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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쉘 위 댄스”

나는 스트레스 받는다고 잠을 못 이룬다거나, 입맛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체하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추운 데서 밥을 먹었을 때뿐이다. 대학 시절, 다이어트는 하고 싶은데, 식단 조절할 용기는 없던 차에, 당시 절찬리(?) 상영 중이던 <더 플라이(사람이 파리로 변해가던 슬프고도 기괴한 영화)>를 보고 와서 며칠 밥이 안 먹히더라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순전히 식욕 좀 떨어뜨려 볼 심산으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아뿔싸, 다녀와서도 밥은 여전히 잘 먹혔다. 그저 영화 보고 온 당일, 밤잠을 좀 못 이룬 정도였으니... 기가 찰 노릇이라 해야 하나, 아님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나였으니 몇 년 전 건강검진에서, 스트레스성 십이지장궤양이란 결과를 듣고 의아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하, 내가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내 몸은 정직하게 스트레스를 인정하고 있구나.’ 하고 겸손해졌다. 그 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그 분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2년 전 봄, 눈을 감으면 온갖 걱정이 몰려오고, 가만있어도 절로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나날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식욕에는 별 타격이 없었다.) 스스로를 향한 자책을 넘어 가족을 향한 원망의 마음도 있었고, 세상사람 모두 밉고 귀찮았으며, 누가 뭘 물으면 대답조차 하기 힘든, 에너지 고갈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친구들과 1박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마음 상태로는 절대 갈 수 없는 여행이었으나, 평소 몇 박 여행은커녕, 하룻길 나들이도 거의 하지 않는 집순이가 하필, 오래 전 큰 맘 먹고 세워둔 여행계획이었으니...

내려가는 휴게소에서만 해도, 누군가 내 뺨 좀 때려줬음 하는 마음이었다. 울고 싶어서. 그런데 다음 날 나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거기엔 마음 통하는 친구들, 보성의 차밭과 담양 죽녹원의 푸르름이 함께 했다. 땀 흘리며 대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니, 내가 왜 그리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는지, 무엇에 그리 마음 졸였는지조차 잊게 되었다. 서울 가면 단단히 따져야겠다고 생각한 이들에 대해서도, 굳이 뭐 그럴 필요 있나 싶어졌다. 그냥 뭐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희망이 생겼달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힐링’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자연의 위로와 치유의 힘을 단단히 느낀 것이다.

옛 사람들의 힐링에 대해 생각해보자니, 현대인들보다 자연과 더 가까이 살았던 그들은 그럼 매일이 힐링이자, 유유자적이었을까 자문해보게 되었다.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자연 속에서 쉼을 얻은 것은, 단순히 자연과 가까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휴식과 동떨어져 살아온 나의 잘못된 생활패턴에 변화를 준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힐링은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힐링’이라는 말도 개념도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다 보니, 힐링을 다룬 사극 드라마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병이 들면, 약은커녕, 누워 쉬는 것조차 호사였을지도 모를 이들에겐 과연 진정한 치유란 무엇이었을까.

그러다 두 개의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요소가 있다. 바로 ‘춤’이다.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가 추는 춤은 이를 보는 백성들이나,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힐링이 되는 포인트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선의 국왕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치고 싶었다. 문제는 임금이 백성을 버린다는 비판여론.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은, 조정을 둘로 나누어 죽어도 아까울 것 없는 세자 광해에게 ‘분조’를 맡겨 전쟁을 독려하도록 하고 본인은 의주로 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광해는 선조의 ‘대립군’인 셈이다.

광해와 함께 하는 군인들 역시 다른 사람 대신 군역을 서주며 먹고 사는 ‘대립군’이었다. 곱게만 자란 세자와 나라에 불만 가득한 대립군들의 동행이 어찌 진행될른지는 예상대로다. 나약한 세자와 거친 대립군들은 갈등과 충돌을 거듭하다 이해를 거쳐 각자 성장한다. 그리고 그 변화와 성장을 상징하는 모멘트가 바로 광해의 춤이다.
의병을 모으기 위해 신철장군에게 가는 광해일행이, 계곡에서 피난민들을 만나 그들의 곡식으로 오랜만에 함께 밥을 해먹고 쉬는 장면.

