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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삽화로 보는 콘퍼런스
‘상상력의 닫힘과 열림’ 그 날의 기록

삽화 - 송동근


한국형 판타지에 관한 창작자분들의 많은 이야기와 청중들의 흥미진진하고 열띠었던 분위기를 모두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2018년 10월 6일의 전통문화 창작 콘퍼런스의 발표 및 토론 내용을 삽화와 함께 소개합니다.

세션1 – 한국형 판타지를 말하다



한국형 판타지를 찾아서 _ 발표 : 진산(우지연) 작가


작가라는 종족의 주무기는 글쓰기입니다. 말하기와는 아주 다른 분야이죠. 많은 분들은 소리내서 말하는 것이 쉽고, 글쓰는 게 정말 어렵다고들 하는데 저희 작가들은 정 반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콘퍼런스에서 제가 발표할 내용은 ‘한국형 판타지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저 이후에 발표할 작가님들의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우선 ‘한국형 판타지’에 앞서서 그냥 “판타지란 무엇인가?”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현대 판타지의 시초가 된 톨킨의 말을 빌려다 사용하자면, “판타지는 현실의 왜곡이다”라고 합니다. 과거의 판타지들은 현실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가 전하는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곧 진실이라 믿었고, 그 믿음에 의한 진실은 종교, 신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톨킨 이후로 우리 현대인들이 즐기는 판타지라는 장르는 현실을 드러내놓고 왜곡하며, 상상력으로 꾸며낸 거짓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톨킨이 가져온 이 변화는 오늘날까지 판타지라는 장르의 특성을 규정하는 규범이 됐습니다.

하지만 톨킨은 영국인입니다. 그의 대표작 [반지의 제왕]을 집필한 시기는 1950년대, 2차대전 직후인데, 따라서 이 소설은 당대 영국 농민들이 겪은 현실, 전후의 영국을 살았던 그들의 눈이 바라본 시대상을 은유하는 소설입니다. 이것은 판타지의 시초가 되었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국형 판타지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고 볼 수 있겠죠. 이와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사례(판타지)들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더 위쳐]와 같은 폴란드의 판타지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사회에서는 왕이라는 존재가 참 부질없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톨킨의 영국형 판타지와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반면 일본의 유전자에 기록된 사회상을 판타지를 통해 반추할 수 있습니다.

[늑대와 향신료]는 라이트노벨 초기 작품으로 일본의 사례입니다. 이것 또한 중세 봉건 시대를 다룹니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전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무려 상인입니다. 따라서 판타지라는 장르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전투씬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소녀와 함께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행상을 다니는데, 풍작을 기도하는 등의 행위 등을 통해 일본형 판타지의 상징적인 단면을 잘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왕좌의 게임]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지만 미국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간의 관계에서 묘하게 미국식 현대 재벌드라마의 성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형 판타지의 태동을 되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1990년대 중반 피시통신 생태계를 기반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한국형 판타지로는 [드래곤라자]와 [퇴마록]이 있는데, 두 작품은 배경요소 면에서부터 상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드래곤라자]는 외국을 배경으로 하며, [퇴마록]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한국형 판타지를 찾는 독자들은 무려 이때부터 한국형 판타지를 규정하는 기준에 대해 고민과 논쟁을 끊임없이 해나갔습니다. 한국인이 쓰면 그것이 곧 한국형 판타지라는 인식(드래곤라자)과 한국적 소재를 적극 활용해야 한국형 판타지가 된다는 의견(퇴마록)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입니다. 이런 논쟁 속에서 [드래곤라자]의 이영도 작가는 “내가 서양의 요소를 차용한들 한국 사회에서 자라, 한국인의 정서를 가진 한국인 작가(나)가 쓴 소설은 한국형 판타지라는 의사를 비춘 바 있습니다. 실제로 작가가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에서는 후자의 입장들이 원하는 진짜 한국형 판타지적인 노선을 걷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영도 작가가 드러낸 입장과 같이 한국인 작가가 쓴(한국적 정서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작품을 곧 한국형 판타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 자리에서 ‘k-판타지’라고 지칭하고자 합니다.

