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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속 고양이, 새로운 옷을 입다

임금님도 고양이 앞에선 한낱 집사일 뿐


고양이는 개와 함께 대표적인 반려동물로 오래전부터 사람과 함께 생활해 왔다. 1인 가구의 증가, 저출산·고령화, 코로나19 팬데믹 등 사회구조와 환경의 변화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더불어 반려동물 관련 산업(petconomy)이 크게 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반려동물 가구 증가, 유통가 “펫팸족 잡아라”(출처: 부산MBC, 유튜브)더보기

반려동물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지금의 반려동물의 개념과는 다른 ‘애완동물’의 수준이었을 것으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에서도 애완동물이 길러졌다. 성종, 숙종, 숙명공주와 폭군 연산군까지 개와 고양이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임금님의 애완동물의 종류도 다양하였고 심지어 코끼리를 길렀다는 태종의 이야기도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조선의 임금님 중 가장 유별난 동물 사랑을 보여준 성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종은 동물을 좋아하였으며 그 종류도 가리지 않았으며 원숭이, 앵무새, 백조, 공작, 노루 사슴 개,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많은 동물들을 궁궐에서 길렀다고 한다.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숙종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금묘’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숙종이 직접 먹이를 먹이며 식사도 함께하였다고 한다. 정사를 돌볼 때도 품에서 놓지 않아 후궁들이 질투할 정도로 금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다. 금묘는 숙종이 승하하자 먹이를 먹지 않고 13일 만에 죽게 되어 숙종의 묘 옆에 비단옷을 입혀 묻어주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민화 속 고양이


민화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염원을 담고 있는 대중적 예술로 우리 민족의 감성이 잘 표현 된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유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민화를 속화(俗畫)로 기록하고 있다. 서민의 감성을 담고 있는 민간 회화는 문인들의 전통 산수화와 다르게 평가절하 되었던 것이다. 민화라는 용어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가 값싸게 판매되는 ‘오오츠에’를 지칭하며, ‘불가사의한 조선의 민화’라는 글에서 처음 명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민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벽화로부터 시작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민화적으로 표현된 그림이 있었으나 지금은 불화(佛畫)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을 뿐 오늘날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현대에 전해지는 민화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다. 민화는 평민에서 왕족까지 민속적인 관습과 생활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실용화로 번성하였다. 그림은 병풍이나 족자로 제작되어 서당, 사찰 등에 걸렸으며 혼례식 같은 의례 때도 쓰였다. 민중의 생활철학, 감정, 미의식 등이 지배계급인 사대부에 의해 표출되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계급사회 붕괴, 실학사상의 융성과 경제 발전, 현실 위주의 의식전환 등을 통해 전통적인 미의식이 민화로 표출되었다. 현세의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고 종교의 간접적 표현까지 담아내며 민중의 생활을 밀접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시대 민화 속 고양이는 고양이를 한자로 표기한 묘(猫)가 70세 노인을 뜻하는 ‘모’와 음이 비슷하여 장수를 의미하는 화재(畫材)로 선호되었으며, 수호신을 상징하여 벽사(辟邪)와 장수의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양이만을 단독으로 그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다른 화재와 함께 그렸다. 고양이와 함께 그린 화재는 꽃, 새, 나무. 벌레, 개 등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로 참새, 까치 등 새와 함께 그린 고양이 민화 〈묘작도(喵雀圖)〉가 있다. 묘작도는 변상벽(卞相璧)의 대표 작품으로 나무 위로 오른 고양이에 놀란 참새의 모습이 생동감 넘치고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작은 참새는 한자로 작(雀), 발음이 벼슬을 뜻하는 작(爵)과 같아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있으라는 뜻으로 참새와 고양이를 함께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변상벽의 〈묘작도(猫雀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조선 시대 민화 속 고양이는 꽃, 나비, 풀벌레, 꿀벌과 함께 그려진 작품들이 많다. 18세기에 활약한 변상벽은 화원(畵院)의 화가로 인물과 동물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닭과 고양이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대표적인 고양이 그림에는 〈국정추묘도(菊庭秋猫圖)〉, 〈묘접도(猫蝶圖)〉, 〈화조영모어해도(花鳥翎毛魚蟹圖)〉 등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황묘농접도(黃廟弄蝶圖)〉는 패랭이꽃, 노란 고양이와 긴꼬리 제비나비를 함께 그려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고양이는 70세 노인을, 나비는 80세 노인을 상징하며 패랭이꽃은 청춘을, 바위는 불멸을 나타낸다. 장승업의 〈화조영모어해도〉의 고목, 장미, 꿀벌과 함께 반백·반흑의 고양이는 장춘백두(長春白頭)를 나타내며 부모님의 부귀장춘(富貴長春)과 사계평안(四季平安)을 빌고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어해도(花鳥翎毛魚蟹圖)〉(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반백·반흑의 고양이(오늘날 턱시도 고양이)




