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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말을 해, 정혜야!

홍윤정


한 여자가 소파에 누워 있다. 일요일 오후, TV 홈쇼핑채널에선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지만 여자는 그 소란 속에서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있다. 여자의 잠은 잠이라기보다 잠깐 동안의 죽음과도 같다. 잠에서 깬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먹을 최소한의 식사를 준비한 뒤 또 다시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표정 없이 입 속으로 음식을 집어넣는다.

월요일이 되면 그녀는 출근을 한다. 우편 취급소에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우편물의 중량을 달고 소인을 찍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점심시간, 그녀는 익숙한 동료와 늘 가는 밥집을 간다. 웃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몇 마디 말로 오후를 보내고 퇴근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또 다시 소란스러운 홈쇼핑 채널을 켜놓고 소파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한다.

그녀도 한때는 결혼했었다. 하지만 첫날밤을 지낸 이후 신혼여행지에 남편만 놔두고 도망쳐 와버렸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왜 늘 가면을 쓴 사람처럼 덤덤한 표정인지 영화는 시원스레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후반부에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할 뿐이다.

그녀, 정혜는 가방 속에 등산용 칼을 숨기고 누군가를 찾아간다. 점잖은 인상의 고모부다. 정혜는 그와 같은 벤치에 앉는다. 고모부는 정혜에게 뭔가 이야기를 꺼낼 듯 했다가 말아버린다. 정혜가 일어서서 고모부 뒤로 간다. 그녀는 칼을 꺼낼까 말까 망설인다. 하지만 끝내 꺼내지 못하고 돌아서서 뛰어온다. 넘어진 그녀의 가방에서 칼이 떨어지고, 떨어진 칼을 집으려다 제 손을 다친다.


영화 <여자, 정혜 /> 영화포스터 ⓒ영화<여자, 정혜> 홍보사진 캡쳐영화 <여자, 정혜> 영화포스터 ⓒ영화<여자, 정혜> 홍보사진


2005년에 개봉된 영화 <여자 정혜>의 주인공 정혜는 어릴 적 고모부로부터 당한 성폭행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 인물이다. 십수 년이 지났건만 정혜에게 일상의 인간관계도, 결혼생활도, 심지어 고양이를 키우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고모부는 구의원에 출마하고, 여가엔 축구로 건강을 다지며 잘만 살아간다.

며칠 전 ‘미투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윤택이 검찰에 출두했다. 피해자들에 대해 묻는 질문에 여전히 ‘기억이 잘 안 난다.’라거나, 어이없다는 듯 웃는 표정을 보여 또 다시 여론의 분노를 샀는데, 나는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그의 말이 얼마간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표현처럼 너무나 오랫동안 ‘관행’처럼 행해져 온 일이라 셀 수도 없이 많아서이거나, 한 분야의 소위 거장으로 칭송되어 오는 동안 상대방의 감정 따위 상관없다는 교만함으로 무장되었거나, 상대방의 기분 또한 나처럼 좋을 것이라는 생뚱맞은 나르시시즘, 혹은 다른 누군가의 표현대로 ‘괘념치 않아도 되는’ 하찮은 일상이어서 거나..... 그 어떤 경우라도 내 앞에 있는 상대방, 혹은 여성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나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만은 자명하다.

굳이 이윤택을 예로 든 이유는,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가 동명의 그의 연극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본도 그가 썼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1988년 9월 22일 ‘변월수 사건’ 관련 한겨레신문 보도1988년 9월 22일 ‘변월수 사건’ 관련 한겨레신문 보도


1998년 2월 당시 서른 두 살의 가정주부 변월수는 집으로 가던 도중, 두 명의 치한과 맞닥뜨렸다.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는 그들에게 저항하던 중 그녀는 입 속에 들어온 한 남자의 혀를 깨물었고, 그의 혀는 절단되었다.

그런데 검사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기소했다. 가해자 남자가 변월수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변월수가 과잉방어를 했다며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여성운동단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정당방위로서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며 변월수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혀가 잘린 가해자 측 변호인은 변월수가 사건 당일 먹은 술의 양, 동서와의 불화 등을 계속 거론하면서 그녀를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로 몰아세웠다. 변월수를 '과잉방어'로 기소한 검사는 폭행 당시 행위의 순서가 진술 때마다 바뀐다며 호통을 치는 등 피해자를 가해자로 취급하는 성폭력 재판과정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모습은 영화에서 검사로 분한 이경영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자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법에 대한 반발여론이 들끓었고, 그녀의 남편도 법원의 판결에 분노해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돌렸다.