“그 힘들다는 대립을 어떻게 계속 합니까, 대단들 합니다.”
“나도 대립질 몇 번 했지. 난 그래두 원님댁 자제분 대립 섰수다.”
“대립이면 다 같은 대립이지 뭐 그것도 귀천을 따지나? 곡수야 소리 한자락 뽑아봐라, 니놈이 노래하믄 노망난 니 엄니두 잠깐동안 맑은 정신이 돌아온담서.”
“됐소오, 지금 소리가 나온다요? 곡소리라면 몰라도.”
“원래 가무는 구슬플 때 더 와닿는 법이다. 나도 궁에 있을 때, 소리로 울적함을 달래곤 했었지. 해보거라.”

광해의 말에 곡수는 노래를 시작하고, 그 노래에 맞춰 광해가 춤을 시작한다. 말리려는 신하에게 광해는 “내 목숨보다 귀한 밥을 얻어먹었는데, 해줄 것은 없고, 저들의 시름이나 달래주리라.” 한다.


영화 <대립군> 2017


영화 속 광해의 춤은, 한 마리 학처럼 고아하고 절제되어 있다. 세자에게도 그 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였겠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이를 보는 백성들의 시선이다. 그것은 놀라움에서 고마움으로, 이내 감격으로 바뀌어, 춤을 끝낸 세자에게 모두 머리를 조아린다.

이제까지 사람 취급 못 받던 백성들, 누군가의 목숨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 전장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그들의 시름을 달래주기 위해 직접 춤을 추는 세자, 기꺼이 광대의 역할을 자임하는 지존의 모습은 그 자체가 힐링이 아니었을까.

춤으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영화는 <사도>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진찬례를 올리고 부채를 하나 들고 선다.

“내가 어릴 적 참혹한 일이 너무 많아, 어머니 앞에서 차마 재롱 한번 피우지 못했노라. 내 오늘 제대로 한번 놀아보겠노라.”

그는 악대의 연주에 맞춰, 부채춤을 추기 시작한다. 광해의 춤이 백성을 위무하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부드러움이었다면, 정조의 춤은 터질 듯한 슬픔과 한을 그 안에 단단히 봉한 채 외치는 격정적인 침묵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남긴, 부채 속 그림을 마치 진혼하듯 허공에 흩뿌리며 춤을 마쳤을 때, 혜경궁 홍씨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사도> 2014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 전 영화 <서편제>를 떠올리게 한다. 서편제는 영화 전편을 통해 흐르는 유장한 소리와 장면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 중간, 주인공 세 사람이 길을 걸어오며 함께 부르는 진도아리랑의 롱테이크 장면이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보는 이의 가슴을 가장 파고드는 건, 역시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일찍이 송화를 낳고 죽어버린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를 키운 의붓아비는 딸의 목소리에 한을 싣기 위해 일부러 딸의 눈을 멀게 했다. 북을 치던 의붓 남동생은 그런 아비가 지긋지긋해 도망쳐버렸다. 아비마저 죽고, 눈 먼 송화는 혼자 시골 주막에서 술 한 잔에 소리를 팔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렇게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밤, 송화는 주막의 손님 하나가 소리를 청한다는 소리에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북에 맞춰 밤새 소리를 풀어내는 송화. 온 몸의 진액과 땀을 쏟아내며 자신의 생에 있어 어쩌면 최고의 소리를 마치고 맞은 새벽, 원수같은 아비가 그토록 원했던 한이 실린 목소리를 구현해 낸 송화는 비로소 밤새 북을 쳐준 손님이 오래전 도망쳤던 남동생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왔냐는 말도,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냔 물음도 없이 영화는 두 사람의 희미한 미소로 끝을 낸다. 그것은 송화의 한과 슬픔을 풀어낸 힐링이자 푸닥거리였다. 아마 동생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관객 역시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면서 함께 웃고 우는, 시원한 경험을 했다.


영화 <서편제> 1993


미국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이 ‘예술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인간의 성취감’이었다면, <서편제>의 그것은, ‘예술의 최고경지보다 묵직한 인간의 존재감’에 방점이 찍혀있다. 위플래쉬에 없는 힐링과 쉼이 서편제엔 분명히 존재한다. 순전히 나의 사견이지만.

수그러들 줄 모르는 전염병에 온 나라, 아니 온 지구가 들끓고 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탱해가야 할 싸움인 듯싶다. 치유와 회복의 열쇠는, 싸움이 끝난 뒤보다, 싸움의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다. 서로를 위무하며 함께 싸웠는지, 으르렁대며 물어뜯었는지, 약자를 버려두고 혼자만 도망치진 않았는지...

