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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수랏상과 토란 한 알

홍윤정


몇 년 전, 우리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 중산층의 기준을 비교하며,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왜 선진국인지에 대해 논하는 말들이 많았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2000cc 급 중형차 소유, 예금 잔액 1억원 이상, 1년에 한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것’

이것이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 다섯 가지인 한편, ‘페어플레이를 할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당당히 대응할 것’ 등을 말하는 영국의 중산층 기준이나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같은 미국의 기준은, 우리 한국이 정말 물신숭배의 나라인가 하는 자괴감을 들게 하는 건 사실이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이다. 사실 좀 불공평한 감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직장인 대상 설문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고, 다른 나라의 기준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프랑스의 경우 조르주퐁피드 전 대통령이 삶의 질 향상 공약으로 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 몇 가지를 보자.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것, 자녀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립시킬 것, 주급을 절약해 매주 이틀간 검소하게 즐길 수 있을 것’ 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기 집 나름의 전승요리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항목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기준이 결코 ‘미식의 나라다운 별난 취향’만은 아니다.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만찬 석상에 360년 된 씨간장으로 양념한 한우갈비구이가 올라 화제가 되었다. 이에 관한 기사에는 ‘우리나라엔 신선한 간장은 없는 거야?’ ‘좀비 간장이네’ 등의 유머인지 비난인지 헷갈리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 갈비구이의 맛을 궁금해 했다.

사용된 씨간장은 담양의 한 전통식품 명인이 만든 것으로, 150미터 지하에서 퍼올린 맑고 깨끗한 물과 직접 구운 담양의 죽염으로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지금은 명인의 솜씨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일찍이 양반 집안에서는 자신들만의 씨간장, 씨된장, 가양주 등을 자랑거리로 삼는 일이 적지 않았다. 뼈대 있는 집안의 종부라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드는 음식 몇 가지는 기본으로 할 수 있어야 했고, 재령 이씨 가문의 <음식디미방>처럼 이를 꼼꼼히 기록해 후대에 전하기도 했다.

2016년 방송된 드라마 <내일도 승리>에서는, 주인공이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씨간장으로 장아찌를 담가 투자자를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투자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국왕실에서도 간장 종가의 깊은 역사를 인정하는 친서를 보내옴으로써 수세에 몰리던 주인공이 시원한 반격에 성공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MBC 일일드라마 ‘내일도 승리’에서 한승리(전소민 분)가 아빠와 함께 심었던 나무 아래서
씨간장을 발견하는 장면. (출처 : 드라마 [내일도 승리] 화면 캡쳐)


그 이전, 2014년의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에서도 ‘씨간장’이 등장한다. ‘황소간장’이라는 식품기업을 배경으로,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난 며느리, 그리고 그녀의 딸, 며느리의 자리를 가로챈 얄미운 친구와 그녀의 아들이 라이벌이 되어 기업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뻔한 스토리지만, 배경이 간장 전문 식품회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마지막의 후계자 대결은 ‘어간장(생선을 이용해 1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과 ‘씨간장’의 대결로 요약되는데, 남장을 한 채 동분서주하던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물론이다.


SBS 일일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 28회에서 장하나(박한별 분)와 장라공(김주영 분)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결을 시작하는 장면(좌). 122회 마지막회에서 ‘황소간장’의 후계자가 된 장하나(박한별 분)(우).
(출처 :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 화면 캡쳐)


위의 예처럼, 현대물에서 옛 전통의 맛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스토리는 꽤 발견되는데, 막상 대부분의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식은 배경, 소품 정도에 그친다. <대장금>이나 현재 제작 중인 <도문대작>처럼, 음식 그 자체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는 작품은 흔치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고증 때문이 아닐까.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제작 단계에서 전문가에게 음식에 대한 고증을 받더라도 막상 작품이 나오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있는 게 사극의 운명(?)이다. 같은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부디 바라기는, 앞으로 사극에 나오는 건축, 배경, 의상, 언어, 음식과 소품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애정으로 보아주고 조언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야 대중문화인들이 위축되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담아내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가 약간 옆으로 샌 느낌이 들지만, 사극을 쓰면서 짧은 지식의 한계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해하리라 믿는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음식 코디네이터의 피 땀 어린 노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들이 발견되곤 한다.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식은 단순히 음식만이 아닌, 씬스틸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 나오는 음식이 그렇다. 극 초반 타이틀이 등장한 바로 다음, 인물들의 대화가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는 전골냄비에서 전골을 한 그릇 떠서 상으로 가져가는 장면을 위에서 비춘다. 상 위의 음식은 정갈하고 절제되어 있으나, 전골냄비 속 고기와 생선, 오색 야채는 진득하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해후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내의 정부인 친척남자 세 사람이 상차림을 앞에 두고 하는 이야기는, 남편이 새로 들일 첩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쾌락과 본능을 깔끔한 예의와 격식 속에 감춘 모습이 그들의 상차림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음식소품은 음식전문가이자 프로덕션디자이너의 정구호가 맡았다. 영화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음식을 직접 만들었으며, 기생집에 임금님 수랏상처럼 음식이 차려지고 제기를 사용하는 오류를 바로 잡고 백자기, 놋그릇, 9첩 반상, 개다리소반 등을 정확한 크기와 상차림으로 연출했다. (출처 : [씨네 21] 2003.09)


