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리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 중산층의 기준을 비교하며,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왜 선진국인지에 대해 논하는 말들이 많았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2000cc 급 중형차 소유, 예금 잔액 1억원 이상, 1년에 한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것’
이것이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 다섯 가지인 한편, ‘페어플레이를 할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당당히 대응할 것’ 등을 말하는 영국의 중산층 기준이나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같은 미국의 기준은, 우리 한국이 정말 물신숭배의 나라인가 하는 자괴감을 들게 하는 건 사실이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이다. 사실 좀 불공평한 감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직장인 대상 설문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고, 다른 나라의 기준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프랑스의 경우 조르주퐁피드 전 대통령이 삶의 질 향상 공약으로 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 몇 가지를 보자.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것, 자녀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립시킬 것, 주급을 절약해 매주 이틀간 검소하게 즐길 수 있을 것’ 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기 집 나름의 전승요리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항목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기준이 결코 ‘미식의 나라다운 별난 취향’만은 아니다.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만찬 석상에 360년 된 씨간장으로 양념한 한우갈비구이가 올라 화제가 되었다. 이에 관한 기사에는 ‘우리나라엔 신선한 간장은 없는 거야?’ ‘좀비 간장이네’ 등의 유머인지 비난인지 헷갈리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 갈비구이의 맛을 궁금해 했다.
사용된 씨간장은 담양의 한 전통식품 명인이 만든 것으로, 150미터 지하에서 퍼올린 맑고 깨끗한 물과 직접 구운 담양의 죽염으로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지금은 명인의 솜씨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일찍이 양반 집안에서는 자신들만의 씨간장, 씨된장, 가양주 등을 자랑거리로 삼는 일이 적지 않았다. 뼈대 있는 집안의 종부라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드는 음식 몇 가지는 기본으로 할 수 있어야 했고, 재령 이씨 가문의 <음식디미방>처럼 이를 꼼꼼히 기록해 후대에 전하기도 했다.
2016년 방송된 드라마 <내일도 승리>에서는, 주인공이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씨간장으로 장아찌를 담가 투자자를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투자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왕실에서도 간장 종가의 깊은 역사를 인정하는 친서를 보내옴으로써 수세에 몰리던 주인공이 시원한 반격에 성공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MBC 일일드라마 ‘내일도 승리’에서 한승리(전소민 분)가 아빠와 함께 심었던 나무 아래서
씨간장을 발견하는 장면. (출처 : 드라마 [내일도 승리] 화면 캡쳐)
그 이전, 2014년의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에서도 ‘씨간장’이 등장한다. ‘황소간장’이라는 식품기업을 배경으로,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난 며느리, 그리고 그녀의 딸, 며느리의 자리를 가로챈 얄미운 친구와 그녀의 아들이 라이벌이 되어 기업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뻔한 스토리지만, 배경이 간장 전문 식품회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마지막의 후계자 대결은 ‘어간장(생선을 이용해 1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과 ‘씨간장’의 대결로 요약되는데, 남장을 한 채 동분서주하던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물론이다.
SBS 일일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 28회에서 장하나(박한별 분)와 장라공(김주영 분)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결을 시작하는 장면(좌). 122회 마지막회에서 ‘황소간장’의 후계자가 된 장하나(박한별 분)(우).
(출처 :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 화면 캡쳐)
위의 예처럼, 현대물에서 옛 전통의 맛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스토리는 꽤 발견되는데, 막상 대부분의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식은 배경, 소품 정도에 그친다. <대장금>이나 현재 제작 중인 <도문대작>처럼, 음식 그 자체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는 작품은 흔치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고증 때문이 아닐까.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제작 단계에서 전문가에게 음식에 대한 고증을 받더라도 막상 작품이 나오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있는 게 사극의 운명(?)이다. 같은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부디 바라기는, 앞으로 사극에 나오는 건축, 배경, 의상, 언어, 음식과 소품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애정으로 보아주고 조언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야 대중문화인들이 위축되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담아내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약간 옆으로 샌 느낌이 들지만, 사극을 쓰면서 짧은 지식의 한계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해하리라 믿는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음식 코디네이터의 피 땀 어린 노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들이 발견되곤 한다.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식은 단순히 음식만이 아닌, 씬스틸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 나오는 음식이 그렇다. 극 초반 타이틀이 등장한 바로 다음, 인물들의 대화가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는 전골냄비에서 전골을 한 그릇 떠서 상으로 가져가는 장면을 위에서 비춘다. 상 위의 음식은 정갈하고 절제되어 있으나, 전골냄비 속 고기와 생선, 오색 야채는 진득하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해후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내의 정부인 친척남자 세 사람이 상차림을 앞에 두고 하는 이야기는, 남편이 새로 들일 첩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쾌락과 본능을 깔끔한 예의와 격식 속에 감춘 모습이 그들의 상차림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음식소품은 음식전문가이자 프로덕션디자이너의 정구호가 맡았다. 영화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음식을 직접 만들었으며, 기생집에 임금님 수랏상처럼 음식이 차려지고 제기를 사용하는 오류를 바로 잡고 백자기, 놋그릇, 9첩 반상, 개다리소반 등을 정확한 크기와 상차림으로 연출했다. (출처 : [씨네 21] 2003.09)
영화 <방자전>에는 물가로 놀러간 춘향과 이몽룡을 위해 방자가 고기를 굽는 장면이 등장한다. 방자 옆에 앉은 향단은 멀리 서있는 춘향과 몽룡을 바라보며, “양반들은 꼬실 때 무슨 얘기를 할까, 지들도 우리랑 똑같겠지? 그나저나 이(고기 굽는) 냄새에 군침도 안 도나?” 하면서 구워진 고기를 낼름 주워먹는다. 방자가 향단을 탓하며 “양반이 우리랑 같냐? 양반은 마음을 안 드러내고 감추는 거야. 고기가 먹고 싶어도 안 먹고 싶은 척. 그래야 양반이지.” 답하는데, 마침 그들에게 춘향과 몽룡이 다가온다. 춘향은 방자에게 “자네는 어찌 그리 고기를 잘 굽나. 지난번 싸울 때 보니 힘이 장사던데, 고기 구울 땐 한정 없이 섬세하고....” 하며 호감을 드러낸다. 옆에 있는 몽룡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당연지사다.
