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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그가 모자를 벗을 때

그가 모자를 벗을 때 –1


그는 모두가 알아주는 외골수에 융통성이라곤 한 푼 어치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임금 바로 옆을 지키는 호위부장이 된 지금, 그의 고지식함은 오히려 미덕이 되었다. 단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임금의 곁을 지켰다. 임금은 무엇이 맘에 들지 않는지 늘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으로 앞서 걸었다. 앞서 걷는 걸음걸이는 쇠추를 달아놓은 듯 언제나 무거웠다. 온갖 고관대작들과 물 긷는 궁인들까지도 임금이 어미와 동생을 죽이고 잠자리가 편치 않아 그럴 거라 입질을 해댔지만, 누가 뭐라던 그의 직무는 임금을 지키는 것이었다. 임금을 위협하는 그 무엇이라도, 그는 자신의 목숨과 바꿔 제거할 의지로 충만해있었다.

그런데 바뀌었다! 임금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웃음이 많아지고, 걷고 싶어 하는 길이 바뀌었으며 걷는 뒤태가 바뀌었다. 처음엔 반가웠지만, 그의 날카로운 기억력은 예전에 만났던 임금 흉내 내던 천한 광대를 떠올렸다. 그놈이로구나! 그렇다면 우리 전하는 어디 계시는 거냐. 어떤 놈이 감히 지존의 흉내를 낸단 말이냐.

한 밤 중에 뛰어 들어가 광대놈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그는 광대가 아니었다. 진정, 주상전하였다.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참람한 일을 저지른 그에게 임금은 칼 대신 팥죽을 보내왔다. 임금이 뭔가 변했다. 그는 눈물로 팥죽을 삼키며 이제껏 자신이 지켜왔던 이가 그저 어미와 동생을 죽인 권력에 눈 먼 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임에 감사했다.

그러나 오늘……. 그가 정말 광대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는 진짜 임금에 쫓겨 고라니 새끼처럼 튀어 달아나는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임금의 충성스런 호위무사인 그는, 그 고라니 새끼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 발치에 두고, 그가 달아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충성, 그의 성실, 그의 밥이자 자랑, 명분...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이었던 모자를 내려놓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이었다. 임금을 위해 기꺼이 바치리라 생각했던 목숨을 결국 광대를 위해 바치게 되었건만, 아깝지 않았다. 광대를 좇기 위해 달려드는 군졸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막아내며 자신이 내려놓은 모자처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최후를 맞는 그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지킬 사람을 지켰으니 나의 생은... 값졌노라....


도부장이 벗어놓은 ‘흑립’_출처_영화 <광해> 2012



그가 모자를 벗을 때 –2


앞서 <광해>의 도부장이 천하보다 값진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벗었다면, 목숨보다 값진 자존심과 자주를 벗어던진 또 다른 이가 있다. 물론 그 역시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모자를 벗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뿌듯함 대신 턱 끝까지 차오르는 치욕스러움은 어쩔 수 없다.

바로, 영화 <남한산성>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기 위해 인조가 벗어놓은 갓이다.


인조가 내려놓은 ‘갓’_출처_영화 <남한산성> 2017


사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외국 시청자들이 한국의 ‘갓’에 주목했다고 했을 때 어리둥절했다. 그저 사극에서 양반 사대부들의 머리에 당연한 듯 얹혀 있던 갓, 모양이 다양하지도, 색상이 다양하지도 않은 갓. 검정 원통형 몸체를 챙이 둘러싼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모자가 뭐 그리 흥미롭다고. 외국인들이 열광한다니, 이제껏 폄하하던 것을 마치 대단한 유물인 양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봤던 것이 사실이다.

유튜브 같은 데서도 갑자기 ‘갓’ 혹은 ‘모자의 나라 조선’을 주제로 한 여러 영상들이 만들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영상들을 하나 둘 보면서, 그간 내가 무지하게 무지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정말 모자를 사랑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아니, 모자 그 자체라기보다는 ‘예’를 갖추는 것에 목숨을 건 이들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도부장과 인조가 어떤 심정으로 갓을 벗었을지 짐작할 만하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떻게 고증을 했는지 관심을 갖고 보다보니, 이제껏 다 같다고만 생각했던 갓의 모양이나 너비, 고 등이 모두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개 원통형의 몸체, 꼭대기 부분이 평평한 갓을 생각하는데, 조선 초기엔 끝이 둥글고 뭉툭한 흑립을 썼다. <용의 눈물>, <대왕 세종>, <정도전>처럼 조선 초기가 배경인 드라마에서는 그런 흑립이 나온다. 국상 중엔 흑립 대신 백립을 썼다.


흑립_출처_KBS 드라마 <정도전> 2014


백립_출처_KBS 드라마 <정도전> 2014


갓은 양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천민을 뺀 상민들도 모자를, 아니 갓을 썼다. 저자거리에 지나치는 불특정다수의 사람에게 ‘나는 양반이 아닙네’ 광고할 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갓을 썼다. 앞서 말한 영화 <광해>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 광대가 쓰고 있던 갓처럼 말이다.


광대가 쓰고 있던 갓_출처_영화 <광해> 2012


상민들도 갓을 쓰게 되자 양반들은 챙의 너비로 그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료는 인조 때 갓의 챙 너비가 가장 넓었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영화 <남한산성>의 시대 배경이다.


