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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담으로 하는 조선판 비정상회담
- 한 조각 돌덩이에서 천하대세를 엿보다 -

스웨덴 청각장애인청년과 한국 청각장애인청년이 영어로 필담을 나누고 있다.
<출처:에이블포토_주원희기자>
위 이미지는 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외교 사절과 문화 교류


조선 시대에 외교 사절단이 중국의 수도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는 것을 ‘연행(燕行)이라고 한다. 이 연행의 일차적 의미는 조공(朝貢)을 통해 양국 간의 정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었지만, 한편으로 경제·문화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이 사절단에 동행하여 한·중 무역을 주도하였던 역관 가운데는 변승업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경우도 있었다. 또 이 사절단을 대표하였던 삼사(三使, 정사·부사·서장관)와 그들이 데리고 갔던 자제군관들은 외교적 업무 외에도 한·중 간의 문화교류를 담당하였다. 그래서 1780년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를 다녀왔던 박지원은 중국 땅을 들어서며 가졌던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말 위에서 스스로 생각해 보니, 학식이라곤 전혀 없는 내가 적수공권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위대한 학자라도 만나면 무엇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를 할 것인가?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초조하였다. 그래서 옛날에 들었던 것 중에 지전설(地轉說)이라든가 월세계(月世界) 등을 생각해내어,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은 채 졸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풀어내었다. 수십만 마디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 속에 쓰고 소리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하루에도 여러 권이나 되었다. 『열하일기』 「혹정필담」

『열하일기』,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글을 보면 박지원은 중국 인사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최신 지식들을 끌어내어 생각을 풀어내었고, 그들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하루에도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머릿속에서 엮었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관람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의 지식과 정신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색과 창작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열하일기』로 남은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박지원은 실제 중국 인사들과 만나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필담을 통한 의사 전달


1831년(순조31) 장인 홍석주(洪奭周)를 수행하여 청나라로 갔던 한필교(韓弼敎,1807~1878)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필담이란 글로써 입을 대신하는 것이다. 의자를 마주하고 앉아 비록 입으로 말을 통하지는 못하지만 붓으로 구구절절하게 모두 심회를 풀어놓는 것이니, 차분하고 점잖으며 꾸미는 말과 떠드는 소리가 없으니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중국 사람들은 필담에 민첩하여 표현이 난삽하고 글이 길더라도 반드시 종이만 있으면 바로 써 내려가는데, 간단하면서도 뜻이 분명하며 조리와 맥락이 서로 뒤섞이지를 않는다. 시를 지을 때도 또한 그러하니, 대개 서로 시를 주고받는 사이에 뜻에 맞는 구절이 있으면 반드시 옆에다 권점(圈點)을 치고 어떤 경우는 웃어젖히며
“과연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라고 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머리를 끄덕이며,
“참으로 좋습니다. 참으로 좋습니다.”라고 한다. 『수사록』 「문견잡지」

『18세기 통신사 필담1』 표지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위의 글을 보면, 한필교는 꾸미고 떠들면서 하는 말보다 붓으로 써 가며 차분하게 심회를 풀어놓는 방식이 훨씬 낫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중국어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먹과 종이를 놓고 붓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였던 것이다. 또 이러한 필담 방식은 돌아가며 시를 짓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청나라 인사들과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조선으로 귀국해서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곤 하였는데, 홍양호(洪良浩, 1724~1802)와 홍경모(洪敬謨), 기윤(紀昀, 1724~1805)과 기수유(紀樹㽔)처럼 조손(祖孫) 간에 대를 이어 교유를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또 그 결과물로 ‘○○筆談’ ‘○○問答’하는 식으로 다수의 필담집이 전한다. 이들 필담집 에는 북경에 머물던 서양 선교사나 악라사(鄂羅斯, 러시아) 사람, 태국·베트남·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류큐(琉球, 오키나와)에서 온 사신들과의 필담도 있으나, 중국 인사들과의 그것에 비하면 다소 단편적인 질의응답에 그치고 있다.

한편 이들의 교유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나고 학술을 소통하며, 중국과 서양 세계에 대한 현실 인식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리창에서 맺은 ‘천애지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1765년 숙부인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으로 연행했다. 이때 나눈 필담의 내용이 『담헌연기』「간정동필담」(지명을 따서 ‘간정동’이라 읽기도 한다)에 남아있는데, 그 서두에서 “강(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보이는 것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크게 원하는 바는 한 아름다운 지식인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어 함께 실컷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북경의 유리창에서 항주 출신의 선비 엄성(嚴誠, 1733~1768)과 만나게 되고 이른바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우정을 맺게 된다. 이들은 두 달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일곱 차례 만났는데, 다음은 그 마지막 만남에서 나눈 필담의 내용이다.

