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열망 중 하나는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은거하며 안분자족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열망을 잘 드러낸 것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였다. 그러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기란 요즈음 퇴사를 결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실천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잠시나마 짬을 내어 유람을 다니는 것으로 이 열망을 일정 정도 해소하고자 하였다. 현대인들이 없는 연차를 짜내고 쪼개 잠시나마 밤도깨비 여행을 다녀오는 것처럼.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耔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그만두자. 세상에 몸을 의탁해 사는 것이 또한 얼마나 된다고, 어찌 마음에 맡겨, 가고 머묾을 임의대로 하지 않겠으며, 무엇 때문에 허둥대며 어디를 가려고 하겠는가. 부귀(富貴)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고 신선 세계는 기약할 수 없다. 좋은 시절을 생각해 두고 있다가 홀로 나서고 혹은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매고 북돋워줄 것이며, 동쪽 언덕에 올라 시를 읊조리고 맑은 물에 이르러 시를 지으리라. 그저 변화를 따라 죽음으로 돌아가리니, 천명(天命)을 즐김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 도연명, 『귀거래사』 -
조선의 명승지를 그린 「조선유람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람은 일시적이나마 ‘탈속’의 경지에 발을 담그는 일이었다. 이나마도 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산수벽을 채우기 위해 남들이 다녀온 유람의 기록인 유람기를 읽거나, 혹은 산수화를 감상하였다. 심지어는 좌천되어 경승지가 있는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고 하니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도를 실현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였으되 역시 반복되는 일상으로 여겨지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람은 단순히 일상으로부터의 탈피만 의미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저 유명한 문구로 “仁者樂山 智者樂水”가 있다. 즉, 유학자의 유람은 산수로부터 도를 구하는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이색을 비롯한 많은 대 유학자들은 산수에 담긴 도를 음미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유람의 경지라 강조하였다. 결국 자연의 질서를 통해 천지의 도리를 깨치는 호연지기가 곧 유람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 이황도 유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와 산 유람이 비슷하다 하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 유람이 독서와 비슷하네.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이 다할 때에는 자연히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 얻는 것은 모두 이에 있다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구름 피어남을 보고 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근원에 도달하여 비로소 시작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 그대들 절정 높은 곳으로 힘써 오르라.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도에 그만두니 심히 부끄럽네.
- 이황, 『퇴계선생문집 3』 -
그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은 유람을 떠나기 전에 준비할 물품을 준비하며 식량과 함께 성리학과 관련된 책을 반드시 챙겼다. 이들이 챙긴 책들은 성리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소학」, 「대학」, 「중용」 등 경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운곡기」, 「무이지」와 같은 유람의 테마에 맞는 책까지 다양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챙긴 책들도 꼼꼼히 기록에 남겼는데, 마치 요즈음 유명인이 휴가지에서 읽은 책 목록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특히 주자가 남악에 올라 읊은 「무이구곡」 등 여러 작품이 실린「무이지」는 많은 유람기의 표본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무이지」의 체제를 따라 유람기를 편성하였다. 이세택은 청량산의 자연경관과 옛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들에 대한 종합책자가 필요함을 느끼고 「무이지」의 범례를 따라 「청량기」를 편찬하기로 하였다. 그가 1771년에 편찬한 「청량기」에는 비단 청량산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청량산 근처에 있는 명소들도 함께 다루었을 뿐 아니라 청량산과 관련된 시문들도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퇴계 이황의 시 40수와 이황의 제자들이 청량산을 오르고 남긴 시들도 함께 실렸다. 