이 ‘k-판타지’의 전망은 여러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 [리니지]의 성공사례나 웹툰 원작의 [신과 함께] 드라마 p별에서 온 그대] [시그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소 오래된 사례이기는 하나 [신한국황대장] [이웃집히어로] 같은 한국형 히어로물 판타지에서는 슈퍼아메리카에서 볼 수 없는 한국형의 소위 ‘짠내나는’ 히어로의 면을 볼 수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기대할 수 있는 히어로의 그릇, 면모 등은 분명 슈퍼아메리카와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볼 때 결국 한국형 판타지, 즉 ‘k-판타지’가 가야 할 길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보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서 그 비전이 갈린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k-판타지’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왜곡을 통해 우리가 대중과 만나는 법, 대중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수월하게 소통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한국적 현실을 잘 왜곡시키는 과정에서 비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길로 향하는 정답이 결코 한 가지는 아닐 것입니다.


한국 괴물 이야기의 종류와 특징 _ 발표 : 곽재식 작가


[세종실록] 1437년 11월 22일 기록을 펼쳐보면, ‘만인혈석’이란 것이 나옵니다. 만인혈석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우선 만인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요. 만인사는 저 멀리 북방의 황량한 곳에 산다고 전해지는 커다란 뱀입니다. 그 큰 뱀은 무려 사람도 잡아먹는데, 사람을 한명 잡아먹을 때마다 뱀의 몸속에 돌 같은 응축된 덩어리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 명의 사람을 잡아먹은 후에는 만 명의 응축된 덩어리가 하나로 뭉쳐 단단해지면서 만인혈석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만인사가 사는 곳엔 여의조라는 사납고 큰 새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여의조는 만인사를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인데요. 여의조가 만인혈석을 품게 된 만인사를 잡아먹고 나면, 단단해서 먹을 수 없는 만인혈석만이 둥지에 남게 된다고 합니다. 북방을 지나다니는 이들이 우연히 이 여의조의 둥지를 발견하게 되면 그 주변에서 만인혈석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 만인혈석은 세상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듣고 보니 흡사 약장수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게임 퀘스트에 대한 스토리 설명 같은 느낌이죠? 하지만 이 기록은 [세종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날 세종을 찾아온 여진족 하나가 세종에게 만인혈석을 바치겠다고 말하는데, 세종은 당시 함경도 책임자인 김종서에게 그 진위 여부를 묻는데요. ‘그런 말이 있긴 있다’라는 답을 들었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광법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광법사에 대한 설명이 적힌 사적비명에 ‘녹족부인’이라는 괴물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체는 사슴이고 상체는 사람인 괴물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서양에서 찾으면 ‘판’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보통 판은 남자로 묘사됩니다. 일부에서는 이 녹족부인을 녹족선이라고 해서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묘사하기도 하는데, 거의 대부분은 부인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1930~50년대 초까지 전래동화집에 보면 이 녹족부인 이야기가 수록된 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이야기죠. 광법사가 북한에 있는 절이기 때문입니다. 북쪽 사회에서 딱히 적극적으로 사용할 만한 이야기 소재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6세기 조선중기에는 [어우야담]이라는 이야기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장구담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숙주가 청년이던 시절에 친구들과 골목길을 다니는데(지금의 북촌 어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골목길 하나를 완전히 막고 있는 큰 입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일행 모두는 혼비백산했는데, 신숙주는 도망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보게 됩니다. (나중에 큰일을 할 사람이었음을 암시하는 내용 같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작은 청의도사를 만납니다. 청의도사는 신숙주의 인생을 살펴주겠다 약속을 하고, 그 후 그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다는 내용입니다.

[송자대전]이라는 조선후기의 책도 있습니다. 조선후기 사회를 만든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송시열과 제자들이 문답을 나눈 문답편에 의병장 김덕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덕령의 소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고, 맨몸으로 어딘가에 숨어들었다가 무기를 들고 나타나며, 하늘을 날 수 있다고도 묘사됩니다. 거의 조선시대 판 로보캅과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세종 때의 장영실을 떠올립니다. 장영실이 말년에 세종의 가마로 문제를 일으키고 후에 행적이 묘연한 걸로 기록됩니다.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됐기에 상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장영실이 그 사건으로 명예 등에 회의를 느끼고 산속에 은거하며 과학 연구를 계속하고, 제자를 육성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장영실의 연구가 쭉 이어지다보면 임진왜란 즈음 김덕령 장군 같은 비밀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 말고도 참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 말에는 [석가여래십지수행기]라는 불교 계열의 이야기 중 황금소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훗날 이 황금소 이야기는 무척이나 인기를 끌어 하나의 소설로 완성되어 회자됩니다. [금우태자전] [금송아지전]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조선초기 [용재총화]에는 빼빼마르고 검게 썩은 하체만 있는 귀신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당대에 제법 유행했는지 실록에서 성종이 신하에게 그런 귀신을 본 적 있냐고 물어보는 기록 또한 남아 있습니다.

