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커피맛을 알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물론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저 입에 단 커피만 찾던 내가, 원두커피를 마시고 ‘맛있다’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다. 나처럼 입맛이 둔감한 사람조차 커피맛 운운할 정도니, 우리나라의 커피소비량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만하다.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커피 한 모금을 입술에 머금을 때, 장차 우리나라가 국민 일인당 주당 9.3잔의 커피를 소비하고, 세 집 건너 하나가 커피전문점인 커피대국이 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1896년 고종의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등장하는 영화, ‘가비’의 한 장면
(사진출처 : 네이버포스트_KYC COFFEE)
한 나라나 조직에 이질적인 문물이 들어오면 일단 거부반응부터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거부반응 대신 과감한 도전을 선택한다. 소위 얼리어답터라고 불리는 진취적이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 덕분에 새로운 문물이 유행하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반면 언제나 남들의 검증이 끝나고도, 이미 한물간 유행의 끝자락을 잡고, 새롭다고 우기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외세가 밀고 들어오는 근대에, 조선의 수장이던 고종의 혼란스러움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버지 대원군과는 달리, 열린 마음, 열린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껏 미디어 속 고종은 주로 무력하고 나약한 왕으로 묘사되어 왔다. 조금 다른 고종을 볼 수 있던 드라마가 바로 <미스터 션샤인>이다. 여기서 고종을 연기한 배우 이승준은, 어딘지 떠는 듯한, 높낮이 없는 가느다란 음색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만큼은 깊고 또, 강단과 품격이 느껴졌다. 물론 이는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고종이라면 충분히 이러했겠다고 상상하게 만드는, 매우 합리적인 상상력이다.
“폐하를 지키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장포수를 향해
“안다. 허나 일꾼을 그리했으면 짐을 지킨 것이나 진배없다.”고 답하며, 백성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고종. 마치 불을 간직한 얼음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조선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고종의 외로운 싸움이 엿보이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장면은, 한성 밤거리에 처음으로 전기가 점등되는 날을 배경으로 한다. 한성전기회사에서 설립한 동대문 발전소에서, 동대문 일대에 시범적으로 점등한 것이다. 서양 불구경 나간다고, 마냥 들떠서 밤마실 나온 사람들 사이로 자신들의 가슴에 켜지는 환하고 어지러운 알 수 없이 느낌에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전깃불과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tvN 미스터선샤인의 장면 : 한성전기회사가 설립한 동대문 발전소의 점등식에서 마주치는 두 주인공
(사진출처 : 네이버포스트_싱글리스트)
전기 말고도 시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는 삼각관계를 경쾌하게 보여준 ‘전차’ 장면, PPL이 분명하지만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여지는 ‘불란서빵집’의 ‘서양 빵들’을 비롯, 손탁호텔을 모델로 한 글로리호텔의 ‘커피’와, 미군이 들여온 ‘총기’ 혹은 ‘오르골’ 등, 그야말로 당시 몰려왔던 온갖 신문물의 홍수 속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며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등장한다.
특히 글로리호텔에서 가베(커피)를 마시는 고종의 모습은 내게 또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했는데, 2012년 개봉한 [가비]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김탁환 작가의 [노서아 가비]를 원작으로 하며, 배경 스토리는 다음 일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김탁환 작가의 [노서아 가비], 소설을 영화화한 [가비], 글로리호텔의 커피 마시는 장면을 재현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사진출처 : 리디북스, DAUM영화, tvN미스터선샤인)
1898년 7월 27일, 박주대는 천인공노할 소식을 들었다. 임금의 수라를 올리는 사선서에서 밤이 깊은 시각 주상께 차를 올렸는데, 주상이 이를 마시다가 토하셨다고 한다. 옆에 있던 태자께서는 이를 벌컥 마시어 삼켜버렸다고 한다. 차 안에다 누군가가 독을 탄 것이었다.
직후 주상과 태자는 곧바로 정신이 혼몽해 졌는데, 옆에 있던 내시와 내인들이 급히 맛을 보니 이들도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고 한다. 독이 든 것을 알고 차를 끓여 바친 사선서 하인을 족치니, 김홍륙과 공홍식의 소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김홍륙과 공홍식 두 명은 거리에서 교살되었다.
