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골 정생의 서당에도 여름이 왔다. 정생의 서당은 작은 집 사랑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 학동 여덟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니, 문짝을 떼어내도 줄줄 흐르는 땀이 책을 적실 판이었다.
“어허, 이래서야 어디 성현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겠느냐?”
정생이 몇 오리 안 되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접장이 그 뜻을 깨닫고 얼른 말을 받았다.
탁족과 술로 마음을 달래는 선비들(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조선시대 휴가인 천렵(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아무렴요. 이런 날에는 산에 올라 훈장 어르신은 탁족을 하고 저희는 천렵을 하여 된장과 고추장을 넣고 매운탕을 끓여 속을 확 풀어버림이 옳습니다.”
그러자 금방까지 책 속으로 빠져들듯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학동들이 눈을 반짝이며 목을 쳐들고 정생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자. 하늘이 이리 더운 날을 주셨으니, 해가 쨍쨍할 때 포쇄를 함이 마땅하겠다.”
그 말에 학동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포쇄란 무엇인가? 포쇄는 쇄서포의(曬書曝衣)의 줄임말로 책과 옷을 햇빛에 쏘이는 것을 가리킨다. 강렬한 햇빛을 쏘여 책의 습기를 날려서 곰팡이와 좀을 예방하는 것이다. 옷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학동들은 왜 입을 딱 벌렸는가?
사랑채 마루에 책을 널어 말리는 모습(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정생이 포쇄를 하겠다 하였으니 서당에 있는 책들을 지고 날라야 하는 것이다. 정생이 뛰어난 학식을 가진 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유생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책을 모으는 것이었다.
책쾌 조생이 들르면 보지 못한 책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런 책이 있으면 어디서 돈을 꾸어서라도 그 책을 사는 것이 정생의 낙이었다. 이러다보니 정생의 서재에는 빼곡하게 책들이 들이차 있었다. 사면 벽을 책가(冊架)로 만드는 것을 떠나 그 사이마다도 책가를 설치해서 책들을 넣어놓았다.
그럼 그 책들을 포쇄한다면, 그 책을 누가 이고지고 갈 것인가? 당연히 학동들이 할 일인 것이다. 이제 그 많은 책을 지고 산을 올라야 할 판이니 학동들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훈장 어르신, 제가 오늘 집에서 모내기를 한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다급하게 한 학동이 외쳤다.
“재동이구나. 너희 집은 무얼 하다가 7월에 모내기를 한단 말이냐? 조선 천지에 그런 법은 없나니, 내가 감히 스승을 기망하려는 거냐?”
“아, 제가 날이 더워 잠깐 꿈을 꿨나 봅니다.”
재동이가 얼른 변명을 했다. 다행히 정생도 더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학동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저, 훈장 어르신, 그런데 오늘은 칠석날입니다.”
“응? 병구구나. 오늘이 칠석이구나. 그런데 왜?”
정생이 부드럽게 말을 받자 병구가 조금 기운을 내서 말했다.
“칠석날은 옥황상제를 노엽게 하여 귀양을 간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날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만나게 하려고 까막까치들이 다리를 놓아 오작교라 부르지요. 그래서 은하수를 건너 두 연인이 서로 만나면 반가움에 눈물을 흘려 우리가 사는 속세에 비가 되어 떨어진다고 합니다.”
“갑자기 무슨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이제 중요합니다! 이렇게 칠석날이면 비가 오는데 이런 날 포쇄를 갔다가 비가 내리면 귀한 책이 홀랑 젖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포쇄는 길일을 잡아 다시 정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정생이 그 말에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기울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날이 창창하고 구름 한 점이 보이지 않으니 비가 올 리가 없겠구나. 자, 허튼 소리들 하지 말고 어서 짐을 꾸려라. 이러다간 산에 올라가 밥 먹을 시간도 없겠구나!”
결국 이리하여 모두들 지게를 지고 책들을 하염없이 쌓아올린 뒤 서당 뒤편의 홍복산에 오르게 되었다.
*
기진맥진해서야 꼭대기에 올랐는데, 사실 홍복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책만 없었다면 그렇게 힘들 일은 아니었다.
정상에 도착했다고 다 끝난 것도 아니었다. 책들을 잘 늘어놓아야 한다. 그 일이 다 끝나자 거의 점심때가 되었다. 정생이 점잔을 빼며 말했다.
“다들 수고했다. 계곡에 내려가 천렵을 해라.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접장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접장도 천렵을 가고 싶어 손발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자네가 가서 아이들 잘 살펴보도록 하게.”
접장이 인사치레로 물었다.
“혼자 계셔도 되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내가 무슨 어린 아이인가? 혼자 있으면 뭐 어때서? 여기서 호연지기를 느끼고 있을 테니, 준비가 다 되면 부르게.”
“준비요?”
접장이 멍청하게 반문했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아, 준비! 물론입죠. 제가 맛나게 준비 다 해놓고 모시겠습니다.”
접장과 학동들이 우르르 내려갔는데, 병구는 미적거리면서 따라나서질 않았다.
“너는 왜 안 가고 게 섰느냐?”
“저, 전 몸 쓰는 건 영 젬병이어서요.”
“그래도 동무들과 함께 있어야지.”
정생은 햇빛과 책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혼자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병구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병구는 책 하나를 들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책 읽는 건 몸 쓰는 게 아니라서 좀 쉬워요. 하지만 저는 이것도 잘 하지 못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책을 잘 읽을 수 있을까요?”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이 있느니라. 들어보았느냐?”
