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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살인죄로 유배된 ‘하얀 코끼리’와
성 소수자 ‘사방지’의 만남

하얀 코끼리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인 불교에서는 생명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중에서도 흰 코끼리는 남다르다. 석가모니를 잉태했던 어머니 마야부인의 태몽에 6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불교국가인 태국에서는 흰 코끼리를 수호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흰 코끼리의 신성함을 내세워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옛날이야기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묘사된 것처럼 온몸에 살벌한 철갑을 두르고 탱크처럼 전장을 진군했던 모습의 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다. 그 존재 자체가 무기다. 고대 인도의 왕이 제거하고 싶지만 자기 손으로 제거하기에는 꺼림칙한 신하가 있을 때 신성한 흰 코끼리를 한 마리 선물했다고 한다. 흰 코끼리는 신성한 동물인데다 왕의 하사품이기 때문에 신하는 속마음은 어쨌든 간에 겉으로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코끼리가 살아있는 동안 코끼리를 섬기고 받들어 모셔야만 한다.


〈자수 흰 코끼리 상〉(출처: 숙명여자대학교 정영양자수박물관)



코끼리가 병들거나 죽으면 왕의 권위는 물론 신에게도 불경한 사람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한다. 신하는 코끼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봐야만 하는데 문제는 코끼리가 먹어도 너무 먹는다는 데 있다. 살을 빼고 싶다고 체중 감량을 아무리 해도 체중이 줄지 않을 때 우스갯소리로 주변 친구들이 하는 말이 코끼리가 풀만 먹고 1톤이라 놀린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코끼리는 풀만 먹지 않으며 무게도 가볍게 1톤 정도가 아닌 4톤에서 8톤 사이다. 코끼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 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풀 뜯어 먹기와 닥치는 대로 먹기를 시전한다. 하루 16시간 정도 깨어 있는 동안 먹어 치우는 양은 거의 300킬로그램에 달한다. 나뭇잎, 풀은 물론 과일과 나무껍질도 마다하지 않으니 이 어마어마한 먹이를 한 집안에서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코끼리는 왕의 선물이다. 아파서도 안 된다. 신하의 주머니가 비어가는 동안 그의 멘탈도 탈탈 털려, 그는 왕의 밥으로 전락하고 만다.




코끼리는 왜 사람을 죽였을까


한반도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코끼리가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1년(1411년)에 등장한다. 일본에서 불교 경전을 받기 위한 공물로 자신들이 인도에서 선물 받은 코끼리를 다시 태종에게 바치면서다. 사실상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받은 코끼리가 감당이 안 되니 공물을 빙자해서 폭탄 돌리기 하듯 조선에 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코끼리는 먹고 또 먹었다. 하지만 이 코끼리가 정말로 유명해진 것은 먹어치운 곡식의 양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던 이우(李玗)라는 자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의 사람 한 명 등 두 사람을 밟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인 동물은 죽는다. 하지만 코끼리는 살아남았다. 자신의 동생까지 죽였던 태종이지만 코끼리를 사랑했다. 코끼리가 그의 왕권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신하들은 코끼리의 죄목에 살인과 더불어 너무 많이 먹는다는 과식을 얹어, 죽여 마땅하나 태종의 애정을 생각해 유배를 보내자고 한다.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에 두도록 명하는 『태종실록』 기사(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코끼리는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고 동물들 가운데 몇 안 되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동물이며 죽은 동물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고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바다에 고래가 있다면 지상에는 코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래를 수족관에 가둘 수 없듯이 코끼리도 가둘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코끼리가 발에 차꼬를 차고 아직도 노예 생활을 하고 있듯이 그때의 코끼리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물로 납치되어 바쳐지는 존재였다.

코끼리는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코끼리는 가족을 중심으로 큰 무리를 이루어 평생을 함께 한다. 임신 기간이 20개월이 넘는 만큼 코끼리는 유년기도 길고 청소년기도 길다. 코끼리가 만약 사람들처럼 의술의 힘을 빌린다면 아마도 사람보다 더 오래 살 게 틀림없다. 아프리카에서는 사파리를 만든다고 어린 청소년 코끼리와 청년 코끼리만 잡아다가 옮겨 놨더니 사회화가 되지 않아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집단이 되어 민가를 습격하고 함부로 다른 동물들을 밟아 죽이는 밀림의 깡패가 되었다는 사례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코끼리는 그들의 집단 안에 머무를 때 가장 코끼리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고향에서 홀로 잡혀 온 코끼리의 외로움과 분노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코끼리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니 사회화도 되지 않은 코끼리 입장에서는 어쩌면 참고 또 참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인명을 해친 코끼리는 형사재판의 피의자가 되어 너무 많이 먹는다는 죄명까지 덧붙어 귀양을 떠났다. 그나마 공물로 바쳐졌다는 것과 태종이 귀하게 여겼다는 점 때문에 사형은 면한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수명이 사십 년 이상인 코끼리인지라 이 코끼리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딱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난다. 그게 바로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었다고 알려진 사방지다.