이때의 변월수의 심경은 영화에서 원미경의 대사로 표현된다.

“재판장님, 만일 또 다시 이런 사건이 제게 닥친다면 순순히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들한테 말하겠습니다. 반항하는 것은 안된다고. 얘기하는 것도 안 된다고. 재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입니다.”

분노한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사법부는 2심에서 결국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이 사건은 입을 벌려 자신의 말을 한 피해자를 향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여기 비슷하나 또 다른 재판이 있다.

1790년 5월, 전라남도 강진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안소사라 불리던 노파로, 스무 군데 이상 칼로 난자되어 죽어있었던 것이다. 가해자는 김은애라는 열여덟 살, 양반가의 기혼여성이었다. 김은애는 자신의 죄를 순순히 자백했는데, 잘못했다는 반성은커녕, 시종일관 의로운 일을 행한 듯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건의 발단은 이랬다. 평소에도 언행이 거칠었던 안소사는, 자신의 조카손주 최정련이 김은애를 짝사랑하자, 김은애와 최정련을 연결시켜주겠다며 그들 사이에 모종의 깊은 관계가 있다는 헛소문을 온 마을에 퍼뜨리고 다녔다. 평소 안소사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인지 소문에도 불구하고 김은애는 한 선비와 무탈하게 결혼했다. 그러나 안소사의 입은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층 더 심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2년을 참던 김은애는 결국 칼을 들고 안소사를 찾아갔던 것. 김은애는 최정련까지 죽이려 했지만 친정어머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현감 뿐 아니라 관찰사까지 달려들어 아홉 차례에 걸쳐 김은애를 조사했다. 사건이 워낙 위중하다보니 형조가 나섰고, 결국 정조임금에게까지 올라갔다. 살인은 참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국법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김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은애란 자는 18세를 넘지 않은 여자이다. 안소사라는 여인은 그런 그녀가 겁탈당했다는 헛된 말을 지어내 그 추잡한 입을 놀렸다. 시집을 가기 전이라 해도 목숨을 걸고 진위를 밝혀 깨끗한 몸이 되기를 원할 것인데 더구나 새 인연으로 혼례를 치르자마자 비방이 난무하니, 그 원한 오죽 하겠는가. 그리하여 원통함과 울분이 복받쳐 한번 죽는 것으로 결판을 내려고 한 것이다. (중략) .... 이는 실로 피 끓는 남자라도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고, 또 편협한 성질을 가진 연약한 여자가 그 억울함을 숨기고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목매어죽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은애의 행동을 자세히 적어 도내에 반포하여 풍속 교화의 수단으로 삼으라고까지 지시했으니, 변월수가 들었다면 차라리 조선시대에 재판을 받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애 사건은 ‘말하지 못함’이 불러온 비극적 결과다. 억울함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그 침묵은 용암덩어리가 되어 온 몸을 휘젓기 시작한다. 차갑고 무기력해 보이던 휴화산은 어느 날 갑자기 활화산이 되어 터져 나온다.

‘건강한 젊은 남자 2명이 인적이 드문 심야에 혼자 귀가 중이던 가정주부에게 뒤에서 달려들어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 담벽에 쓰러뜨린 후 음부를 만지고 반항하는 그녀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차는 등의 폭행을 가하면서 키스를 하려고 하자 양팔이 붙잡힌 상태에서 발버둥을 치면서 가정주부로서의 정조와 신체의 안전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엉겁결에 추행자의 혀를 물어뜯게 되었다면, 이는 자신의 성적순결 및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로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정조 14년(1790년 8월 10일) ‘은애 사건’ 관련 기록정조 14년(1790년 8월 10일) ‘은애 사건’ 관련 기록