[광제비급]이라는 의술에 관한 책에는 오늘날 결핵과 거의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노체’라는 병의 원인에 대해, 사람 몸에 들어가 ‘노체’를 감염시키고, 종래에는 목숨을 빼앗아 귀신이 되는 ‘노체충’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의학서적인데 말이죠.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꾸준히 모아서 제가 운영 중인 [괴물백과사전] 블로그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괴물인 구미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구미호는 의외로 기록된 바가 별로 없습니다. 구미호는 20세기 이후로 갑자기 이야기가 많이 되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만 해도 그 기록은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더 많은 편입니다.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는 무려 [영조실록]에 기록이 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심성이 곱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한국형 도깨비와 다르게, 사악한 주술과 저주를 부린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례들을 전해드렸는데요. 제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것이 특별히 ‘옳은 전통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조선왕조실록]만 보아도 괴물이야기가 참 다양해서 ‘사람과 비슷한 것, 짐승과 비슷한 것, 그 외 사례’를 통계내어 보면 그 숫자는 대동소이합니다. 괴물의 특징은 매우 다양합니다. 한국의 괴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지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 전해지는 한국형 괴물의 사례들은 현대의 대중문화를 거치며, 살아남고 취사선택된 이미지를 토대로 만들어낸 것들이 많은데, 우리 역사 자체가 실로 방대하듯 괴물의 이미지 역시 하나로 획일화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해볼까요? [삼국사기]에는 백제 멸망 직전 돌 사슴을 닮은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긴 부조가 무령왕릉 입구에서 출토되었어요. [견상여야록]이라고 합니다. 이는 백제와 교류한바 있는 중국 남부에서 무덤을 수호하는 돌짐승으로 알려진 것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그 돌짐승이 526년에 묻혀서 1445년 후 1971년에 발굴된 것입니다. 기록 속에서만 보던 그것이 실제 왕릉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모두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형 판타지 요소의 특징과 한국형 판타지

패널 : 양창진(한국학중앙연구원), 윤유숙(동북아역사재단), 진산(우지연) 작가, 곽재식 작가

사회자 :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패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형 판타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진산 : 앞서 개인발표 때 발언한 것과 같이 한국형 판타지가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건 아니며, 한 가지 얼굴만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판타지라는 것의 성질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앞서 곽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괴물’이라는 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 여러 다양한 욕망들을 반영하여 존재하게 하는데, 판타지에 대해서도 하나로 정리해서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백 명의 작가가 있으면 백 개의 이야기가 나오고, 천 명의 독자가 있다면 천 개의 답이 나오는 것이 한국형 판타지일 것입니다.

사회자 : 무언가의 경향 혹은 방향성을 연구하는 연구자분들의 입장과 고민도 듣고 싶습니다.

양창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산 작가님 시간에 이미 답이 나왔지만, 기본적으로 제 관점은 한국 사람이 쓰면 한국형 판타지가 맞다고 봅니다. 작가님과 같은 의견이죠. 글을 쓴 이의 가치관이 녹아있을 테고, 그것이 한국 독자들과 소통되는 근간이 될 테니 그것이 곧 한국형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자 : 곽재식 작가님의 괴물, 귀신의 전승 이야기를 확대해보면 자연스럽게 일본의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물론 일원화하긴 어렵다 하셨지만 동아시아만의 것을 굳이 찾아볼 수 있을까요?

곽재식 : 일본은 괴물이란 말 대신 요괴란 말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은 요괴 콘텐츠를 19세기부터 써와서, 그 분야에 뿌리도 깊고, 잎도 크게 피어난 상태죠. 학술적이기 보다 일반 신토(조상과 자연을 섬기는 일본 종교)에서 익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문화가 괴물 소재를 금기시해왔습니다. 사회가 억눌렀음에도 쉬쉬하며 퍼진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죠. 괴물 이야기 속엔 다른 이야기엔 없는 신선한 소재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당대의 배경을 유추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생동감 있게 배워갈 수도 있죠. 앞으로는 이런 괴물 이야기가 좀 더 양지로 나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꺼낸 친밀함을 느끼기 좋고, 여러 방향으로 활용하기 좋은 소재입니다.

