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신년이 되면 직장인들은 조직개편과 함께 인사이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이동은 개인의 업무 성과를 조직이 평가하고 그 성과에 따라 합당한 자리를 주는 일인 만큼 개인이나 조직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을 초월해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지위는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약간의 운이나 부러운 인맥, 혹은 음험한 뒷거래 등에 의해 직장 내 자리가 정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로 인해 성실한 직장인들은 울분에 젖기도 하고 한탄하기도 하고 고뇌하기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일터에서 한해를 넘긴다. 내년에는 좀 더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묵묵하게 맡은 일을 하는 사람이 태반이겠지만 일부는 인맥을 쌓아보려 동분서주할 것이고 아주 나쁜 경우 일부는 뒷거래할 구석을 찾기도 할 것이다.
직장생활의 이러한 난상난맥은 비단 현대의 일 뿐만 아니었던 듯하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도모하다 보면 일의 형태나 진행상 지위의 상하가 정해지기 마련인데 조선시대 직장생활의 난상난맥도 현대의 직장 생활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특히나 인사이동이나 승진 문제는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초미의 관심사였음이 분명하였던 것 같다.
지금은 거의 하지 않지만 일제 강점기 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자주 하던 놀이로 승경도(陞卿圖)놀이가 있었다. 승경도놀이는 종경도(從卿圖) · 종정도(從政圖) 놀이라고도 한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벼슬자리를 뜻하는 경(卿)이나 정승을 뜻하는 정(政)의 자리에 오른다는 이름을 가진 이 놀이는 윷놀이와 흡사하지만 윷놀이보다는 많이 복잡한 말판을 가진 놀이였다. 말판이 바로 조선시대의 복잡한 품계와 종별에 따른 벼슬이름을 적어 놓은 관직도표 같은 것이었다. 최고 영의정부터 최하 파직이 있고 그 사이에 유배, 좌천, 사사 등등 벼슬살이 하면서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위기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로 보자면 인생게임과 비슷한 셈이다.
승경도의 말판과 윤목(輪木)
놀이방법은 윤목(輪木)이라는 윷과 비슷한 것을 굴려 그에 따라 말판에 말을 놓으면서 진행되는데 윷놀이처럼 빨리 말판을 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고 마지막까지 말이 남아 있는 사람은 벌칙으로 눈 가에 먹칠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조선 태종 때 고관이었던 하륜이 승경도를 제작했다고 하였는데 조선초기 관직체계가 어느정도 정리되면서 이를 조직도로 그릴 수 있을 때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승경도놀이는 원래 관직을 목표로 하는 양반가의 자제들이 학업에 정진하는 계기로 삼기위해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점차 사회전반으로 퍼져 크게 유행되었다. 홍문관 관리들이 이 놀이를 하면서 밤을 샜다던가, 승경도 놀이를 너무 해서 공부는 오히려 뒷전에 되고 경쟁만 부추긴다던가, 승경도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 실제 학업의 성취보다 높게 평가 받는 폐단이 있다던가, 하는 비판이 많았던 것을 보면 승경도 놀이의 유행이 어느 정도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승경도 놀이의 대유행은 그 자체가 게임이다 보니 과열되는 양상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벼슬하는 사람들, 즉 조선시대 직장인들의 야망과 애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겸양과 자숙을 미덕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관료들과 관료예비군들 즉, 사대부들은 평소에는 고위직을 향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겠지만 승경도 놀이를 할 때만은 이런 야망을 속 시원히 드러내고 발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벼슬살이 하면서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불운들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을 승경도 놀이를 통해 대리 해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이나 직장생활의 팍팍함은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승경도 놀이는 주로 정월(음력 1월)에 많이 했는데 새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승경도 놀이로 자신의 한해 운은 점쳐보았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새해가 시작되면서 인사이동이 많았던 탓이 아닌가 한다.
<기산풍속도첩> 중 종경도 놀이
조선시대 인사행정은 도목정사라고 하는데 이조 및 병조에서 중앙과 외직의 관리의 공과를 논하여 그 성적에 따라 승진 또는 출척시킨 것을 말한다. 오늘날로 보면 연말 인사고과인 셈이다. 도목정사는 원칙적으로는 6월과 12월에 두 차례 이루어져 양도목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중 12월 인사행정이 6월 보다 대규모로 이루어져 대정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하급직인 잡직의 경우는 4번 도목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정기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문무반직은 대개 양도목이 일반적이었다.) 12월에 인사고과를 하면 1월에 인사이동이 대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니 승경도 놀이가 1월에 자주 행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스토리테마파크에서 볼 수 있는 일기류 들에서도 인사이동에 대한 기사는 대개 1월과 7월에 몰려 있다.