영화 <방자전>에는 물가로 놀러간 춘향과 이몽룡을 위해 방자가 고기를 굽는 장면이 등장한다. 방자 옆에 앉은 향단은 멀리 서있는 춘향과 몽룡을 바라보며, “양반들은 꼬실 때 무슨 얘기를 할까, 지들도 우리랑 똑같겠지? 그나저나 이(고기 굽는) 냄새에 군침도 안 도나?” 하면서 구워진 고기를 낼름 주워먹는다. 방자가 향단을 탓하며 “양반이 우리랑 같냐? 양반은 마음을 안 드러내고 감추는 거야. 고기가 먹고 싶어도 안 먹고 싶은 척. 그래야 양반이지.” 답하는데, 마침 그들에게 춘향과 몽룡이 다가온다. 춘향은 방자에게 “자네는 어찌 그리 고기를 잘 굽나. 지난번 싸울 때 보니 힘이 장사던데, 고기 구울 땐 한정 없이 섬세하고....” 하며 호감을 드러낸다. 옆에 있는 몽룡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당연지사다.

이 역시 음식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나 같은 관객은, ‘저 때도 물가에서 고기를 구워먹었구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 같은데... 맛있겠다.’ 하며 군침을 삼키니, 이래저래 명장면이다.

그런데 방자의 말과는 달리, 정약용이 묘사한 양반들의 고기 구워먹는 모습은 마음을 숨기긴 커녕, 사뭇 게걸스럽기까지 하다.

해진 갖옷 소매 걷고 화롯가에 다가앉아 弊貂선袖進爐頭
가난한 선비가 덩실덩실 자득한 때로세. 寒士沾沾得意秋
꾸륵꾸륵 소리 내니 누가 욕하지 않으랴 慢作蚓鳴誰不罵
성낸 듯 눈 튀어나와도 걱정할 건 없다오. 怒如魚眼卽無愁

이 시는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겨울 날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 모습을 「한방소육도(寒房燒肉圖)」라는 그림에 부친 시다. 그림은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가난한 양반들이 모여앉아 쩝쩝 소리 내고, 눈을 부라리며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화로에 고기를 구워먹는 것을 ‘난로회’라 불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이 풍속은 조선 후기에 급속도로 퍼져, 심지어 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고기를 구워먹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요즘,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먹고 감탄한다는 ‘코리안 바비큐’의 전통이 유구한 건 분명하다.


숯불을 피운 화로 곁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영화 <광해>에 등장하는 음식은 왕과 백성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왕이지만 왕이 아닌 광대, 가짜 광해가 처음 접하는 수랏상의 음식들이, 사실은 왕 혼자서 먹는 게 아니라 남겨서 나인들의 ‘밥’으로 삼는 것임을 알게 되는 장면과, 때문에 다음번 수랏상에서 어린 기미나인이 가져다 준 팥죽만 먹고 나머지 밥상을 그대로 내가라고 하는 광해의 모습 때문이다.

요즘 ‘혼밥’이 화제다. 1인가구가 늘어나다보니, 자연히 혼밥족을 겨냥한 간편식과 도시락이 유행이 되고, 식당에서도 혼밥족을 위한 자리를 따로 배치할 정도다. 그러나 오래도록 혼밥을 해온 사람들은 안다. 혼자 먹는 밥이 얼마나 맛없는지를. 작은 것이라도 나눠먹어야 더 맛나다. 왕과 양반들의 밥상이 아무리 산해진미로 채워진다 해도 함께 즐길 이가 없다면 먹는 시간이 기다려질 리 만무. 왕이 된 광대 광해가, 처음엔 혼자 먹을 것을 탐하다, 후엔 백성과 더불어 먹는 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은, 개망나니였던 그가 진정한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춰가고 있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함께 먹는 눈물의 음식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가 <명량>이다. 1,7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명량에서 이순신으로 분한 최민식의 연기도 좋았지만, 배우 박보검이 맡은 ‘토란소년’ 수봉 역할이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았다. 극 중 수봉은 왜군에 희생당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거북선에 탑승한 격군으로,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피투성이가 된 이순신에게 삶은 토란을 내민다. 토란은 백성들의 허기를 채워준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그 곳의 특산물이기도 했다.


영화[명량]에서 수봉(박보검 분)이 이순신(최민식 분)에게 건넨 토란 장면 (출처: 영화[명량] 캡쳐)


"이거 토란 아니냐! 먹을 수 있으니 참 좋구나."