사회자 : 대략적으로 일본의 요괴 등이 전승되는 방식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윤유숙(동북아역사재단) : 대중들이 공유하는 방식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곽 작가님 말씀도 맞습니다. 이야기가 공유될 때는, 우선 글이 있어야 하고, 인쇄술이 발달해야 보다 널리 공유가 되는데, 일본은 17세기에 이미 100만부 기록의 베스트셀러가 존재했던 문화권입니다. 그런 배경과 더불어 자연재해 앞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환경적 요인까지 더해 괴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끝없이 만들어지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에도시대에는 화산폭발이 크게 있었고 그 안에서 수만 명이 아사 했습니다. 이런 풍경을 요괴에 가깝게(아사하기 직전의 사람들을) 표현한 바도 있고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일본인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진산 : 한국형 vs 다른 동양형 이야기의 차이는 일단 시장이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동아시아라는 면에서 한중일이 범용적인 면도 많지만, 굳이 차이를 가르자면 중국의 경우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중국의 위상을 드높이자는 경향을 보입니다. 진시황 시절을 끊임없이 향수하며 로망의 끝으로 삼는 것이 중국 문화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화합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꼭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수도 있는데요. 결국은 모두가 하나 되는 화합이라는 형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고 그런 질서의 위배를 잘 용인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보통 한의 정서라는 말들을 하지요. 지금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한의 정서에 곧 한국인들만의 다이나믹한 감성이 묻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막장드라마 같은 것이 곧 한의 정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스타워즈]를 본 일본인들은 매카닉 문화에 감탄하는데, 한국인들은 주인공 인물들의 막장 관계도에 몰입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사회자 : 진산 작가님은 판타지는 현실의 왜곡이라고(말한 톨킨의 말을 인용)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한국적 왜곡 안에서 언어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시는지 궁금합니다.

진산 : 언어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톨킨은 언어학자였기 때문에 각 종족마다의 언어를 구현했지만 보통의 판타지에선 소통의 가능성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중요하지만 언어 그 자체가 주력 소재가 아니라면 그냥 가볍게 합의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해결방법을 찾자면 총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선은 일정 시간의 흐름을 가정하고, 인물이 치열하게 그 언어를 습득했을 것으로 그립니다. 두 번째는 특정 능력에 의한 자동번역 시스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판타지라서 가능한 초월적 장치가 부여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소통의 불합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잡는 것입니다.

곽재식 : 판타지에 대한 니즈를 살펴보면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판타지의 세계관에선 사람들이 순간이동 같은 마법도 쓰는데요. 그런데 꼭 소통을 위해 다른 언어를 치열하게 배워야 할까요?

진산 : 맞습니다. 판타지를 읽는 독자들은 외국어를 배우는 고충에 대한 해방감을 원할 것입니다.

사회자 : 역사를 다룬 콘텐츠에 항상 따르는 문제인 고증에 대해서도 말해보고 싶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합의한 범위 내에서의 왜곡은 문제없다고 보시는지요?

양창진(한국학중앙연구원) : 주목받는 사극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고증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일은 늘 반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역사 소재 드라마나 사극이 주는 메시지는 역사적 지식에 대한 고찰이 아닙니다. 그 스토리가 주는 정서적인 측면이 강한데, 여기서 고증을 물고 늘어지면 콘텐츠가 지녀야 할 메시지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현대 판타지에서 철저한 고증을 요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요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자 :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고증을 잘 살리는 것은 이야기의 맛을 살리는 장치가 되는 거라 생각하는데, 작가님들만의 자료 조사방법이 따로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곽재식 : 자료조사 자체에 몰두하는 건 아니고 그냥 오다가다 보이는 것을 수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괴물이야기’는 2007년부터 시작해서 11년째 하고 있습니다.

양창진(한국학중앙연구원) : 곽 작가님께서 해주신 구미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구비문학에서 전해지는 구미호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기록에 의한 구미호는 찾기 어렵다고 하나, 구비문학 속에는 수많은 구미호들이 전해지는데 혹시 살펴보신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곽재식 : 구미호는 20세기 이후로 많이 언급되고 활용되면서, 그 당시에 생존해 있던 구비문학 전승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거 기록에는 구미호가 아닌 그냥 여우에 대한 이야기도 여럿 있는데, 20세기 이후로 구미호가 한국의 대표 귀신인 듯 회자되면서 과거엔 그냥 여우 이야기였던 것들이 일부 구미호로 치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렸듯 이런 사실이 구미호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취지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획일화된 정통성을 언급하는 것을 지양하자는 뜻입니다.

