀角) 등의 뿔로 만들며 길이는 11cm, 너비는 1.3cm 정도이다〈그림 6〉. 원래 살쩍밀이는 관자놀이 주변의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망건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용도였다. 그러나 편두통이 왔을 때 살쩍밀이를 망건 속으로 밀어 넣어 망건을 슬쩍 들어 올리면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편두통에서 자유로워진다. 살쩍밀이 덕에 멋과 품위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 남자들의 망건 치기는 참을 수 있는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갓은 쓰지 않고 얹어야 제맛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후에는 탕건을 쓴다. 또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갓을 착용한다. 갓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머리 위에 쓰게 되는 모정 부분으로 대우 또는 총모자라 하고, 다른 하나는 챙에 해당하는 양태이다. 이 둘을 연결하면 드디어 갓이 완성된다. 전문화·분업화로 만들어진 고급의 갓은 아주 가는 말총으로 총모자를 만들고,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양태를 만든다. 그 무게가 15g을 초과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갓은 비를 맞거나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금방 망가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의 갓은 평생을 붙어 다니는 영원한 후광으로 유행에도 민감했다. 조선 후기에는 총모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졌으며, 양태는 어깨를 넘을 정도로 커졌다. 뿐만아니라 머리가 총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정이 좁아지다 보니 갓은 머리에 쓰기보다는 얹어 놓는 수준이 되었다〈그림 7〉.

갓을 쓰지 않고 얹어 놓다 보니 갓에 붙어 있는 끈이 없으면 갓이 뒤로 넘어가거나 옆으로 쓰러지기 일쑤다. 그러니 ‘갓을 앞으로 숙여 쓰고 챙 밑으로 남의 기색을 흘겨 살피지 말라고 하였으며, 갓을 뒤로 제쳐 쓰지도 말고, 끈을 움켜잡아 매지도 말고, 흩어 매지도 말고, 귀에 내려오게 매지도 말라’고 했다〈그림 8, 9〉. 여기에 멋 좀 낸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 밑에까지 길게 패영을 내려뜨린다.




패영은 갓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부속물로 멋과 재력을 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패영은 주로 수정, 마노, 유리, 상아, 대모, 대갓 등으로 장식하기에 그 값이 만만치 않다. 또한 입영에도 등위가 있어 당상관은 반드시 패영을 쓰고 당하관은 반드시 석영(石纓)을 쓰도록 전례에 실려 있으나 사치풍조가 심해지면서 등위가 없어져 무관의 당하관조차 호박 영자를 하고 다녔으므로 당하관은 마노나 수정으로 만든 영자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고 사대부 남성들의 사치품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패영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호박으로 만든 패영의 비용이 걸핏하면 수백 냥을 넘어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길게 늘어뜨린 패영은 걸을 때마다 가슴을 툭툭 친다.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일 뿐 아니라 빨리 걸을 수는 더더욱 없다. 오히려 점잖은 걸음걸이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때에는 간편하게 말아서 귀에 걸어두면 된다. 이제 한결 간편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할 수도 있고, 실용도 챙겼으니 이만한 멋내기가 또 있을까〈그림 10〉.


〈그림 10〉 신윤복, 〈청금상련〉부분(출처: 간송미술관)




예술품으로 승화된 우리의 백의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옷은 백의이다. 개항기 조선을 방문했던 많은 외국인들은 조선인들의 옷에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엄격히 말하자면 옷보다는 흰색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인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 1874~1927)는 조선인들이 입는 흰색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색상으로 여기에서 창의적 정서가 생성된다고 하였으며, 프랑스 화가 조세프 드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 1873~1944)도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다양한 흰옷의 물결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는 마치 음색의 향연 그 자체라고 하였다.

한국인이 주로 사용한 직물은 목면, 명주, 모시, 삼베 등이다. 이들의 처음 색은 흰색이 아닌 소색(素色)이다. 처음에 이들 옷감으로 옷을 지으면 거칠고 투박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옷감을 얼마나 자주 빨았느냐에 따라 소색은 더욱 밝은 흰색이 된다. 또 어떻게 손질했느냐에 따라 거칠고 투박한 옷감은 광택이 흐르는 비단이 된다. 즉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면 목면은 목공단이 되고, 모시는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투명해진다. 여기에 여인들의 바느질 솜씨를 더해 완성된 흰옷은 한국인의 체격을 당당하게 보이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탈리아 외교관인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1876~1948)는 한국인의 체형 조건을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비교하면서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녔다고 하였으며,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역시 한국의 남자들은 몸매가 날렵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표정은 침착하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잘생긴 종족이며 체격도 좋은 편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랬을까?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 겨우 5피트 4인치(156cm)이지만 그들의 체격을 커 보이게 한 것은 언제나 쓰고 다니는 검은 색의 높은 모자와 흰색 옷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흰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예술품’이라고 극찬하였다. 외국인들조차 한국인의 색으로 인정한 흰색은 결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로 한국인의 백의에는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이 담보되지 않을까?