두 하얀 코끼리의 만남, 창극 〈내 이름은 사방지〉



창극 〈내 이름은 사방지〉 포스터(출처: JU 창극발전소)



뮤지컬인 듯 뮤지컬 아닌 뮤지컬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창극 아닌 창극인 〈내 이름은 사방지〉는 바로 이런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한승석이 작창을 맡고 사성구가 대본을 쓴 이 작품 속에서 ‘하얀 코끼리’ 둘이 만난다. 실제로 코끼리가 사방지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 시대의 ‘하얀 코끼리’였던 그 둘을 유배지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 바로 창작자들의 일이다. 이 작품에서는 코끼리에게 고상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부여한다. 인간으로부터 멸시만 받았던 코끼리 고상이는 사방지를 만나 처음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방지는 어려서부터 곱상하고 아름다웠으나 부모가 보아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던지라 일단은 고운 외모를 따라 여성의 복장으로 입혀 아이를 키웠다. 어머니로부터 바느질을 배워 바느질을 잘했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자신을 탐하는 사람들을 피하고자 비구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도망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남성의 세계에서 일찌감치 쫓겨난 그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여성의 공간인 안방이지만 양성구유인 그에게서 여성들은 분명한 남성을 찾아냈다. 게다가 사방지에게는 어머니에게 배운 바느질 재주도 있었다. 사방지는 여러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관계이자 사방지가 유명하게 된 관계가 바로 문신 정인지의 사돈인 이순지의 딸이다.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은 사람이었는데 사방지를 집에 들이고 당당하게 십 년여의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저잣거리의 스캔들을 넘어서는 당대 조선의 핫한 스캔들로 떠올랐다. 결국 유배지의 노비로 추방당한 사방지는 코끼리 고상이를 돌보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세상의 끝에서 만난 두 추방자는 서로에게 애틋했을 것이다.

판소리라는 전통 장르에서 양성구유인 사방지를 소재로 삼아, 다름은 다름으로 인정해야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주제를 피력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나 사실상 공연 자체는 이도 저도 아닌 결론으로 끝나버리긴 하여 아쉽다. 아마도 이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뮤지컬 가운데 하나인 〈헤드윅〉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방지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존재라는 판단에 이른다. 즉 사방지는 인간의 영역에서 박탈되어 버린다. 인간의 영역에서 쫓겨난 사방지에게 내려지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부정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치 뮤지컬 〈헤드윅〉이 한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았어도 그가 등장할 때의 첫 대사는 여전히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헤드윅이라고 소개받는 것처럼. 사실 헤드윅을 소개하는 대사를 그대로 번역하면 ‘남자이자 여자이며 그 모든 것이며 베를린 장벽처럼 당신을 깨부숴줄 헤드윅’이건만 이 작품이 한국에 들어오면 긍정성이 아니라 부정성이 도드라지게 그런 것처럼.


뮤지컬 〈헤드윅〉(출처: YES24)




지금은 하얀 코끼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뮤지컬도 아니고 창극도 아니었던 작품 〈내 이름은 사방지〉는 2019년 초에 창작산실로 단 두 번 공연된 이후 지역의 문예회관에서 몇 번 공연된 이후 다시 재공연의 소식은 없다. 그 당시 판소리계의 걸출한 아이돌들이었던 이준수, 유태평양 등이 주연을 맡고 박애리 등 쟁쟁한 소리꾼들이 등장했지만, 작품 자체가 지향점이 모호한 상태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채로 자극적인 소재로서의 사방지와 애수의 대상으로서의 고상이를 다루다가 흩어졌기 때문인지, 장르 자체의 보수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째 고상이처럼, 이제 이 작품의 출연진들의 몸값이 너무 올라버렸기 때문인지 이 작품마저 ’하얀 코끼리‘가 되어버린 듯하다.