수봉이 준 토란을 한 입 베어 물며 이순신이 말한다. 토란은 수봉이 이순신에게 올리는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상징물인 동시에, 이순신에게는 승리를 넘어 ‘삶’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감동의 산물이자, 살아있어 누릴 수 있는 궁극의 사치였을지 모른다.

‘도락’의 원래 뜻은 단순한 취미나 재미가 아닌, 도를 닦은 뒤 느끼는 깨달음의 기쁨을 말한다. 흔하고 얄팍해져버린 ‘식도락’의 세상에, 혀를 넘어 마음까지 짜르르 전율하게 만드는 감동, 이순신과 수봉이 생사를 건너 함께 나눈 토란 한 알에서 느끼는 진정한 식도락의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




작가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09-28 ~ 1619-10-04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흰죽부터 개장국까지, 끼니도 되고 보신도 하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12 ~ 1626-11-06

1625년 1월 12일, 신유. 권별의 안색은 완전히 희게 되었고, 소변이 붉던 것도 맑아졌다. 조금씩 밥맛을 알게 되어 녹두죽과 백원미(흰쌀 죽)를 4~5차례 마셨다. 밤에도 3~4차례 마셨다. 주부의 기생이 각종 진미를 연이어 보내주셨다. 야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은 지난밤과 다름이 없었다. 달보가 병문안을 왔다.
1625년 1월 14일, 계해. 증세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은 민물고기로, 혹은 새우젓갈로 반찬을 하여 연이어서 미음을 먹었는데, 다 뜨거운 물로 타서 넘겼다.
1625년 1월 26일, 을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꼈다. 청어 1마리를 구워서 먹었는데 해롭지 않았다. 밤에는 기장쌀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숟가락 넘겼다.
1625년 2월 4일, 계미.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식후에 비를 잠시 뿌렸다. 유량의 집은 방이 비좁고 창문이 없는 데다가 또한 날씨마저도 점차 따뜻해져 권별은 기운이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오늘 사랑으로 옮겨 들어갔더니 기운이 갑자기 깨어나고 밝아졌다. 이봉이 민물고기 여러 마리를 들여보냈다. 회를 쳐서 먹었는데, 또한 체하지 않았다.
1625년 2월 9일, 무자.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오후에 빛이 났다. 서비가 7일부터 앓아누웠는데, 증세가 수상하니 염려스러웠다. 안채 변소를 수리하였다. 주부 댁에서 민어 반 마리, 생강 6각을 보냈다.

“새해 첫날 노인이 된 친구들끼리 모이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1-01 ~ 1745-01-03

1745년 1월 1일, 을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차리고 사당에 나아가 차례를 지냈다. 첫날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둘째 날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며, 잠깐 바람이 불기는 했다. 계부를 모시고 추동에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새해 셋째 날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연이어 들렀다. 을축년은 권상일에게 67세가 되는 해이다. 이미 권상일도 환갑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도 두루 거친 그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도 느껴졌다.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였다.
1월 3일 밤에 여러 노인들과 함께 이순(而順)의 집에서 입춘(立春)의 밤을 보냈다. 후경(厚卿)도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 권상일은 오히려 젊은 축이었다. 계삼(季三) 아저씨는 73세, 문언(文彦)은 71세, 계부는 69세, 권상일은 67세, 이순은 63세였다. 그의 동네에 사는 노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노인이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김령, 계암일록
1603-09-08 ~ 1619-10-27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 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온 집안이 병으로 신음하여 개를 잡아 보양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4 ~

1912년 11월 14일, 김대락의 집안은 병마와 싸우느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사촌 제수씨는 이전부터 지병이 있어 상당 기간을 앓고 있었고, 며느리는 최근 감기가 들어 며칠째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들 형식이는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었고, 손자 창로는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바짝 여위였다. 그나마 창로는 누워서 앓는 병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한창 나이에 먹어야 제대로 자랄 터인데 음식을 마다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과 싸우고 있지만, 집에는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김대락은 크게 마음을 먹고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기로 하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을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을 나누어 먹던 녀석이었다. 짐승의 목숨을 버려 사람의 식욕을 돋우려 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는 평소 잘 짖지도 않고 사람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잡아먹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장자가 말한 닭과 산 나무의 교훈은 제법 그럴 듯한 가르침이었다. 개를 잡아 국을 끓이니, 오랜만에 식구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마다하던 창로도 오늘만큼은 제법 요기를 한 모양이었다.
한 끼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가혹한 현실이 돌아왔다. 상점 주인이 와서 외상값을 독촉하였다. 몇 번이나 기일을 미루어 놓았는데, 매번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동짓날이었는데, 팥죽 끓일 재료도 없어 그냥 지나쳤다. 명색이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절기도 그냥 지나치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지라고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에게 인사도 못하였으니, 팥죽 재료가 있다한들 입맛이나 다실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탄식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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