집필자 소개

이민주
이민주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선 시대 책례의에 나타난 의식절차와 복식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대표 논저로는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조선왕실의 미용과 치장』, 『치마저고리의 욕망』,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성호사설』 「만물문」에 보이는 복식기록검토-시각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개항기 외국인의 기록과 삽화를 통해 본 우리의 복식문화」 등이 있다. 조선 시대 복식을 통해 전통 시대 사람들의 차림새와 멋내기를 이해하고 읽어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과 자리를 함께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흑립(출처: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14일 잠시 흐림. 용만관에서 떠나 소관관(所串館)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川)까지 50리를 가서 양책관(良策館)에서 잤다.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15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잠을 깨니 빗발이 부슬부슬하는데, 지다 남은 꽃과 여윈 꽃술이 암벽 사이에 윤기(潤氣)를 머금고 있어, 지난겨울의 풍경에 비하여 배나 아름다웠다. 잠시 천연정(天淵亭)에 올라가 풍악을 듣다가 떠났다.
차련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에는 관 앞에 반송(소나무)이 있어 울창하고도 우툴두툴하며 높다랗게 우뚝하여 일산과 같았으므로, 명나라 가는 사신들의 시의 소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동림성(東林城)을 지나다 보니 길에 아름드리 솔이 많은데 검푸른 빛이 하늘에 닿았으며 어둑하게 칙칙하고 그늘이 져, 지나가기가 마치 굴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장(別狀) 정관(鄭觀)은 연경에 들어갈 때의 만상(灣上 : 의주)의 군관(軍官)이었는데 먼저 진(鎭)에 도달하였다가 길에서 맞아 절하고 이어 성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대가 그다지 높지는 않은데 건물의 제작이 자못 든든하고 크며 편액을 ‘동림수대(東林帥臺)’라 하였다.
대체로 그 성가퀴는 산을 따라 빙 둘렀지만 그래도 요충(要衝)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성을 고쳐 쌓아 그 남쪽 부분을 넓히면 보장(保障)할 수 있는 요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나, 애석하게도 건의하여 힘을 들이려는 사람은 없다.

대의 북쪽에 별장(別將)의 일 보는 곳이 있는데 건물이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며, 또한 창고에 곡식이 만 곡(斛 한 섬)이 넘게 있는데, 선천부(宣川府)에서 관장한다. 성안의 민가는 열두어 호에 지나지 않으나 이익 내는 것이 박하기 때문에 하나도 모여드는 자가 없다. 앞으로 방수(防戍)하여 막아 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변란이 생겼을 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될까 걱정스럽다.
정관이 음식 한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이옥은 북한산 유람 중이었다. 절들을 돌아보니 승려〔緇髡〕 12(十二則)
승려의 옷은 베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푸른 면포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또는 검은 베로 만든 직철(直綴, 윗옷과 아래옷을 하나로 합쳐 꿰맨 장삼) 두루마기였는데, 소매는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단통모(短桶帽), 포량첨건(布梁簷巾), 폐양립(蔽陽笠, 패랭이) 등이 있고, 대나무 껍질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립(籉笠)이 있는데, 거기엔 입첨(笠簷)이 있어 사립(絲笠, 명주실로 싸개를 하여 만든 갓)과 비슷하며, 위는 항아리 같은데 그 꼭대기는 병(缾)의 입 모양처럼 되어 있다.
승려들의 띠는 대체로 명주실로 땋은 것이다. 혹 명주실로 땋은 것 중에 붉은 끈을 맨 자는, 옥이나 금으로 만들어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모자에 붙이기도 하였다. 또 아의(鴉衣)를 입고 털로 짠 벙거지를 쓰고, 벙거지 꼭대기에는 홍이(紅毦, ‘이’는 새의 날개에 여러 빛깔로 물들여 군복·말안장·투구·전립 등을 꾸미는 것, 속칭 상모)를 나부끼며,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승려의 염주는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 것이 많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율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사는 모양이 보자기 비슷하지만, 타원형이며 비늘을 이어놓듯 만드는데, 옷의 좌우에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수놓은 글자를 붙였다.
월광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자주색, 녹색, 푸른색의 끈 세 개를 늘어뜨렸다.
승려의 말에, “이 옷을 꿰매는 데에는 법도가 있고, 길이는 정해진 치수가 있고, 만들 때는 기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잘못되게 할 수도 없고 감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이 비호해 주는 바요,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가사에서 붉은 면포로 만든 가사를 한 번 보았다.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행장〔行李〕2칙(二則)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철쭉나무 지팡이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얼룩반점이 있는 대나무)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시를 지어 쓰는 무늬 있는 색종이 묶음)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비옷)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나섰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불을 일으키는 도구)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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