진산 : 20세기 초반 구미호가 본격적으로 소비되던 시기의 구미호는 슬픈 누이, 혼자남은 아내 등을 다루었지요. 만약 오늘날에 구미호가 다시 주목받는다면, 아마도 ‘쎈언니’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을까 싶네요. 한국형 판타지를 다루고자 하는 창작자들은 이런 흐름을 잡아내야 할 것입니다.

윤유숙(동북아역사재단) : 곽재식 작가님 덕분에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괴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무척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는 특히 녹족부인에 관심이 갔는데, 이처럼 여성을 괴물화 한 다른 예가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곽재식 : [마스터즈 오브 호러 디어 우먼] 이야기는 캐나다 인디언 전설로 하반신이 사슴인 이야기입니다. 그 하반신 사슴은 나쁜 남자를 죽이는데, 만약 [녹족부인] 이야기가 남한의 소재였다면, 지역 축제 등에서 활용되며 조금 더 많이 회자되고, 관련한 이야기들이 더 발굴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아쉽게도 북의 이야기이면서, 그쪽 사회에서도 딱히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힌 듯합니다.

사회자 : 한국형 판타지는 곧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니다, 라는 논쟁은 의미 없다는 말씀이 이번 섹션의 큰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형 판타지를 위한 소재는 이렇게나 많고, 다양한 채널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 많은 연구가, 창작자 분들이 활용하고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세션2 – 선인의 상상세계, 판타지로 그리다


‘선녀와 나무꾼’의 변주, 21세기 선녀 _ 발표 : 돌배(장혜원) 작가



저는 웹툰 작가를 하기 전에 원래 게임회사에 근무했던 애니메이터였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직장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세 가지 작품을 연재했는데, 오늘은 두 번째 작품인 [계룡선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쓸 때 저는 제주에서 마라톤을 뛰던 중 우연히 마주한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에 홀리듯 사로잡혀 자연스럽게 이 스토리를 그려내게 됐어요. 여기 계신 할머니의 나이가 600살 이상이라면? 하는 상상들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풀렸다, 왜 600살 넘은 할머니가 여기에서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선녀가 아닐까? 혹시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가 아닐까? 라는 생각들로 이어나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주로 걷고 달리면서 이야기를 상상합니다.

그냥 ‘이러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 정도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옛날 옛적에 이 땅에 내려온 선녀님이 현재까지 살고 있어서, 발생한 현대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현대와 전통의 대비를 통해 신선하게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세계관 안에는 도교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들이 다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동물과 식물들 또한 그러한 자연친화적 세계관은 도교관에서 온 것입니다.

현대적 세계관의 배경을 대학교로 정한 이유는 개인이 추구하는 지식이나 취미 등에 대해 전문적으로 성취해나가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논리와 이성, 검증에 의해 발전해온, 전통적 요소와 정 반대인 생물학이라는 학문 소재를 차용했구요.

선녀님이 바리스타인 것은 단순히 제가 커피를 좋아해서인데, 실제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하고 일상에 밀접하게 두는 소재인 만큼 다들 재밌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준 것 같습니다. 글로벌한 소재이자 현대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템이라서가 아닐까.

전래 동화 속 선녀와 달라진 21세기 선녀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나 스스로가 이입되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캐릭터를 그려야 내가 창작하는 과정에서도 힘이 나고 캐릭터 자체에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무꾼에 대한 해석 역시 비슷했구요. 밉고, 싫고, 내가 쓰기 싫어지는 캐릭터라면 당연히 몰입도도 떨어지고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힘도 갖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내가 원하는 캐릭터로 변주해나갔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실제 전래동화와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현대에서 읽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소재, 시대적 배경이 낳은 설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창작자인 나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용인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면 그리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그려내고 싶은 욕망을 반영했습니다.