『18·19세기 동아시아 문화거점 북경 유리창』
표지 <출처 : 민속원>

홍대용: 우리들은 나라의 외교적 사명(使命)을 띈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온 것은 다만 천하의 특출한 선비를 만나 한 번 흉금을 드러내 토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다만 강역이 한계가 있고, 다음에 만날 기약이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엄성: 우리는 솔직한 성질의 사람인데 참된 지기(知己)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모임에서 서로 갈라지게 되니 절로 코끝이 시큰해지고 마음이 상합니다.

위의 대화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연행을 하게 된 목적이 ‘천하의 선비를 만나 흉금을 터놓고 토론하는 데’있다 하였다. 이에 비해 엄성은 자신이 아직 ‘참된 지기’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지기를 만났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관계를 ‘하늘 끝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라는 의미에서 ‘천애지기(天涯知己)’라고 부른다. 또 이러한 사귐을 서로의 마음, 즉 ‘정신을 교감’한다는 뜻에서 ‘신교(神交)’라고 한다.


학술적 소통의 장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경우처럼 金石考證에 있어 사제지간이 되어 학술적으로 소통하고 영향을 주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 소통의 현장에 있었던 이임송(李林松, 1770~1827)은 “추사라는 특출하신 선비, 동쪽 바다 먼 곳에서 태어났네. 봄바람과 함께 와서 가까운 이웃처럼 서로 어울렸네. 통역관이 전달할 수가 없어 붓으로 서로 필담을 나누었네.”라고 읊기도 하였다.

또 박규수(朴珪壽, 1807~1876)는 귀국 후 북경에서 필담을 나누었던 심병성(沈秉成)에게 붙인 편지에서 “북경에서 여러 군자들과 교유했던 날들이 많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북경 성문을 벗어나서 머리 돌려 회상하니, 미처 못 다한 말들이 어찌 그리 많던지요!”라고 하면서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국토를 벗어나지 못해 고루하게도 한 선생의 말씀만 지킵니다. …… 명성과 이익으로 사귐을 논하는 것은 군자가 부끄러워하는 바요, 이 몇 가지를 버려야만 우도(友道)가 마침내 드러나지요. …… 그렇다면 저의 진정한 벗은 중국에 있고, 여러분들의 진정한 벗은 조선에 있습니다. 『환재집』 「與沈仲復秉成(1)」

라고 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에만 얽매여 있는 점을 말하면서 명성과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과 심병성의 관계가 ‘진정한 벗’임을 말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 인사들과의 학술적 소통을 전문 지식을 심화하고 주자주의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나가는 등 감발의 계기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현실 인식의 장 - 한 조각 돌덩이에서 천하대세를 엿보다


한편 중국 사행은 중국의 민심과 서구 열강의 움직임 등 세계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필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접대하는 모습을 보면 한결같이 숙련되고 의젓하여 교만한 모습이 없으며 느긋하고 여유로워서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는다. 또한 법을 두려워하고 몸을 삼가며 규정을 지키고 속되지 않아서 한 번도 망령된 말이나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친지를 만난 듯이 반드시 허리를 안고 도닥이거나 손을 잡고 흔들면서 그 은근한 뜻을 보인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상투 한 자락을 뽐내며 천하에 잘난 척을 하면서 억지로 뻣뻣하게 무게를 잡지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니 저들이 반드시 우리들의 무례함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대개 잠깐씩 서서 대화하는 사이에 무슨 수로 마음을 곡진하게 내 보이려 할 것이며 저들 조정의 득실과 민심의 향배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수사록』 「문견잡지」

위와 같이 중국 관리들의 엄격하면서도 친근하게 일행을 맞이하던 모습과 조선 사신들의 잘난 척하고 부자연스런 행동을 대비시키면서, ‘이래서야 어찌 저들이 마음을 곡진하게 내 보일 것이며, 조정의 득실과 민심의 향배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박지원은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적국의 사정을 잘 엿보았다’라거나 ‘풍속을 잘 관찰했다’라고 하는 말들을 자신은 전혀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옛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고 문답하는 바깥(言語問答之外)에서 항상 정보를 얻었다. …… 그렇다면 한 조각 돌덩이로도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다”『열하일기』 「황교문답」