지명에 관해서도 주세붕이 새로 고친 봉우리의 이름들에 따라 새로 고쳐 집필하였다. 1572년 김득연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는 주세붕 선생이 이름붙인 열 두 봉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늙은 승려가 구름과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이 축융봉(祝融峯), 저것은 금탑봉(金塔峯), 다음은 경일봉(擎日峯), 그 다음은 자란봉(紫鸞峯), 또 그 다음은 자소봉(紫霄峯), 탁필봉(卓筆峯), 연적봉(硯滴峯), 이것은 선학봉(仙鶴峯), 이것은 연화봉(蓮花峯), 그 뒤에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또 그 뒤에 내장인봉(內丈人峯), 외장인봉(外丈人峯)이 있어 모두 열두 봉우리입니다. 예전엔 명칭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 김득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매년 새로운 정보를 반영하여 출간되는 요즈음의 여행안내서의 편집과 유사한 형태의 작업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사대부들의 산행은 구도의 측면이 강조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람은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청량산으로 갔던 송환기는 가족, 친구, 아전과 장교, 관노비, 거기에 더해 피리를 부는 악공을 대동하여 떠들썩하게 청량산으로 떠났다. 또한 김득연도 청량산 노정 중 친구들과 묵은 절에서 술을 나눠 마시고 악공에게 피리도 불게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서로 신선이라 불러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늘이 어두워지려 하자 지장전(地藏殿)에 들어가니 승려들이 뒤따랐다. 등불을 켜고 자리를 마련해 친구들을 불러 앉고, 술병을 열어 잔을 가득 채워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니, 단란하여 밤새도록 크게 취하여 흥이 이는데, 문을 열고 홀로 하늘을 마주하여 서니 아득히 넓고 넓어 광한궁(廣寒宮)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이날 밤 권사민(權士敏)이 장난삼아 함께 온 여덟 사람을 팔선(八仙)이라 하고 채씨 한 명을 청동(靑童)이라 하고는, 나이순대로 반드시 아무개 신선이라 부르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니, 하나의 껄껄 웃을 만한 일이었다.(…)
- 김득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이세택이 1771년 편찬하고 이만철이 1876년 필사한 「청량지」(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소장)
사대부들 사이에서 흐르던 주요한 정서 중 하나는 ‘탈속’이었는데, 김득연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듯 도가적 존재인 신선까지 동원하며 현실을 잊은 존재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며 산중에서의 정취를 흐드러지게 즐기는 것이 유람의 한 즐거움이었다. 한편 요즈음 관광객들이 관광지에 낙서를 남기는 것처럼 이 시기의 유람객들도 의미가 깊은 곳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앞서 신선놀음을 하였던 김득연의 유람기를 마저 보도록 하자.
청량산 내 치원암지에 남겨져 있는, 이름을 쓴 명문
(…)한 신선이 세 명의 신선에게 석벽에 유록(遊錄)을 쓰라고 하며 말하기를, “옛날 소장공(蘇長公) 무리가 또한 낭떠러지의 돌에 이름을 새긴 적이 있는데, 한 번 지나친 곳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이 고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라고 한다.(…)
- 김득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동행의 부추김이 있어 석벽에 이름을 남겼음을 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낙서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이야기도 있듯, 이름난 곳에 자신도 다녀갔음을 기념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16세기의 유람객이나 21세기의 관광객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대부들은 유람 중에 경서를 챙긴 것처럼, 유람지에 자신이 존경하는 대 유학자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경우 되도록 답사하고자 하였다. 청량산에서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이 가까웠는데, 이에 청량산에 가는 길에 도산서원에 들러 평소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이황에게 묻고 토론하는 권호문과 같은 사대부들도 있었다. 이황이 타계한 후에도 도산서원에는 이황을 흠모하는 사대부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마치 요즈음의 팬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의 도산서원 방문기도 남아 있다. 이황도 유람에 대해 “산을 오르는 유람으로써 성현의 일을 본받을 수 있다”고 한 사람이었다. 영남의 사림들은 유람기를 참고하여 선현들이 머물렀던 곳을 답사하였다.