과거 속 인물들이 현대 사람으로 환생하면서 관계가 섞이고 역할들이 달라집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다른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도교적 세계관에서 차용했고, 마찬가지로 선녀의 주변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물이고 남자주인공의 사람들은 현대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계룡선녀전]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옛날 것과 지금 것, 선계와 인간계, 남자와 여자, 과학과 종교 등 정 반대의 것이지만 하나가 되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전통, 옛것이라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한국적인 것이라 할 순 없겠지만 세계인에게 두루 통용되면서도 종래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공감대, 그런 정서적 교류가 가능한 삶의 서사 모두가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바리공주’가 전하는 위로와 희망 _ 발표 : 김나임 작가


아직 연재중이고 준비할게 많아 이런 자리에 서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지만 오늘의 콘퍼런스 테마는 제가 좋아했고, 제가 추구하고자 했던 한국형 판타지에 대한 것이라 꼭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1990년대 출판만화 세대였던 저는 한국형 판타지라는 콘텐츠가 무척 희귀해서 그 장르에 늘 갈증을 느꼈고, 이런 콘텐츠가 더 많아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일본형 판타지, 중국형 판타지에 비하면 한국형 판타지는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즐겨보았던 [전설의 고향]같은 웹툰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내 창작물을 통해 우리나라의 전통 귀신을 보다 많은 분들께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귀신인 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역할로 샤머니즘 속 무당을 해결사로 내세웠습니다. 단군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무당, 무당은 이 땅에 오랜 세월 존재해왔지만, 그런 무당의 무력을 사칭하는 이들로 인해 여전히 편견에 시달리는 존재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이 땅에 최초의 나라가 세워진 순간부터 귀신들의 마음도, 사람들의 마음도 어루만지고 달래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웹툰 [바리공주]에서는 진짜 무당이 부채, 부적, 방울 등의 무구로 사람들을 달래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공주 설화는 한국형 판타지에 관심 있는 분들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났던 버림받은 딸 바리공주는 나중에 만신들의 왕이 되어 무당들이 섬기는 무조신이 됩니다.

웹툰 [바리공주]에는 도깨비, 구미호, 미명귀, 손말명,(처녀귀신), 몽달귀신(총각귀신), 청계, 광대귀신, 영매, 새타니, 잉어와 도령, 업신, 구렁이, 족제비, 두꺼비 등 우리 이야기에서 등장한 무적 요소를 지닌 모든 존재들을 한 번씩은 다 다루고자 했습니다. 삼신할매와 신 삼신할매도 등장합니다. 저승의 일곱 왕은 다소 변화를 두어 바리의 아들들로 묘사 했고요.

언제나 연재만 하는 작가이고 싶었던 제가 화면 밖으로 나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오늘의 콘퍼런스가 한국형 판타지를 주제로 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한국형 판타지를 콘텐츠로 창작한다는 것은 희귀한 소재를 고증하는 일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단계까지 녹록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형 판타지에 빠진 이상 그것을 놓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분들의 댓글을 보고 느낀 건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한국형 판타지에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더 많은 창작자들이 힘을 내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길 바라고, 더 많은 분들이 이 분야에 깊은 관심과 응원을 주셨으면 합니다.


선인의 상상세계, 한국형 판타지 세계로의 확장 가능성

패널 :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돌배(장혜원) 작가, 김나임 작가

사회자 : 창작을 위한 두 분의 자료조사 과정이 어땠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돌배 : 많이 한 편은 아니다. 복식과 고어를 고증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김나임 : 책, 논문, 사극드라마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했고. 무속신앙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직접 점집에 가서 신점도 봤습니다.