박주대 [저상일월] 중에서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음력으로 올해 7월10일 김홍륙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을 받고 그날로 배소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의 심보를 드러내고 친한 사람인 공홍식에게 주면서 어선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26일 공홍식이 김종화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어공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의 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의 고지기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따냐 라는 조선계 러시아 여인(김소연 분)이, 고종의 입맛을 사로잡는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로 분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몇 년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고증하고 재현한 다양한 커피와 커피 도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봄,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남과 북의 정상들을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지 않은 국민이 몇이나 될까. 통일이 곧 내일 모레로 다가올 것만 같은 예감, 당장이라도 경의선 철도를 타고, 개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쭈욱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설렘을 느꼈었다. 물론 그 설렘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떤 경우에라도 역사는 앞으로 한걸음씩 발전한다고 믿기에.
물론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과 북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뜨거운 감자다. 오랜 기간, 북한을 주적으로, 한미동맹을 목숨줄로 알고 지내온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무기가 굉장한 위협으로 느껴지지만, 한때는 우리나라 역시 핵무기를 보유하려 했었다. 만약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에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을지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미국이나 몇몇 핵무기 보유국이, 자신들의 핵무기만 폐기하지 않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제로는 ‘자국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그들 국가들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면서 핵무기를 손에 쥐고 큰소리치는 모습이라니. 여하튼 강대국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역사는 그 뿌리가 깊고도 유구하다.
2008년 영화 [신기전]은 바로 이런 거대한 명나라의 ‘내로남불’을 극복하고, 우리의 무기를 만들어 낸 집념의 기록이다. 물론 실제와 허구가 적절히 섞였지만, 영화는 꽤 통쾌하고 생동감있게, 명나라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은 기계 화살(神機箭)’을 개발하는 조선인과 세종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실제 신기전은 최남선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로켓 ‘주화(走火)’에서 발전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최무선은 원나라 상인 이원과 꾸준히 교류하며 화약제조법을 배웠고, 그의 아들 최해산에 이르러, 여러 가지 발전된 화기와 화포를 개발할 수 있었다. 영화는 해산의 딸 ‘홍리’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기전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사용된 로켓추진 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신기전]의 포스터
영화 말미에 나오는 신기전의 화력은 가공할 만하다.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날아가 여진과 명나라 군사를 무너뜨리는 수백 수천발의 로켓 화살은 약소국의 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장관이다. 실제 신기전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실려 사용되기는 했지만, 정확도 면에서는 좀 아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행주전투에서는 한 번에 100발을 발사하는 ‘신기전 화차’와 더불어 크나큰 활약을 했다.
조선시대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나 신기전기(神機箭機) 중 하나를 올려놓고 사용한
우리의 독창적인 무기다. (사진출처 : 스토리테마파크_멀티미디어_화차火車)
비록 핵심기술인 ‘염초제조법’을 중국으로부터 배웠지만, 이것으로 개발한 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로켓형 화기가 된 것이다. (서양의 로켓화기는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야 개발되었다고 한다)
미디어 속 신문물을 훑어보고 있자니, 사실 우리는 이 모든 것보다 획기적으로 앞선 문물을 매일 접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진초이와 애기씨가 서로를 응시했던 동대문 거리의 전깃불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어둑어둑하고 껌벅거려서, 바로 한전에 항의전화를 해야 할 수준이고, 우리의 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머신은 고종이 보면 깜짝 놀라 어좌에서 떨어질 화려함과 편리함을 지니고 있으며, 거북선에까지 실렸던 신기전은 지금, 불꽃놀이에나 쓰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에 열광하지만, 모든 새로운 것은 언젠가는 헌 것이 된다. 요는 인간들이 쉽사리 지루함을 느끼며, 그 어떤 것에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돈만 많다면 우리의 휴대폰 교체주기는 한 달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꾸준히 물질적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그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줬느냐 하면, 그건 답하기 어렵다. 모든 물질은 순환되고 유통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불을 가르쳐준 죄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는 너무 일찍 태어나서 억울하게 되었다. 아무리 꽉꽉 틀어쥐고 봉쇄하더라도, 언젠가는 열리고 확산된다. 그것이 바로 물질세계의 법칙, 엔트로피다.
‘신문물’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거기서 사람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물질은 철저히 사람에게 복무해야 하는데, 우리는 쉽사리 물질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즈음 뉴스를 흔들어대는 마약과 성문제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제발 물질로 인해 너무 많이 변치 않기를, 오래된 좋은 것의 가치를 잃지 않기를, 정신의 아름다움이 소멸되지 않기를, 죽지 않기를..... 신문물 세계의 한가운데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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