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 남산동에 자그마한 한옥에서 한국인 아내와 딸과 같이 살고 있다. 주말에는 집에서 아내와 카레 식당을 하고, 평일에는 집필이나 번역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단조롭지만 그런대로 내가 바라왔던 일상을 보내고 있다.
동남산의 자택 겸 카레 식당
내가 경주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95년 가을이었다. 당시 경주에 관해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신라의 고도 정도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KTX가 없어서 새마을호로 4시간이나 걸려 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역의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공기가 다르다”
경주는 시골이라서 서울과 달리 확실히 공기가 맑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경주의 공기는 단순한 시골의 공기와는 달랐다.
“어쩐지 나라와 닮았네”
내가 일본에 있었을 때, 즐겨 다니던 곳이 일본의 고도 나라(奈良)였다. 아름다운 사찰은 물론, 바쁜 도시보다 훨씬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갔었던 곳이다. 내가 경주역에서 내리자마자 마신 공기는 마치 나라의 공기와 같았다.
시내를 구경하려고 탄 버스의 창가에서 겹겹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들을 바라보면서 바로 경주가 분지인 것을 깨달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주 남산 (출처 : 경북일보_불국토 경주 남산_2009.07.28.)
“그래서 그렇구나!”
고대인들은 산이 자연 요새가 되도록 분지를 수도로 선택했다. 한국의 경주가 그렇고, 일본의 교토, 나라가 그렇다. 특히 경주와 나라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고대인들이 자유롭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왕래했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경주 곳곳을 다니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산의 석불이나 마애불이었다. 일본의 불상은 목조상 혹은 건칠상(乾漆像)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경주에 이렇게 많은 석조불이 있다니. 게다가 딱딱한 바위인데도 마치 목조인 것처럼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고대 신라인들의 기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국보 제312호
칠불암, 칠불암 삼존불 중 중앙의 본존상은 넓고 강건한 어깨와 가슴, 가는 허리 등 박진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에 각각 정병과 연꽃을 들고 있는 협시 보살상들은 모두 풍만한 얼굴, 육감적인 체구,
유영한 삼곡(三曲)자세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남산 신선암
나는 바로 경주가 마음에 들어 직장을 다니면서 휴가 때마다 경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상이 지루하게 되면 경주를 찾아왔다. 아마도 마흔 번 넘게 경주에 온 것 같다. 신라유적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그 시대의 사회·문화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할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2000년에 주일본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문화원은 한국문화를 일본인에게 소개하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추진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있어 양국관계가 양호한 시기였고, 문화교류사업이 많이 시행되었다.
나는 한국문화원에서 일하면서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예술인을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한국문화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커져갔다. 결국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07년 서울 근교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40세가 넘어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만류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나는 그다지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 이유는 인류학의 방법론인 ‘현지조사’가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조사지’를 경주로 정하여 아내와 딸과 함께 경주에 내려왔다. 2011년이었다. 경주에 왔을 때는 마치 ‘제2의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는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제시기의 경주를 연구하고 있다.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2년 봄, G씨와의 만남으로부터였다. 1929년 경주 중심부에서 태어나 평생 경주 중심부에서 살아온 G씨는 여섯 살 즈음인 1934년경부터의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었다. 나는 G씨와의 대화를 통해서 일제시기의 경주, 특히 경주의 중심부에 대한 이미지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경주는 신라왕조의 수도로서 고고학과 고대사의 주요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그에 비해 일제시기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일제시기 경주에 관한 연구가 많지 않다. 그러나 체계적인 고고학과 고대사가 성립된 것은 일제시기이며, 고대 신라의 대형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된 것도 일제시기이다. 또한 문화재가 대량으로 유출된 것도 일제시기이다. 철도가 부설되어 전국에서 수학여행단이 경주에 모여들게 된 것도 일제시기부터이다.
일제시기는 한국인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아마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시기는 현대 한국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기이므로 보다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일제시기의 경주를 연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일제시기의 일본어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장점을 살리면서 경주의 근대사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것이 일본인 연구자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다.
경주에는 고대유적만 있지 않다. 경주 중심부를 다녀보면 의외로 일제시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15년부터 1975년까지 경주박물관정확한 호칭은 1915년~1926년은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 1926년~해방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해방~1975년은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변천했다.으로 사용된 조선시대 경주 관아건물들은 지금도 경주문화원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경주문화원에서 동쪽 200m 정도 걸어가면 일제시기 ‘서경사(西慶寺)’라 불렸던 일본 사찰건물이 있다. 이곳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반대로 경주문화원 서쪽 100m 정도에는 경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야마구치(山口)의원’ 건물이 보인다. 현재 경주경찰서의 체육시설 ‘화랑수련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1936년에 지어진 건물인 경주역이 있다. 경주역 뒤편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지어진 급수탑도 남아 있다.
경주문화원
구 서경사 건물
경주역
화랑수련원
고대와 근대가 뒤섞여 있는 유적도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금관총이다. 경주문화원에서 남쪽 600m 정도 내려가면 반달형의 특이한 고분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금관총이다. 금관총은 원래 원형 고분이었으나 도로공사와 택지개발로 인해 봉토가 깎여져 본 모습이 사라졌다. 금관총은 고대유적이지만 1921년 가을 거기서 대량으로 발견된 신라의 보물로 인해 경주가 세계적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유산’으로 볼 수도 있다.
[금관총]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어 붙은 이름이다.
1921년 9월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인데, 묘의 구조나 유물의 정확한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출토물은 금관을 비롯하여 장신구·무구(武具)·용기 등이며,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_대한민국 구석구석_한국관광공사)
이런 일제시기의 흔적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일제의 잔재’인 동시에 민족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주역은 산업적 혹은 군사적 목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사용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전국에서 한국인들이 경주를 관광하고 본인들의 민족적 기원을 확인하는 창구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제품은 당시 경주 관광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의 이윤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 사이에는 고대 신라의 영화를 보여주는, 다시 말해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였다.
나는 이처럼 일본인과 한국인의 복잡한 경합을 분석해가면서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논문을 쓰기로 하고 수시로 서울에 올라가 지도교수의 조언을 받으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논문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나의 은행 계좌의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중에 현 경주문화원장인 김윤근 선생의 추천으로 경주지역의 장학재단인 대추밭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경주사람은 ‘배타적이고 텃세가 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경주는 전통도시로서 그런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주 사람들의 문화예술과 학문에 대한 이해심과 포용력은 남다르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지역사회의 따뜻한 풍토 속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순탄치는 않았으나 2018년 여름에 나는 마침내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내가 유학을 온 지 11년 만의 일이었다. 고맙게도 논문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학문적 실력이라기보다는 경주가 지닌 풍요로운 역사와 환경, 나의 연구를 지지해주는 경주 사람들, 적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지도교수, 그리고 가족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경주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려고 한다. 경주에서 사는 것은 어쩌면 25년 전 내가 처음으로 경주를 찾아왔을 때부터 정해진 팔자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연구가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회에 환원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고도 경주의 근대를 걷다”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다. 아마도 올해 안에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출판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에는 고대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왕조기, 조선왕조기, 근대·일제시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가 흐르고 있다. 고대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면 자칫 이러한 역사의 연속성이 간과될 수도 있다. 나의 연구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의 경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 경주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한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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