사회자 :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실 때 자료조사의 경로로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요?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왕조의 이야기는 실록 등의 정사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민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고, 그나마도 구비문학으로 전승됩니다. 다만 이 구비문학은 정리된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마자 상황을 덧대어서 이야기를 달리 전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구비문학대계]라는 사업을 진행했고 검색도 가능합니다. 구비문학에 전해지는 설화와 서사무가 등 (바리데기 이야기 포함) 서사가 있는 민요 등을 검색을 통해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간 기록 중 하나로 일기류 기록 또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기류를 통해서는 특정 시대적 배경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당대 사람들의 감정에 저마다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많아요. 우리가 과거에 대해 막연히 예측하는 편견적인 분위기 말고 과거에도 존재했던 사람들의 삶, 관계들이 생생히 녹아 있는 것들이 일기류 자료에 담겨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사회자 : 대표적인 사례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저는 개인적으로 부부, 가족 간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안동에서 지역축제 스토리로 활용하는 것 중 원이엄마 이야기를 말하고 싶습니다. 1998년 고성 이씨 문묘를 이장하던 중 관 속에서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와 한글 편지를 발견되었습니다. 먼저 죽은 남편을 따라가지 못한 아내의 가슴 절절한 사연이 담긴 이야기인데, 이와 같은 것은 오늘날의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고생하는 아내의 이야기나, 바리데기와 칠성왕본풀이 같은 무가에서도 삶을 엿볼 수 있고. 민요에서 전해지는 시집살이에 지치고 상처받은 여성의 이야기 등.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다양한 소재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자 : 고전번역원의 기록은 어떠한가요?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 정리된 자료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전기실록에는 치정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나 후기에 와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보수적인 이미지의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로 형성된 정체성인데, 그 기록은 매우 산발적입니다. 정쟁의 라이벌을 괴물로 묘사하거나, 그런 괴물을 다스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귀신을 억울한 영혼이라 생각했고, 그를 다스리는 이는 담력이 매우 강했으며, 사람들은 이런 원혼을 살펴 너무 다그치지 않고 공존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사회자 : 무당이란 존재는 현재에도 실존하는데, 이런 분야에 대해 자료조사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나임 : 무속자료를 의외로 찾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1년에 두 번 하는 무굿에 참관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고 그냥 그 행위를 관전할 뿐이었지요. 진짜 점을 보러 간 것은 매우 추천할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뭐든 직접 부딪치고 겪어보면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사회자 : 옛날이야기 또는 현재가 섞인 이야기에 언어나 말투에 대한 고민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돌배 :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야기였던 만큼 고어를 정확히 고증하는 과정에 연연하진 않았습니다. [계룡선녀전]에서는 고어,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하오체를 썼습니다.

사회자 : 옛날에도 지역 방언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구비문학에서는 특히 그런 것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황산벌] 같은 영화도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요?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당연히 사투리가 있었으나, 지금과 기준이 다소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경주의 말이 과거에는 그 지방 사투리가 아닌 신라시대 표준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구비문학은 구술된 이야기를 기록자가 옮길 때 단어를 바꾸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므로, 음성서비스도 지원합니다. 고어사전 또한 따로 존재하고 문서에 기록된 자료들이 많으니 창작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사회자 : [선녀와 나무꾼]은 모두가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다. 여기에 더했거나, 덜 한 것은 무엇인가요?

돌배 :선녀와 나무꾼을 메인 소재로 차용한 이유는 그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였습니다.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한다, 라고 말하면 한국사람 거의 대부분은 아~ 하고 큰 줄거리를 곧바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 큰 바탕을 토대로 세부적인 부분은 창작자의 권한이라 여겨 마음껏 바꿔나갔습니다. 창작이란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바리데기 설화는 버전이 정말 다양한데, 어떤 걸 참고하셨나요?

김나임 : 바리설화를 동화적으로 전해진 이야기만 알고 있다가, 아주 나중에 바리가 무당의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무극 설화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사회자 : 실제로 학술적으로 연구된 바리설화의 버전들이 정말 다양한지 궁금합니다.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바리의 무가 중에선 바리가 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풀이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설화 자체가 그렇게 유명하거나 존재감 있는 설화는 아니었는데 1970년대에서 80년대 우리의 전통 소재들이 주목받으며 본격적으로 그 소재가 활용되었고,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페미니즘 열풍으로 여성의 주체적인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바리설화를 재발견하게 했습니다. 그런 흐름을 타고 고유의 이야기에서 옵션을 더해 입맛대로 섞어가며 여러 버전이 생겨났습니다.

사회자 : 모종의 이유로 바리에 주목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변주가 일어났다는 말씀인 거 같습니다. 그럼, 콘텐츠를 대할 때 학자로서 고증에 대한 고민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 전통 소재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만약 그 장르가 다큐멘터리라면 고증에 철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학자이기에 드라마를 보며 불편한 순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창작 콘텐츠에 그런 엄격성을 요구하기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고증은 몰입도를 높이는 수준 정도로만 작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서로의 선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저는 사학 전공은 아니지만 국문학자로서 반성하는 지점이 많습니다. 창작자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콘텐츠에서 엄격하게 고증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그럴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두 작가님 모두 창작 과정에서 다양한 복식을 참고, 활용하셨지요?