변월수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한 2심의 판결요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팔이 붙잡힌 상태’다. 만약 왼팔이라도 잡혀있지 않았다면, 혀를 깨문 그녀의 행동은 끝내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하는 ‘과잉방어’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정혜들에게 물어보라. ‘왜 말하지 못하였냐.’고. 아마 그들은 말했다고 답할 것이다. 수많은 침묵과 눈빛과 망설임과 한숨으로 대답했다고. 만약 그 자리에서 ‘no’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한 순간에 과잉방어로 둔갑되어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나 역시 30대 때 드라마 기획을 핑계로 만난 모 피디가 회의 중간 중간 ‘손 좀 잡아보자’ ‘당신이 마음에 들어 이러다 선을 넘을 것 같다.’는 둥 온갖 성희롱적 언사를 해대는데도, ‘저렇게 농반진반 던지는 말에 정색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겠지, 사회생활 모르는 소견 좁은 여자라고 하겠지.’하는 두려움으로 연신 참고 넘어가다, 결국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일을 그만두었던 경험이 있다. 대체 그만 두는 마당에 따귀는 고사하고 왜 바른 말 한번 못 했던 건가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말을 했어야 한다. 들어주는 이가 없더라도.

속 좁고 이상한 여자가 되더라도 말했어야 했다. 그래야 우후죽순 탄생하는 정혜들을 줄일 수 있었는데.

그러니 이제라도 입을 여는 정혜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기 바란다. 모른 체 하면 큰일 난다. 오늘은 정혜가 돌아서서 뛰어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칼을 들고 다시 고모부를 찾으러 갈지 모른다. 오늘은 정혜였다가, 내일은 김은애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다.




작가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퇴계의 시에서 청량산을 읽다”

김몽화, 유청량산서(遊淸凉山序)

청량산은 예안(禮安)의 동북 지역에 우뚝 솟아 있는데,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께서 왕래하며 그 가운데서 쉬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절 안과 문밖에 유람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니 어찌 (퇴계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을 사모함은 사람마다 똑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고금의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숨겨진 곳을 찾아 끝까지 탐색하고 빼어난 경치를 그윽이 감상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지만, 누가 등산의 묘한 맛은 눈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노선생께서는 산수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인지(仁智)의 취미를 드러내셨다.
그전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妙意祇難言(묘의기난언) 기묘한 뜻을 말하기 어려우나
佳處每獨領(가처매독령) 아름다운 곳은 매양 홀로 도맡았네.

라고 하셨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청량산 등반가, 17년 동안 13회 오르다”

금란수, 보현암벽상서전후입산기

청량산(淸凉山)은 산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나귀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경우나 질박한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머무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산과는 매우 다르다.
금난수는 정미년(1547년, 명종 2년) 봄에 이 산을 두루 거치며 들어가 본 뒤에야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기유년(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이비원(李庇遠), 이임중(李任仲)과 함께 산에 들어가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다. 구경서(具景瑞), 윤이직(尹而直), 권자반(權子胖), 김대보(金大寶)가 이미 이 암자에 우거하고 있어서 날마다 구경서 등 여러 사람과 서로 모여서 독서한 것을 강론하였다.
경술년(1550년, 명종 5년) 봄에 또 이 암자에 묵었다.
신해년(1551년, 명종 6년) 음력 7월에 또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는데, 퇴계(退溪) 선생께서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주셨다.
임자년(1552년, 명종 7년) 여름 6월에 산에 들어가 홀로 안중암(安中庵)에서 한 달을 머물고는 만월암(滿月庵)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한 달 쯤 지나 안중암으로 돌아왔다.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09-02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열두 봉우리 이름, 주세붕 선생이 짓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년 9월 1일, 청량산 유람을 떠난 김득연 일행이 드디어 동문(洞門)에 들어갔다. 옛 성이 있는데, 들쭉날쭉 나 있는 나무들 속에 깊숙이 숨어 있기에, 승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 공민왕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 터무니없는 전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전쟁이 요란하던 날 어지러운 병사들에게 쫓기던 임금이 한 모퉁이에서 아침저녁을 구차하게 살아 있던 것을 생각해보니, 한 거친 성가퀴가 만고에 근심을 머금었으나, 지난 일이 황당무계하여 논할 수 없다. 낙수대(落水臺)를 지나니, 냇물이 돌에 흐르는 소리가 옥 소리처럼 영롱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골짜기가 고요하고 숲이 우거져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이 쌓이고 모여 있었다. 한 승려가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이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옛날 한 승려가 연대사(蓮臺寺)를 창건하려고 뿔 셋 달린 소로 변하여 재물을 나르고 일을 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다가 하루 만에 죽어 구덩이를 파 매장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득연이 말하기를, “신령함을 받고서 인간이 되었으니, 반드시 소로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는 눈으로 그 사실을 보았는가?” 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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