민화 속 고양이, K-Culture로의 재탄생


조선 시대의 고양이 민화는 종종 문화상품을 제작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작한 ‘오묘한 녀석들’이 있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지운의 〈유하묘도(柳下猫圖)〉를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에서 문화상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유하묘도〉는 버드나무 아래에 다섯 마리의 고양이와 기쁨을 뜻하는 까치를 함께 그려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으로 많이 알려진 친숙한 민화이다. 원작의 전통적인 색감을 최대한 유지한 고양이 그림을 프린트하여 만든 티셔츠와 문구류 상품이 대표적이며, 고양이를 만들어 보는 종이접기 DIY 상품과 퍼즐도 판매되고 있다. 김홍도의 〈황묘농접도〉와 변상벽의 〈묘작도〉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현대적인 컬러로 재현한 엽서도 있다. 민화를 통해 가족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염원을 담은 캘리그래피와 함께 봄날의 아련한 느낌으로 제작한 엽서가 문화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오묘한 녀석들 아동용 티셔츠〉(출처: 국립박물관재단)


〈유하묘도 데코 스티커〉(출처: 국립박물관 뮤지엄샵)



필자도 조선 시대 고양이 민화 중 조지운의 〈유하묘도〉의 고양이를 활용한 다양한 패션제품을 만들 수 있는 텍스타일 디자인을 시도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고양이 민화는 한두 마리의 고양이를 새, 꽃, 나무 등과 함께 그렸으나, 〈유하묘도〉에서는 무늬와 색이 다른 다섯 마리 고양이를 다양한 모습으로 화폭에 담고 있다. 다른 민화 작품보다 고양이의 캐릭터를 추출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선택하였다.

민화 속 다섯 마리의 고양이를 각각 4가지 캐릭터로 디자인하였고 전통적인 고양이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얼굴 표정과 외곽선은 원본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20가지의 고양이 캐릭터를 혼합하여 다시 텍스타일에 적합한 모티브로 디자인하였다. 명쾌한 느낌이 들도록 채도와 명도가 높은 색을 사용하고 전통적인 고양이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오방색으로 채색하여 전통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표1. 민화 속 고양이 캐릭터 디자인 과정



캐릭터는 단독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서로 조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캐릭터들을 반복·혼합하여 다양한 모티브를 만들 수 있다. 20가지의 캐릭터를 조합하여 누구나 독창적인 모티브를 만들 수 있도록 제안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모티브는 간단하게 반복·배열하여 다양한 텍스타일로 추가 개발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 한 것이다.

특히 고양이 캐릭터는 현대적인 동물 캐릭터 디자인과는 시각적으로 차별화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전통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한국적인 고양이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하여 아래와 같이 실용적이고 독창적인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제안해 본다.


표2. 텍스타일 디자인 개발 과정


고양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캐릭터화되어 오래전부터 활용되고 있다. 일본에는 행운을 부르는 유명한 고양이 ‘마네키네코’가 있으며, 대만에는 고양이 마을로 유명한 관광지인 ‘허우통(侯硐)’이 있다. 고양시는 마스코트로 고양이 캐릭터 ‘고양고양이’를 제작하고, 홍보 활동과 SNS 소통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관광기념상품 제작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전통과 연결된 동물 캐릭터의 활용도는 낮다.


고양시청 캐릭터 〈고양고양이〉(출처: 고양시청)



민화 속 고양이와 활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였으나 이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예술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문화재와 미술작품을 활용하여 상품화한다면 관련 시장을 국내·외로 확장하고 K-Culture의 전통성과 독창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해 본다.




집필자 소개

장소영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의상디자인과 의상학을 전공하여 이학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호남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상품화 하는 연구를 하고 있으며, 관련 연구로는 「디지털 날염을 이용한 문화상품」, 「전통 꽃문양을 응용한 패션문화상품 디자인 개발」, 「민화 속 고양이를 활용한 텍스타일 디자인 개발」 등이 있다.
“물고기잡이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01 ~

1597년 4월 1일, 낮에 후전리에 사는 별감 김린, 교생 허충, 김애일 등이 오희문을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동쪽 큰 언덕에 올라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 주인인 시중이 국수를 만들어 찾아왔다. 언덕 위 공터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국수를 먹는데, 큰 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깊은 못을 만들어 놓아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의 북쪽은 낭떠러지 절벽이 둘러쳐 있었는데, 이것이 한바퀴 빙 둘러서 반대편에 이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생긴 것이 마치 누각의 머리같이 생겼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낭떠러지라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물결도 잔잔하여 티 하나 없이 맑은데다가, 햇볕도 내려 비치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물도 맑았다. 무리지어 노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다가, 옆에 따라온 아이에게 그물을 쳐서 몰게 하였는데, 몰기가 무섭게 물고기들이 번득거리고 엎어지는 것이 볼만하였다. 간단히 그물질을 하였는데도 60여 마리나 잡아 올리고, 또 낚시대를 가지고 오게 하여 낚으니 이번에도 40여 마리가 잡혔다.