(…)용수현(龍壽峴)을 넘자 날이 저물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묵었다. 원장(院長)인 영월(寧越) 김택룡(金澤龍)이 이미 먼저 와 있었는데 술을 내놓고 옛일을 이야기했다. 잠시 뒤 계화도 그의 조카인 장경(長卿) 유원지(柳元之)를 데리고 좇아 왔다. 밤에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술잔을 몇 순배 돌리다 파하고 암서헌(巖棲軒)으로 들어갔다. 암서헌은 곧 퇴도(退陶) 선생께서 전심하여 학문을 닦던 방이다. 암서헌 동쪽 송단(松壇)은 절우사(節友社)요, 그 서쪽의 협실(夾室)은 완락재(玩樂齋)인데, 완락재 안에는 선생의 궤장(几杖)이 지금도 남아있다.(…) 작력천(柞櫟遷)을 통해 강의 상류를 거슬러 5리 쯤 올라가니 퇴계선생의 고택(古宅, 지은 지 오래된 집)에 이르렀다.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권씨(權氏)가 먼 친척의 돈독함으로 우리들을 대했다. 마침내 들어가 절하고는 선생의 평소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마치 선생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의 용모를 접하는 듯하였다. 집 뒤의 주산(主山)은 매우 높고 컸는데 가장 높은 곳이 선생을 안장한 묘자리이다.(…)
-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청량산은 특히 퇴계 이황과 동일시되다시피 하며 사대부들의 찬사를 받은 산이다. 청량산은 봉화, 안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소금강小金剛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암절벽과 봉우리들이 인상적이다. 산도 금강산이나 태백산처럼 크지는 않아 비교적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규모이다. 청량산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청량산 근처의 지방에 임관해 있던 관리들이나, 영남에 거주하던 사대부들이었다. 근교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여정도 길지 않기 때문인지 청량산에 누군가 간다고 하면 즉흥적으로 따라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량산 유람을 위해 길을 떠난 김중청은 도산서원에서 월천[조목, 1524년 ~ 1605년]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선생께서, “청량산에 가려고 하는데 자네 나를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시길래 날짜를 여쭈니 선생님께서, “8일 제사를 지내고 나서 9일에는 갈 수 있겠네.” 라고 하시면서, 원장 김기(金圻), 찰방 배용길(裴龍吉)도 모두 모시고 가기를 원했다. 김중청은 날씨가 혹여 좋지 않아 출발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온계(溫溪,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로 물러나와 있는 닷새 동안 아침마다 점을 쳤다. 8일 뒤 임인일에 심부름꾼을 통해 여쭈었다. 답장하시기를 내일 아침 예정대로 출발하는데 문원(聞遠, 금난수)도 함께 갈 계획이라고 하셨다.(…)
- 김중청,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이황도 청량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온혜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이황은 온혜에 살던 어린 시절을 “황이 어렸을 때 어른들과 형들을 따라 작은 책 바구니를 메고 이 산에 가서 책을 읽고 온 것이 몇 차례인지 알 수 없다.”라고 회상한다.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약 15km 정도의 거리로, 하루 정도를 투자하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황은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하며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드나들던 이 장소에 대한 애정과 친밀감을 드러내었다. 또한 주세붕이 풍기군에서 재임 중 청량산에 다녀와 쓴 유람기 「청량유산록」를 읽고 발문을 지을 때, 서명에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적는다. 이때에는 서울에서 재임 중이었던 이황의 이런 서명에는 청량산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이었는지, 2년 후에는 조정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고 11월, 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청량산으로 칩거해 버린다. 이 때 이황의 나이는 55세였다.
청량산과 이황의 인연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청량산을 대할 때 올곧은 선비를 대하듯 하게 하는 한 요소였다. 또한 청량산의 험준한 절벽과 봉우리가 마치 절개를 형상화한 듯하여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다. 청량산을 사랑하던 이황이 비록 물이 적고 험준하여 노인이 편안히 기거하기 어렵다고 평했고, 이황 스스로가 청량산에 기거하지 않았던 이유였지만 많은 사대부들은 이런 청량산에 탄복했다. 주세붕은 “늠름하고 공경할 만하며 작기는 하지만 범접하기 어렵다.”고 평하였으며, 이익은 “마치 병풍을 벌려 놓고 장막을 드리운 것 같아 그 모양에 압도되어 막막한 느낌이다.”라고 하여 청량산의 모습을 숭고함으로 인식하였다.