인사이동의 결과는 승정원에서 나오는 조보에 실려서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의 각 고을에 알려졌는데, 이는 비단 관직에 있는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큰 관심 거리였던 듯하다. 특히 지방관의 인사이동은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었으므로 고을의 유지인 양반들로서는 이를 잘 챙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중기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이 이르는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예안 출신 문인 김령은 광해군 시절 관직에 올랐다가 이후 중앙 정치의 혼란에 회의를 품고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은인하던 학자였는데, 그런 그도 중앙 정부의 도목정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부의 인사행정의 잘잘못과 발탁되거나 파직당한 인물들에 대한 소감을 자신의 일기 《계암일록》에 사견을 곁들여 써 놓기도 하였다.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일단 관직에 나간 이상 고위직으로의 승진은 조선시대 관료들 누구나의 꿈이었다. 오늘날처럼 직업과 직종이 세분화 되지 않는 조선시대에, 대개의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와중에 번듯한 조직이 있는 직장이라면 공무를 수행하는 관직이 유일했다. 조선시대 관직이 상하를 통 털어 3800개 정도 되었다하니 그리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이런 조직이 조선에 딱 하나 뿐이라면 생각은 달라진다. 이직도 불가능한 독점적이고 유일무이란 직장 조직이 바로 조선의 관직이었던 것이다. 그중 양반 신분으로서 갈 수 있는 자리는 또 좁혀지다 보니 관직을 가진 양반들은 조직 속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아남느냐가 절체절명의 미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탁도 빈번했고, 타인의 승진에 대한 비판도 대놓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숙종 말년인 1720년 1월 성균관에 10여 년 간 근무하다가 예조좌랑으로 인사이동한 권상일의 경우는 예조좌랑이 되자마자 바로 그날 역관과 의관들로부터 청탁을 받았다. 예조가 그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고위직에게 뇌물을 바치고 좋은 자리에 가거나 승진을 하는 경우도 빈번이 있었다. 김령의 《계암일록》에는 선조 말년의 영의정이었던 류영경이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벼슬자리를 준 일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그중 재미있는 것은 만호자리 하나를 두고 동명이인이 똑같이 류영경에 뇌물을 바쳤는데 자리 하나를 두고 둘 다 임명된 꼴이 되어 서로 뇌물의 양이 많으니 내 자리라며 다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뇌물로 벼슬자리를 산 일도 있지만 인맥으로 급작스레 승진한 경우도 왕왕 있었다. 조선후기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감영의 일을 《영영일기》로 남긴 조재호의 경우는 영조의 첫째아들 효장세자의 비인 현빈의 친오빠로 그 후광을 입고 초고속 승진하여 과거에 급제한지 8년 만에 이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눈에 띄게 급속한 승진을 하면 적을 만들거나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김령의 《계암일록》에는 임금과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쯤 되는 사람이 급작스레 승진을 하자 인척관계로 인한 인사라며 비판을 받은 경우도 기록되어 있다. 청탁이나 뇌물, 인맥 등으로 좋은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랫동안 염원하여도 원하는 자리를 못 얻는 경우도 있었다. 《청대일기》를 남긴 권상일의 경우는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매번 도목정사가 있을 때 마다 지방관 자리를 원했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중앙부처인 성균관과 예조에서 오랫동안 근무할 수밖에 없기도 하였다.
일기류에 기록된 조선시대 관리들의 삶을 보면 오늘날의 직장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묵묵하게 성실한 사람도, 약삭빠르고 비열한 사람도, 낙하산 금수저도 똑같이 발견되는 것이다. 대개의 역사영화나 사극 드라마에서 관복을 입고 다니며 임금과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만 논하는 것으로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관료들은, 실은 피와 살이 있는 개인으로서 인사이동과 승진에 일희일비하며 살얼음판 같은 조직생활을 해나갔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날의 직장인들 보다 더 절박하게 자리에 연연하고 인사이동에 목을 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수틀리면 이직을 할 다른 직장이 있는 오늘날의 직장인들이 조선시대 관료들에 비해 형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인사이동의 계절이 다가왔다. 인사고과를 받아들고 자리이동과 승진을 점쳐보는 직장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인맥이나 부당한 뒷거래가 없는 정직하고 정당한 평가로 납득할만한 인사이동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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