이 역시 음식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나 같은 관객은, ‘저 때도 물가에서 고기를 구워먹었구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 같은데... 맛있겠다.’ 하며 군침을 삼키니, 이래저래 명장면이다.
그런데 방자의 말과는 달리, 정약용이 묘사한 양반들의 고기 구워먹는 모습은 마음을 숨기긴 커녕, 사뭇 게걸스럽기까지 하다.
해진 갖옷 소매 걷고 화롯가에 다가앉아 弊貂선袖進爐頭
가난한 선비가 덩실덩실 자득한 때로세. 寒士沾沾得意秋
꾸륵꾸륵 소리 내니 누가 욕하지 않으랴 慢作蚓鳴誰不罵
성낸 듯 눈 튀어나와도 걱정할 건 없다오. 怒如魚眼卽無愁
이 시는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겨울 날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 모습을 「한방소육도(寒房燒肉圖)」라는 그림에 부친 시다. 그림은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가난한 양반들이 모여앉아 쩝쩝 소리 내고, 눈을 부라리며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화로에 고기를 구워먹는 것을 ‘난로회’라 불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이 풍속은 조선 후기에 급속도로 퍼져, 심지어 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고기를 구워먹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요즘,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먹고 감탄한다는 ‘코리안 바비큐’의 전통이 유구한 건 분명하다.
숯불을 피운 화로 곁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영화 <광해>에 등장하는 음식은 왕과 백성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왕이지만 왕이 아닌 광대, 가짜 광해가 처음 접하는 수랏상의 음식들이, 사실은 왕 혼자서 먹는 게 아니라 남겨서 나인들의 ‘밥’으로 삼는 것임을 알게 되는 장면과, 때문에 다음번 수랏상에서 어린 기미나인이 가져다 준 팥죽만 먹고 나머지 밥상을 그대로 내가라고 하는 광해의 모습 때문이다.
요즘 ‘혼밥’이 화제다. 1인가구가 늘어나다보니, 자연히 혼밥족을 겨냥한 간편식과 도시락이 유행이 되고, 식당에서도 혼밥족을 위한 자리를 따로 배치할 정도다. 그러나 오래도록 혼밥을 해온 사람들은 안다. 혼자 먹는 밥이 얼마나 맛없는지를. 작은 것이라도 나눠먹어야 더 맛나다. 왕과 양반들의 밥상이 아무리 산해진미로 채워진다 해도 함께 즐길 이가 없다면 먹는 시간이 기다려질 리 만무. 왕이 된 광대 광해가, 처음엔 혼자 먹을 것을 탐하다, 후엔 백성과 더불어 먹는 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은, 개망나니였던 그가 진정한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춰가고 있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함께 먹는 눈물의 음식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가 <명량>이다. 1,7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명량에서 이순신으로 분한 최민식의 연기도 좋았지만, 배우 박보검이 맡은 ‘토란소년’ 수봉 역할이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았다. 극 중 수봉은 왜군에 희생당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거북선에 탑승한 격군으로,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피투성이가 된 이순신에게 삶은 토란을 내민다. 토란은 백성들의 허기를 채워준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그 곳의 특산물이기도 했다.
영화[명량]에서 수봉(박보검 분)이 이순신(최민식 분)에게 건넨 토란 장면 (출처: 영화[명량] 캡쳐)
"이거 토란 아니냐! 먹을 수 있으니 참 좋구나."
수봉이 준 토란을 한 입 베어 물며 이순신이 말한다. 토란은 수봉이 이순신에게 올리는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상징물인 동시에, 이순신에게는 승리를 넘어 ‘삶’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감동의 산물이자, 살아있어 누릴 수 있는 궁극의 사치였을지 모른다.
‘도락’의 원래 뜻은 단순한 취미나 재미가 아닌, 도를 닦은 뒤 느끼는 깨달음의 기쁨을 말한다. 흔하고 얄팍해져버린 ‘식도락’의 세상에, 혀를 넘어 마음까지 짜르르 전율하게 만드는 감동, 이순신과 수봉이 생사를 건너 함께 나눈 토란 한 알에서 느끼는 진정한 식도락의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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