“백 번을 읽으면 뜻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옳거니. 알고 있구나. 이렇게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 병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사방에 늘어져 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 하지만 훈장 어르신, 세상에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 많은 책들을 어찌 백 번씩이나 또 읽을 수 있습니까? 다 보기도 전에 죽을 것 같은데요?”
“어허, 해보기도 전에 못 한다고 하면 되겠느냐? 무오사화 때 돌아가신 김일손 어르신은 당나라 시인 한유의 글을 천 번이나 읽었으며 정승 노수신 어르신은 논어를 2천 번을,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 어르신은 장자를 천 번이나 읽었다고 했느니라.”
병구가 입을 딱 벌렸다.
“백 번도 아니고 천 번, 2천 번을요?”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니라. 백곡(김득신, 1604~1684) 선생이라는 어르신은 58세가 되어서야 급제를 해서 참봉 벼슬을 받았지. 얼마나 열심히 독서를 했는지 모른단다. 이 분의 기록은 말이야. 『사기』의 백이열전을 11만3천 번을 읽었단다.”
“네에? 십만 번이요?”
“아니. 십만 하고도 만3천 번을 더.”
“그게 가능한가요?”
정생은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 보통 사람들은 그 엄청난 숫자에 놀랄 뿐이었는데, 병구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백곡 선생은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고 했단다. 책을 억만 번 읽겠다는 뜻이지. 선생은 36년 동안 만 번 이상 읽은 책들을 「고문삼십육수독수기」라는 독서일기에 기록해 놓기도 했어.”
「고문삼십육수독수기」(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독서일기요? 그게 뭐예요?”
“자기가 읽은 책을 기록한 거란다. 총 34편의 책을 만 번 이상 읽었다고 적었단다. 모두 44만1천5백 번을 읽었다고 되어있지.”
“우와, 그럼 아까보다 더 많잖아요!”
“다산(정약용) 선생도 부지런히 독서한 사람 중 으뜸은 백곡 선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은 분이란다. 하지만 다산 선생도 저 숫자는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고문삼십육수독수기」는 후대에 누가 백곡 선생 이름으로 쓴 게 아닌가 생각하셨지.”
“책 읽은 횟수를 대체 어떻게 셀 수 있죠?”
“책을 읽는 횟수는 서산(書算)을 이용해서 하면 된단다.”
“서산이요? 여기서 좀 더 가면 서산(西山)이긴 한데… 거기 저희 집이 있어요.”
“산 이름 아니고, 책 읽은 거 계산한다는 산(算)이다.”
병구가 멋쩍은 듯이 헤헤 웃었다.
“서산이 여기도 어디 있을 텐데…”
정생이 책을 뒤적여 서산을 꺼냈다.
서산(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서산(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요렇게 된 녀석인데, 아래쪽을 읽을 때마다 접어서 열 번을 접으면 위쪽을 한 번 접어서 표시를 하는 거다. 이건 위에 접는 부분이 다섯 번 가능하니까… 모두 몇 번 읽으면 하나를 다 쓰겠느냐?”
“네? 다섯 번이니까 오십 번이겠죠?”
“아니다. 위쪽을 다섯 번 접어도 아래쪽 열 번은 또 접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모두 육십 번을 접을 수 있는 거다.”
“오호라.”
병구가 신기한 듯이 서산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훈장 어르신, 이 서산은 한 번도 접은 흔적이 없는뎁쇼?”
“시, 시끄럽다. 이리 내놓아라!”
“새 거니까 기념으로 저 주세요.”
“그, 그러든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생은 두툼한 책 하나를 목침 삼아 베고 벌렁 누웠다.
“밑에서 사람이 오면 깨우거라.”
*
“일어나라.”
정생은 누가 감히 반말로 깨우는가 싶어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그랬더니 홍복산은 사라지고 어떤 관청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대뜸 등채로 자신을 가리키는 인물은 형색으로 보아 관찰사 나리 같아 보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 놈이 감히 우리 아들이 적은 독서일기를 거짓부렁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루에 서른 서너 번 정도만 읽으면 44만 번을 36년 동안 읽는 것이 가능한데, 내 아들이 겨우 그것을 못해냈겠느냐?”
그러면서 등채로 왼쪽 어깨를 딱 때리는 것이다.
“이이고, 대체 뉘신데… 가만 백곡 선생의 아버지라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남봉(김치, 1577~1625) 선생?”
“그렇다. 나는 죽어서 명부를 다스리는 염라대왕이 되었느니라.”
염라대왕(영화 〔신과함께-인과연〕, 2018)
정생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유별한 법인데, 어찌 함부로 산 자를 데려와 징치코자 하십니까?”
“하하, 이놈 봐라, 제법 담이 크구나.”
“제가 돌아가면 다산 선생이 미처 계산을 다 하지 못하였다고 널리 알리도록 하겠으니 부디 속히 이승으로 돌려보내주시옵소서.”
“흠, 약조하겠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해줘야 할 일 하나를 주겠노라.”
“하명하십시오.”
염라대왕 김치가 뭐라 말을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진지… 진지…”
“크게 말씀해주십시오!”
“진지 드시죠! 훈장 어르신!”
그 말에 벌떡 일어나니, 접장이 개다리소반에 매운탕과 백반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정생이 황급히 베고 자던 책을 들어보니, 『계서야담』 3권이 아닌가. 이 책에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가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어서 그런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런데 개다리소반을 받아들려는데 왼쪽 어깨가 욱신거려서 팔을 들어올리기가 어려웠다. 급히 두루마기와 윗도리를 젖혀보니 매를 맞은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었다.
이후로 정생은 다시는 책을 베개 삼아 잠들지 않게 되었다. 물론 서산은 여전히 접히는 일이 없었고 독서일기를 쓰는 일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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