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과학수사와 법의학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실제로 조선시대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시 현장과 시신을 조사하여 사인과 범인을 밝혀내는 다양한 기법과 사례들이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과학수사와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지, 현직 과학수사연구원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조선시대 : 수사는 원님이, 최종 판결은 왕이?!
조선시대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현장 조사 책임자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었습니다. 수령이란 각 지방의 행정 책임자로, 통칭 ‘원님’이라 불렸던 직책이죠. 당시는 행정과 사법, 민사와 형사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범죄가 일어났을 때 수령이 수사, 범인 검거, 재판까지 모두 담당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시장, 구청장이 범죄 수사도 하고, 범인 잡히면 기소, 재판, 형 집행까지 다 하는 셈이죠. 해당 고을 수령이 수사에 참여할 상황이 안 되거나, 사건 관련자와 친인척 관계에 있는 경우는 제외하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이웃 고을 수령이 담당자가 되죠. 단, 기타 범죄와 달리 살인사건은 매우 엄중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보고서를 형조(오늘날의 법무부)에 제출하고, 최종 재가는 왕에게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수령 혼자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건이 접수되면 수령과 의원(의사), 법관(법무 담당 관리), 오작사령(검시를 전문으로 하는 관노비) 등이 함께 출동하여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하고, 현장과 시신을 조사하였습니다. 사진이나 녹음기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조사 과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지켜보고, 보고서에 서명했답니다.
대한민국 : 경찰과 국과수에서, 검찰과 법원으로!
현재는 일반 수사, 과학 수사, 기소, 판결 등이 모두 전문 영역으로 세분되어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살인 사건을 해결합니다. 사건이 접수되면 담당 경찰서의 형사가 출동하여 현장을 보존하고,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합니다. 그리고 담당 경찰청의 과학수사계 검시조사관과 국과수의 법의관(현재는 서울·경기 일부 지역만 해당)이 현장과 시신을 조사합니다. 경찰의 수사내용과 국과수의 부검감정서 등 여러 관련 자료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경찰이 검사에게 지휘보고를 올리면, 검사가 그 내용을 다시 종합하여 형사소송 등의 재판을 하고, 판사가 최종 판결을 하게 됩니다.
법의병리 감정 (조직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확인하여 판독 중이다)
조선시대 : 냉동 시설도, 부검도 없이?!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 그대로 놓고 검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여의치 않으면 시신을 옮겨놓고 조사하는 경우도 있었죠. 어쨌든 조선시대에는 냉동 시설이 없어 시신을 보존하기 어려웠으므로 최대한 빠른 조사가 중요했고, 이를 위해 검시 담당자들이 출발하고 도착한 시간까지 모두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유교 윤리 때문에 시신을 훼손할 수 없었고, 해부학도 발달하지 않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부검(해부 검사) 과정은 없었습니다. 대신 시신의 외관을 매우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조사해야 할 신체 부위만 해도 앞부분 50군데, 뒷부분 26군데 해서 총 76군데가 있었고요.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가면서 조사했는데, 얼마나 기록이 상세한지 그것만 보고도 당시의 복장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 기본은 변치 않는 것!
현재도 가능하면 외관 검시는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 그대로 놓은 채 실시합니다. 그게 어려울 경우엔 가까운 응급실이나 장례식장에 옮겨 놓고 합니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옷을 한 겹씩 벗기면서 세밀히 조사하고 기록하며 증거물을 수집합니다.
법의 영상 의학 감정 (부검 전 필요한 경우 X선 촬영을 시행하여 미리 확인하고 부검감정을 진행한다)
조선시대 : 복검은 기본! 삼검은 선택!
조선시대 살인사건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반드시 검험(현장 조사와 검시를 합쳐 이르는 말)을 2번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두 번째 검험을 복검이라고 하는데, 1차 검험을 담당한 수령의 인근 지역 수령이 담당자로 지정됩니다. 이때 공정성과 정확성을 위해 1차 검험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시행했죠. 복검이 끝나면 1, 2차 검안(검험 보고서)을 제출받은 형조에서 이를 비교하여 일치하면 사건을 종결, 사망 증명서를 발급하고 시신 매장을 허가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복검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면? 3차 복검, 즉 삼검에 들어갑니다. 최대 5차 복검까지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그렇게 해서도 확정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조사관의 자질과 수사 과정을 심문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 과정이 대단히 엄정하죠?
대한민국 : 살인사건에서 부검은 선택이 아닌 필수?
현재는 부검이 복검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관 검시만으로도 사망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경우엔 따로 부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살인 사건의 경우, 사인이 명백하다 해도 그것을 최종 확인하는 절차로서 부검을 시행하는 추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생각지 못한 또는 복합적인 사인이 밝혀질 수도 있죠. 다만 간혹 부검만으로 모든 사인을 다 밝혀낼 수 없어 수사로 보완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법의 부검 감정
조선시대 가장 널리 쓰인 과학수사 지침서인 <무원록>에 나온 몇 가지 내용을 현재의 과학적 기준에 의해 평가해 봅니다.