김나임 : 웹툰은 상업적인 콘텐츠이고 작가와 플랫폼이 모두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독자(대중)에게 어필해야 하므로 고증도 중요하지만, 독자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철저하게 시대적 가치로 고증하자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무채색의 넝마 같은 것들을 입어야 했지만, 그렇다면 콘텐츠가 다가가고자 하는 지점에 이르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복을 일로 하는 친구가 있어 직접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며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돌배 : [도문대작]을 쓴 유승진 작가가 창작 과정에서 참고해야 할 고증의 다섯 단계를 말해준 바 있는데요. 여기에서 가장 최소로, 거의 기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복식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어느 지점을 배경으로 하며, 그들이 현대의 우리와 유사한 복장을 하는 것은 합의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건축.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고층빌딩을 그려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창작자들에게 권장되는 수준의 고증 단계입니다. 그 다음은 추구하면 몰입도가 높아지지만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수준인데, 순서대로 도량형, 경제(당시의 물가 등), 언어 순입니다.
언어는 특히 오늘날 우리의 창작물을 보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주요한 소재이므로 오히려 철저한 고증이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형 판타지나 퓨전사극의 경우는 시대적 배경과는 사뭇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선녀가 바리스타인 점은 진산 작가님 말씀처럼 어떻게 보면 대놓고 현실을 왜곡한 것인데, 이런 거짓을 통한 상상이 나의 내적 세계에서는 용인되는 변주였고, 나의 독자들도 그것을 받아들여주었기에 가능한 왜곡이었다. 다만 이것은 작품 초반에 분명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웹툰으로 예를 들자면 5화 이전에 모두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적인 줄거리를 따르는 독자와 창작자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사회자 : 지금 토론장에 계신 네 분 전부 여성입니다. 두 분의 창작물에는 특히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냥 생각해보기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을 화자로 하는 기록이 적을 것 같습니다.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 조선시대에는 행장/묘지명 등에 여성이 죽은 이후 지나온 삶을 드높이는 기록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대개가 집안을 화목하게 유지하는데 들인 노력, 수고에 대한 칭송입니다. 이런 사회적 체재를 유지시키기 위한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아닌 특이한 사례는 어우동 그리고 제주의 만덕 이야기 정도가 있습니다.

사회자 : 구비문학에는 없는지?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삼신할망, 저승할망(구 삼신할망) 이야기가 대표적 입니다. 구 삼신할망이 신 삼신할망이 대결한 후에 신 삼신할망이 이겨서 이승의 아이를 돌보게 되고, 구 삼신할망은 저승할망이 되어 저승의 아이를 돌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설화에는 이런 류의 여성 서사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의 안녕이나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으로 여성성이 신격화 된 존재들 또한 다수 있으니, 주체적인 여성들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사학보다 국문학에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 다양한 역사 사료와 기록, 이야기를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찾아 볼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옛 자료에 대한 접근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데요, 자료를 찾거나 서비스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50년간 1,500 책 정도를 번역했고, 전통 창작 자료 소재집을 2번 만든 적 있습니다. 고전 종합 DB가 있고,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 내 연구보고서 안에 자료집이 있어 PDF로 다운로드가능 합니다. 또한 고전자문서비스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재를 찾으시는 분들이 문의를 하셔도 학자들이 최대한 찾아서 답변을 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돌배 : 우리 같은 창작자가 기관에 방문해서 취재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세금으로 조성, 운영되는 기관의 문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충분히 이용할 수 있고, 요청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응해야 할 일입니다.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일기류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관련한 기록들을 번역하여 책으로도 출판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스토리테마파크와 유교넷 같은 사이트에서 검색으로 필요한 소재들만 찾아서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시대의 하층민, 광대 이야기, 기아와 배고픔, 생활상 등 관심 있는 소재에 대한 키워드만으로 관련 자료를 뽑아내듯 찾아볼 수 있으니 콘텐츠를 창작할 때 활용하기에 용이할 것입니다.

김나임 : 이러한 자료를 상업적으로(웹툰화) 이용해도 되는 것인가?

박지애(한국국학진흥원) : 그렇게 콘텐츠의 원천소스로 사용해주십사 제공하는 것이니 적극 활용해 주세요.

사회자 :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얻은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한국형이란 표현도 중요하고, 고증도 중요하지만 둘 중 어느 것에도 너무 과몰입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거듭 반복한 것 같습니다. 결국 고증은 이야기의 효과를 돋우는데 필요한 것이며, 보다 많은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져 퍼지는 것이 새로운 시대에 전통적인 가치들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일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집필자 소개

삽화 : 송동근
송동근
만화작가,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담’ [화백의 담화]1~10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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