험한 청량산을 오르는 방법은 주로 도보였던 것 같다. 나귀나 남여藍輿와 같은 가마를 대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마로 가기에도 썩 쉬운 길은 아니었다. 청량산 등반의 힘겨움에서 사대부들은 선을 행함의 어려움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이 어려움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김영조는 산을 오르며 일행인 계화를 독려(조롱?)하는데, 계화는 힘든 나머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선을 행하는 과정이 어려운 만큼 산행이 너무나 힘들었음을 푸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서쪽 벼랑을 따라 조금씩 더위잡고 올라갔다. 가시나무가 즐비하고 산길이 더욱 험준해져 한발자국 옮기기도 어렵다. 갈수록 올라만 가므로 자주 쉬면서 자소봉(紫霄峰) 아래에 이르렀다. 봉우리 허리께에 석대(石臺)가 있었다. 동쪽으로 솟아있어 아래에서부터 겨우 바위틈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 장경은 아래에 있으면서 감히 올라오지 못하였고, 계화는 반쯤 오다가 다시 내려가려고 하였다. 김영조는 그들을 조롱하고 승려는 힘을 내라고 하였다. 계화는 한참 후에야 간신히 올라왔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거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선(善)하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우와 같다. 처음에는 올라가지 않으려 하다가도 끝내는 남이 끌어당겨 오르게 한다. 습속(관습과 풍속)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도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선(善)한 일을 하는 것이 산을 오르듯이 어렵다’라는 말은 들었지만,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산을 오르듯이 어렵다’라는 말은 듣지 못했네.” 라고 하였다.
-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
퇴계 이황의 고향마을인 온혜와 청량산
사대부들이 이러한 힘든 산행을 감행하면서 청량산에서 주로 찾아보았던 장소는 현 청량사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사와 치원암, 김생굴, 만월암, 상청량암, 안중암, 총명수 등지였다. 연대사는 명소라기보다는 숙소의 개념으로 사용된 사찰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찾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외에 다른 장소들은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공간들이어서 명소가 된 곳들이었다. 이 장소들은 주세붕의 유산기에 남아 있는 곳들이어서, 유람하는 사람들은 가이드북을 따라가듯 유산기에 적힌 곳을 방문하였다.
치원암과 총명수는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 있는 곳으로, 최치원 자체에 의의를 두기보다는 이황이 쓴 제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찾아간 곳들이었다. 최치원에 의의를 둔다고 할지라도 그의 총명함이 불교에 걸쳐져 있음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경우였다. 김생굴은 신라의 명필 김생이 필법을 익힌 곳이며, 만월암·상청량암·안중암은 조선 전기에 독서 장소로 쓰이던 곳이었기 때문에 제자나 후손들이 선현의 자취를 느끼며 독서를 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청량산의 명소들을 방문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다시금 유산기로 남겼고, 청량산 유람을 예정에 둔 사람들은 이 유산기들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명소들은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청량산 유산기는 50편 정도이다.
사대부들은 구도적 차원에서 산수를 찾고, 산수 속에서 독서하며 탈속을 즐겼다. 청량산은 그 준엄한 모습과 퇴계 이황과의 인연으로 영남지역 사대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유람지였다. 유람객들은 청량산 등반에 앞서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유산기를 읽고 청량산에 대한 성격 정의를 마쳤다. 그 성격이란 성리학적 시각 하에서 구도하기 좋은 엄준한 형태적 성격이자, 또한 ‘우리 선생님’이 계시며 공부하셨던 장소로서, 제자된 자가 곧 따라야 하는 선생님의 길이라는 상징적 성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험준한 청량산을 오르며 도덕에 대해 사유하고 선현의 자취를 보며 마치 ‘그 분’을 직접 대면하는 것처럼 마음 설레었다. 청량산은 곧 성인의 세계와 같은 공간이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