①시신의 얼굴색으로 목 졸려 죽음(타살), 목매달아 죽음(자살)을 판별하는 법
조선시대 :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보여도 시신의 얼굴색이 검붉다면 타살일 가능성이 크다. 남에게 목이 졸려 죽었을 경우 정맥만 막히므로 피가 머리 쪽으로 몰려 얼굴색이 검붉게 된다.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면 정맥과 동맥이 모두 막혀서 얼굴에 검붉은 울혈이 생기지 않는다. | 대한민국 : 현재에도 얼굴색 및 점상 출혈 등이 사인 확인에 보조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하지만 이 기준만으로 사인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목을 누가, 어떻게 졸랐든 목에 가해진 외력의 크기에 따라 동맥, 정맥, 기도 등이 막히는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
②독극물이 사인인지 검사하는 법
조선시대 : 은비녀를 죽은 자의 구강과 식도에 밀어 넣어 보아 청흑색으로 변하면 독살로 판단했다. 또 밥 한 숟가락을 죽은 자의 입이나 식도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 닭에게 먹여봐서 죽으면 독살로 보았다. 일종의 동물실험인 셈. 그런데 이렇게 폐사한 닭을 사람이 먹었다가 죽는 사례가 잇따르자 영조 때 이 실험을 금지하고, 부득이하게 실험한 경우 죽은 동물은 즉시 폐기하도록 했다. | 대한민국 : 은은 유황, 질산염, 비소 등과 반응하여 검게 변한다. 따라서 이런 계열의 독극물은 은비녀 실험으로 밝혀낼 수 있다. 현재의 독극물 검사는 혈액과 위 내용물 또는 장기를 이용해 독극물의 종류와 농도를 측정하여 인체에 해로운 물질인지, 그 농도가 치사량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한다. 지금도 닭 실험과 비슷하게 시신의 위 내용물을 실험용 쥐에게 먹여 보아 죽으면 독살로 보고 정밀 검사를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③물에서 발견된 시체가 익사인지 혹은 죽은 후 물에 던져졌는지 가려내는 법
조선시대 : 시신의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발견되지 않으면 익사가 아니라 물에 빠지기 전 이미 죽은 것으로 보았다. 물거품은 물속에서 숨을 쉬었다는 증거. 한편 남자가 익사하면 엎드린 자세가 되고, 여자는 드러눕는 모양이 된다고 한다. | 대한민국 : 입과 코에서 하얀 물거품이 발견되는 경우 익사로 판단할 수 있다. 물에 빠졌을 때 급하게 호흡을 하려다가 물을 들이마시게 되는데, 이때 기관지에 남아있던 공기와 점액이 물과 섞여 자잘한 흰 거품이 되기 때문. 다만 물속에서 오래도록 표류한 경우 물거품이 물에 씻겨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물거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익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익사한 경우 남녀의 자세가 다르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내용이다. 사람은 몸통에 비해 머리와 팔다리의 비중이 크므로, 대개 남녀 불문하고 머리와 팔다리가 아래로 늘어져 엎드린 자세로 떠오르게 된다. |
조선시대의 살인 사건 기록 중 법의학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대표적 사건과, 박지혜 연구원님께서 직접 참여했던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사례로 꼽은 사건입니다.
조선시대 : <자살 위장 살인사건>
숙종 3년, 한 여인이 목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검시해 보니 목을 맨 줄 근처에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 통상 목을 매 자살하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기 때문에 목에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해 매달린 정황이 의심되었다. 시신을 닦고 살펴보니 몸 여기저기 멍이 든 상처가 발견되었다. 여인의 신원을 밝혀내고 수사해 보니 남편이 사채를 갚지 못하는 바람에 대신 사채업자에게 끌려가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용의자인 사채업자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형문 끝에 자백했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대한민국 : <치매 노모 사망사건>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몸 여기저기 상흔이 있었지만 평소 거동이 불편해 자주 넘어지고 부딪쳤다는 함께 사는 아들의 증언이 있었고, 이웃들을 탐문해 본 결과, 아들이 어머니를 극진히 잘 모셨다는 증언이 많았다. 이에 경찰은 노령으로 인한 내인사(자연사)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검사의 부검지휘가 내려와 부검을 해보니, 겉에서는 보이지 않던 많은 상처와 골절, 목 부위 출혈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부검소견을 바탕으로 다시 조사한 결과 노모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아들의 자백을 받아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검시관들의 표준 지침 <무원록(無寃綠)>은 원나라 학자 왕여가 편찬했습니다. <무원록>은 조선 초기에 수입되었지만, 독해의 어려움 때문에 활용이 미미했는데, 15세기 세종대왕이 우리 실정에 맞게 다듬고 주석을 달게 해서 새롭게 <신주(新註)무원록>으로 발간한 뒤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영조가 이를 보완하여 <증수(增修)무원록>을 펴냈으며, 정조는 그 한글판인 <증수무원록언해>를 냈습니다. 원제인 ‘무원록’이란 ‘억울함이 없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법의학의 목적은 범죄 사실을 밝힘으로써 죽어서 말 못 하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있음을 천명한 것이죠.
대한민국
법의학과 과학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심은 크게 높아졌으나, 관련 인력과 처우는 아직 그에 따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국과수 내 법의관 수도 상당히 부족하다 보니 많은 감정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수사 연구원들은 자신의 업무가 범죄 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보람과 열정을 가지고 오늘도 죽은 이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답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해 온 동서고금의 모든 분께 격려의 박수를!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