이 순간에도 지친 이들을 위해 위로의 춤을 추며 땀 흘리는 수많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나 역시 보는 이에게 웃음 한 자락 전해주는 춤꾼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싸움도 그리 지독하지만은 않으리라.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오?”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동생을 살린 미담이 전해지다”

박한광, 박득녕, 박주대, 박면진,
박희수, 박영래, 저상일월,
1922-05-15~

1922년 5월 15일, 박면진은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소식을 들었다. 경주의 각산 마을에 박종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화상을 입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 박종필이란 사람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아우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괴이한 사고와 인륜을 저버린 이야기들만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야말로 인륜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박면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벌써 사람들은 시를 지어 이 박종필이란 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박면진은 소리 내어 이 시를 암송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개자추는
허벅지를 베어서
임금님의 굶주린 배를 채워드렸고
지금의 박종필은
살을 깎아
앉은뱅이 아우를 일으켰네
그 임금과 신하에게는
의리가 소중하였고
이 형과 아우에게는
우애가 돈독하였네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말하지 마라
저 하늘처럼
끝없이 빛나리라

“권문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7-07-01~1587-08-09

1587년 7월 1일, 권문해는 관아에 나아가 일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 맞이한 두 번째 부인 함양 박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독기가 몰려 구부렸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다. 이날은 아내에게 냉약(冷藥)을 쓰고, 또 침을 써서 터뜨렸다. 권문해는 다음날에도 관아에 나아가 잠시 공부를 수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도 권문해는 오한과 발열과 함께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아내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는 권문해는 칠곡에 사는 품관 이함(李諴)이 부종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청해오도록 하였다.
7월 12일, 이함이 궁중에서 파견된 약재 검사관 이운영과 함께 왔다. 이함과 이운영은 아내의 병을 습사(濕邪)로 인하여 온몸이 붓는 것 같다며, 부종에 효험이 있다는 곳을 찾아 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권문해는 아내를 데리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말하길 ‘혈종이 아니고 습종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함양 박씨의 무릎에 침을 놓아 피를 빼고, 대강활산(大羌活散)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찌르는 듯 한 통증을 참는 아내를 보는 권문해의 마음도 찢어졌다. 권문해는 수소문한 끝에 문경에 사는 내금위 진곤(陣崑)이 부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내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

김광계, 매원일기, 1626-10-18

1626년 10월 18일, 김광계는 밤까지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리더니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와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곧이어 중문까지 열어젖혔다. 김광계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침입자는 곧장 김광계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김광계는 한참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오랜 친구 이지형이었다. 본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즐기고 술자리도 가지며 절친하게 사귀던 사이였으나, 1623년 이지형이 그만 풍증(風症)이라 불리는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내면서 왕래가 끊긴 지 이미 몇 년째였다. 정신질환의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 시기 정신질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의해 감금되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형 역시 집안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었는데 어쩌다 틈을 타 탈출해서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 친구의 집까지 용케 찾아왔던 것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6-05-07~images/newsletter202004/1616-05-10

1616년 5월 7일,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을 천남(川南)으로 피신시켜 놓고 김광계는 며칠 전 능동재사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막내아우 이직(以直)이 설사 증세까지 생겼다고 해서 몹시 걱정을 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로 가 보았다. 그러나 마을은 전염병 기운이 여전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노산(蘆山) 재종조부 집에 가서 약재를 얻어 들여보내기만 한 후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했다. 김령 재종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재종숙 김령은 지난 1월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챙기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월당에 도착해보니 덕여(德輿) 형 형제와 김참(金墋) 아재, 이일도(李逸道), 임지경(任之敬), 이의적(李義迪)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수재 전치(全偫)도 있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4-06~1616-08-12

1616년 4월 6일, 이행이 정임수와 함께 왔다. 정임수에게서 아들 김적의 천식약인 담박호(痰剝蒿)를 구했는데 찾아서 온 것이다.
5월 15일, 이날 저녁 김택룡이 큰 아들 김숙이 산양으로 출발했다. 동생 김적의 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6월 20일, 아침 무렵 중소(重紹)가 산양(山陽)에서 와서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니 아들의 병이 여전해서 김택룡은 걱정이 깊어졌다. 춘궁기가 이어져서 곡식이 모자란 터라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곡식을 나누어 보냈다.
7월 24일,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해서 그 집의 노비인 임인이 왔다. 김택룡은 부랴부랴 의원에 부탁해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임인이 돌아가는 편에 보냈다. 김택룡이 들으니 산양의 아들 편지가 영주[榮川(영천)]의 산장(山庄)으로 왔다고 하는데, 산장에서 잊어버리고 자신 쪽으로 전해주지 않고 있었다. 김택룡은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몰라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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