잡은 생선 중 큰 놈을 골라 뼈를 발라내어 말려 놓고, 남은 잔 생선으로 탕을 만들어 밥과 함께 먹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는 것이 몹시 유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아까 잡아 말려놓은 큰 생선이 반이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서편에 사는 강아지놈이 사람들이 부산한 틈을 타서 반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아지가 몹시도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뛰어난 경치와 흥겨운 물고기 잡이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동고동락한 개 이야기”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919년 8월 22일. 장석영은 어제 항소심에서 극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이곳 대구에서 성주까지는 하룻길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집으로 가기로 하고 하루를 묵었다. 밤에 창을 열고 지난 몇 개월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떤 짐승이 창 앞에 마주하여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쫓아도 일어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거기에 있길래 다시 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석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개는 일본인의 개인데 집을 떠나 얼마간 있다가, 댁의 아드님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짓고 음식을 마련하여 밥그릇을 받들어 감옥으로 가기 전에 이 문을 나서면 곧바로 아드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일찍이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감옥 문 앞에 이르러 아드님이 문밖에 서서 밥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 이 개도 그 곁을 지키면서 머물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밥그릇이 나와서 아드님이 돌아오면 개도 따라서 돌아왔다가 이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떠났습니다. 하루가 일상이 되어 출옥하는 날에도 여기 와서 지키며 몰아내도 가지 않는 것은, 필시 아드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장석영 역시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혹 사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일본인이 개를 팔 리도 없지만, 판다고 하여도 값을 많이 부를 것이라 만류하였다.

결국 장석영은 개를 사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아들에게 떠날 때 강아지를 쓰다듬고 따뜻하게 작별의 정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준 감정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강아지를 사서 함께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또한 강아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아들의 효성을 전해 듣게 된 장석영은 한 번 더 감동을 자아내는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골린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하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닭의 발톱에 얼굴을 다쳐 숙모의 상여도 따라가지 못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2-10-16 ~ 1922-10-19

1922년 10월 16일, 남붕은 숙모의 장례가 내일 있어서, 종일 조문객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남붕의 집에서 기르는 닭을 도둑고양이가 물어가는 일이 있었다. 남붕은 놀라 흩어진 남은 닭들을 잡아다가 닭 둥지 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닭을 살펴보려고 둥지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며 남붕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닭의 발톱이 남붕의 눈 아랫부분을 할퀸 것이다.

남붕은 상처가 바람을 맞으면 부스럼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약을 바르고 나가는 일을 삼갔다. 다음날 새벽에 영구를 마을 밖으로 전송하였는데 하필이면 바람이 거세 얼굴에 바람을 맞을까봐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숙모와 조카의 심정과 처지에 있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저물 때에, 윤초(允初) 아재의 모친 장사가 내일 있기 때문에 곡을 하러 가야 했는데, 상처 때문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다녀왔다.

10월 19일에는 숙모의 빈소에 가서 재우(再虞)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굴이 상처로 부어서 상여를 따라가지는 못 하였다.

“소를 가둔 죄로 파직당한 나무송(羅茂松)의 이야기”

김령, 계암일록, 1631-08-30 ~

1631년 8월 30일, 날씨는 종일 맑다가 흐리기를 반복하고, 늦가을 동풍이 몹시 쌀쌀하였다. 저녁 무렵 김령은 전에 예안 현감이었던 담양에 사는 나무송(羅茂松)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그가 파직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 봄 2월 무렵 김시익의 여자 종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소를 훔친 일이 있었다. 본래 흰 점을 가진 소였는데, 소를 훔친 자는 이후 일이 들킬까 염려하여 소의 흰 점을 검게 물들였다. 김시익의 또 다른 종 논복이란 놈도 소를 훔친 자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소가 새로 생긴 것을 관아에 고하고 입안(立案)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듣고 난 후 당시 예안 현감이었던 나무송은 곧 소를 데려다가 물로 씻어보도록 명령하였다. 과연 소 주인의 말대로 검은 부분이 물에 씻기자 곧 흰빛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를 옥에 가둔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형을 가하여 심문하였다. 또 장물인 소도 관아에 가두었다가 곧바로 소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현감의 처사에 매우 감사해하고 소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무송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사헌부 관원이 나무송이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죄로 삼은 것이다. 억울한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준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 분명한데,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나무송의 허물이라고 윽박지르니 나무송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로 나무송이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소 한 마리를 잠시 가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무송은 아직도 그때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듯하였다. 현명한 송사로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고도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니, 김령은 진심으로 나무송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소를 가둔 것을 문제 삼아 현감을 파직시킬 기발한 생각은 대체 누가 했는지, 그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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