영화 <관상> 2013 의 ‘갓’


영화 <남한산성> 2017 의 ‘갓’


비교를 위해 영화 <관상>에 등장한 갓을 가져와보았다. 확실히 인조대의 갓이 조금 커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산의 압박, 활동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넓은 갓을 씌워준 <남한산성> 의상팀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가 모자를 벗을 때 –3


웹소설에 기반한 퓨전 사극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은 그저 말랑한 멜로드라마로만 치부되기엔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조선의 관리가 되기 위해 성균관에 입학한 학생들의 일과와 그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노론과 소론, 남인이 얽힌 당쟁의 면면이며, 반촌에 사는 반인 같은 이들의 존재, ‘금등지사’로 표현된 정조와 영조, 사도세자의 관계 등을 일반 시청자들에게 쉽게 소개해준 공이 큰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장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간다’는 메인 소재가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해도, 당시 소외되어 있던 여성 화자의 시선이 곧 현대 시청자들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음을 생각하면 매우 잘 잡은 소재라 생각한다.

주인공 윤희와 동방생(룸메이트) 선준과의 로맨스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흥밋거리. 상투 틀고 망건 쓰고, 도포 입은 어엿한 남자 ‘윤식(윤희)’이 왠지 자꾸 좋아지자, 고지식한 청년 선준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도,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다. 윤식에게 직진하기로 결심한 그는 과감한 키스를 시도하는데....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2010


장애물이 바로 갓이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갓을 쓴 상태로는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 키스 시도가 불발로 돌아가자, 두 번째는 서로의 갓을 벗는다.

그렇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모자를 내려놓는다.



모자조차 쓸 수 없는


앞에선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갓을 벗어 내려놓는 매우 중요한 순간들을 이야기했다면, 그런 모자조차 쓸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KBS 드라마 <추노> 2010


KBS 드라마 <추노> 2010


모자조차 쓸 수 없는 천민 헤어스타일의 최고봉은 바로 드라마 <추노>가 아닐까 한다. <추노>에서 웬만큼 잘생긴 배우들은 모두 이런 쑥대머리를 하고 나온다. 드라마가 끝난 뒤엔 정신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추노 같다’는 일반명사로 표현하기도 했으니 당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살짝 화제에서 빗나간 감이 있지만 당시 드라마에 참여했던 스탭의 말을 빌려 TMI (Too Much Information : ‘너무 과한 정보’의 준말) 하나 풀자면, 이 드라마에서 노비나 추노꾼들이 입고 나오는 헤진 옷들은 엄청나게 비싼 옷이었다고. 시청자들이 보기엔 그저 낡은 옷이지만, 멀쩡한 옷을 사다가 일일이 마찰시켜 헤지게 만들었으니 엄청난 돈과 인력이 들어간 셈이다.

어쩌면 머리 꼭대기에 자신의 신분을 보여주며 다니는 시대가 아니라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는 사는 집, 타는 차, 신발, 시계, 옷, 가방 등 모든 아이템으로 신분을 구분 짓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말이다.

양반과 천민은 그렇다 치고, 보통의 상민들은 어떤 모자를 썼을까.

영화 <조선명탐정> 2017.
상민으로 위장한 김민이 쓴 패랭이


영화 <조선명탐정> 2017.
김민과 함께 다니는 서필이 애용하는 모자, 겨울에는 털 달린 귀마개로 변신한다.


영화 <음란서생> 2006.
모자도 4인4색, 왼쪽부터 상투, 갓, 탕건, 주립.


KBS 드라마 <추노> 2010.
왼쪽의 목화송이 얹은 패랭이는 보부상의 표식이었다.


그 외, 모자나 머리장식 고증에 정성을 기울인 장면들을 끝으로 원고를 마칠까 한다.


SBS 드라마 <대박> 2016.
카리스마 넘치는 숙종의 ‘상투관’


MBC 드라마 <이산> 2007
보기 드문 ‘자색 익선관’


MBC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2019,
‘호곡권당(곡을 하며 시위함)’을 위해 백립을 쓰고 궐에 들어온 성균관 유생들


MBC 드라마 <이산> 2007.
오동나무 가체로 꾸미고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는 궁인들


JTBC 드라마 <꽃파당> 2019.
눈이 즐거운 꽃미남들의 ‘갓’과 화려한 ‘갓끈’의 잔치


MBC 드라마 <아랑사또전> 2012.
저승사자가 착용하는 환상의 모자를 위해 의상팀은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을까.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들을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조카의 관례, 빈으로 참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2-15 ~ 1611-03-08

1608년 2월 15일, 국상 때문에 천례(薦禮)를 정지했다. 오후에 임 참봉의 아들 임지경(之敬)이 와서 그의 어른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2월 18일, 임 참봉의 아들이 글을 배우러 왔다.
2월 22일, 오시쯤 임 참봉과 누이의 편지를 보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 때문이었다.
1611년 3월 6일, 임 참봉의 편지를 보니 8일날 아들의 관례에 초청을 하면서 서신의 의범(儀範)을 빈례로써 하였다. 그 내자되시는 누님이 따로 여종을 보내어 편지로 나를 청했는데 지극히 난처해서 감히 답장을 하지 못했다.
3월 7일, 오시에 임지대(任之大) 군이 갑자기 왔다. 다시 임 참봉 내외의 편지를 보니 나를 초청하는 것이 몹시 간절하였다. 임 군은 어제 저녁에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지금 명을 받들고 왔으니 몹시 미안하였다. 부득이 점심을 먹은 후에 임 군·이실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갔다. 지나가는 곳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빛이 무르익어 넘치니 경치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임 참봉댁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인들이 활개를 치고 지금 주상은 덕을 잃어 어떤 벼슬아치라도 직언을 하면 즉시 퇴출된다고 한다.
3월 8일, 아침에 홀기를 보니 빠진 부분이 많았는데 어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었다. 나는 힘써 빈을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이실을 찬자로 정했다. 밥을 먹고 행례를 마친 후에 법도대로 술 석 잔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누님을 뵈오니, 창녕 누님도 또한 와 계셨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드디어 주인과 작별하고 사안·민보·덕휘를 차례로 들러보고 이지·이실과 함께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 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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