라고 하였다. 즉 여기서 말한 ‘말을 주고받고 문답하는 바깥(言語問答之外)’이 바로 박지원이 필담에서 얻고자 했던 목적이었고, 여기서 말한 ‘한 조각 돌덩이’가 바로 박지원이 중국을 읽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집필자 소개

조창록
조창록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수석연구원
“청나라 새 황제에 대하여 묻다”

옹정제 (출처: 위키백과) 황정, 계묘연행록, 1723-10-10 ~

1723년 10월 10일, 황정은 요동에 있었다. 사행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신요동이란 곳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는데, 추운 날씨에 객사의 온돌이 따뜻하지 않아 민가를 찾아 유숙하였다.
그런데 민가의 주인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역관을 통해서 이번에 새로 등극한 황제가 새로운 정치를 시행하면서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이 그전 황제에 비하여 나은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사행단의 역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나라 황제의 정치 시행에 관한 것인데 어찌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묻는가?”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황제가 계신 북경에서 오신 길이시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역관이 대답하였다.
“먼저 황제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 새로 등극한 황제는 오직 은자(銀子)만 아끼고 좋아한다 합니다”
황정은 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비록 변방의 늙은이라고 하나, 새로운 황제에 대한 인상이 이러하니, 새로운 황제가 탐욕이 많고 어질지 않음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면서 태국 사신들을 보다”

1860년 자금성의 정문 – 오문(午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1-12-29 ~

1801년 12월 29일, 이기헌(李基憲)은 사신단의 서장관 신분으로 명나라 수도에 와 있었다. 한 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오늘, 조선의 사행단은 오문 밖 조방에서 황제의 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오늘 태묘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겠다고 하여서, 궁을 떠나는 황제를 전송하기 위해 명나라의 관료들과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는데, 황색 지붕을 얹은 작은 가마를 타고 있어서 실제 황제의 용안을 보지는 못하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황제의 의장물은 매우 간단하였다.
황제의 어가는 오랫동안 머물면서 신료들을 돌아보다가, 태국에서 온 사신들을 지나쳐 갔다. 그는 아래 반열에 자리한 채로 어가를 맞이하고 서 있었다. 이기헌은 태국 사신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입은 조복(朝服)을 보니 얼룩얼룩한 무늬의 비단에 소매가 없는 긴 도포를 입었고, 쓰고 있는 관은 반자쯤 되는 길이에 동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하여 그 형태가 마치 뿔과 같았다. 머리카락은 자르고 땋아 내리지 않았다. 조회를 마치고 태국 사신들에게 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사석에서는 의관이나 허리띠, 신발 모두 청나라의 제도를 따르지만, 조회를 하고 어가를 맞이할 때에는 본국의 의관을 따른다고 한다.

“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미상, 계산기정, 1804-01-24 ~
왕자정(王柘庭)ㆍ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으로 갔는데, 경암(絅菴)과 추양(秋陽)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 및 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입니까?” 했다.

“청나라의 조참례에 참여하다”

1901년 자금성의 정문 – 단문(端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9-25 ~

1662년 9월 25일, 정태화(鄭太和)는 아침 일찍부터 자금성으로 갔다. 오늘은 청나라 조정의 조참(朝參)례가 있는 날이었는데, 조선 사신도 여기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 일행은 자금성의 승천문을 경유하여 오문을 지나 단문 밖에 이르렀다. 단문 안으로 들어가 서반의 앞 행렬 끝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울리면서 황제가 등장하였다. 3번의 호령소리가 울리더니 황제가 용상에 앉았다. 청나라 관리들 중에서 새로 관직을 제수 받은 사람과 새로 상을 받게 된 사람들이 뜰의 동서로 나누어서 북쪽을 향해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나서 각각 자기의 반열로 돌아갔다.
홍로시 관원들이 청나라에 들어온 사신 일행을 이끌고 다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는데, 정태화의 일행도 이에 참석하였다. 례를 마치자 정사와 부사, 서장관 3명의 사람을 인도하여 황제가 있는 황극전의 계단 위로 올라가게 하여 서쪽 기둥 밖에 앉게 하였다.

“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황중윤, 서정일록, 1620-05-10 ~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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