동네의 길냥이



최근 사방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길고양이들을 사냥하고 학대하는 집단들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어린이를 거부하는 노키즈존이 문제가 되며, 장애인들이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여 시위를 계속하고 차별금지법이 여전히 국회에 망령인 듯 떠돌 때,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과연 현대인지, 사실은 아직도 조선 초기와 별다를 게 없는 봉건시대는 아닌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조선 시대에 인간과의 반려에 실패하여 유배를 떠나야 했던 외로운 하얀 코끼리가, 지금 우리 곁을 여전히 서성이고 있다. 이제는 정말 하얀 코끼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하얀 코끼리를 또다시 멀리 유배 보낸다면 사실상 유배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물고기잡이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4-01 ~

1597년 4월 1일, 낮에 후전리에 사는 별감 김린, 교생 허충, 김애일 등이 오희문을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동쪽 큰 언덕에 올라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 주인인 시중이 국수를 만들어 찾아왔다. 언덕 위 공터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국수를 먹는데, 큰 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깊은 못을 만들어 놓아 경치가 그만이었다. 언덕의 북쪽은 낭떠러지 절벽이 둘러쳐 있었는데, 이것이 한바퀴 빙 둘러서 반대편에 이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생긴 것이 마치 누각의 머리같이 생겼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낭떠러지라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물결도 잔잔하여 티 하나 없이 맑은데다가, 햇볕도 내려 비치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물도 맑았다. 무리지어 노는 물고기떼를 바라보다가, 옆에 따라온 아이에게 그물을 쳐서 몰게 하였는데, 몰기가 무섭게 물고기들이 번득거리고 엎어지는 것이 볼만하였다. 간단히 그물질을 하였는데도 60여 마리나 잡아 올리고, 또 낚시대를 가지고 오게 하여 낚으니 이번에도 40여 마리가 잡혔다.

잡은 생선 중 큰 놈을 골라 뼈를 발라내어 말려 놓고, 남은 잔 생선으로 탕을 만들어 밥과 함께 먹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없는 것이 몹시 유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아까 잡아 말려놓은 큰 생선이 반이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서편에 사는 강아지놈이 사람들이 부산한 틈을 타서 반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강아지가 몹시도 미웠으나,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뛰어난 경치와 흥겨운 물고기 잡이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과 동고동락한 개 이야기”

장석영, 흑산일록, 1919-08-22

1919년 8월 22일. 장석영은 어제 항소심에서 극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이곳 대구에서 성주까지는 하룻길이기에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집으로 가기로 하고 하루를 묵었다. 밤에 창을 열고 지난 몇 개월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떤 짐승이 창 앞에 마주하여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쫓아도 일어나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전히 거기에 있길래 다시 쫓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장석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개는 일본인의 개인데 집을 떠나 얼마간 있다가, 댁의 아드님이 아침저녁으로 손수 밥을 짓고 음식을 마련하여 밥그릇을 받들어 감옥으로 가기 전에 이 문을 나서면 곧바로 아드님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일찍이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감옥 문 앞에 이르러 아드님이 문밖에 서서 밥그릇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 이 개도 그 곁을 지키면서 머물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밥그릇이 나와서 아드님이 돌아오면 개도 따라서 돌아왔다가 이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떠났습니다. 하루가 일상이 되어 출옥하는 날에도 여기 와서 지키며 몰아내도 가지 않는 것은, 필시 아드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장석영 역시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혹 사서 데리고 갈 수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일본인이 개를 팔 리도 없지만, 판다고 하여도 값을 많이 부를 것이라 만류하였다.

결국 장석영은 개를 사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아들에게 떠날 때 강아지를 쓰다듬고 따뜻하게 작별의 정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준 감정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이러한 강아지를 사서 함께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또한 강아지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아들의 효성을 전해 듣게 된 장석영은 한 번 더 감동을 자아내는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골린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하다”

변상벽(卞相璧), 〈영모도(翎毛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21 ~

1625년 1월 21일, (권별의 병세가) 종일 오락가락하며 일정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 각기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그 중 ‘정공(鄭公)이 고양이를 골린 일’에 미쳐서는 모르는 사이에 포복절도하였다.

“닭의 발톱에 얼굴을 다쳐 숙모의 상여도 따라가지 못하다”

남붕, 해주일록,
1922-10-16 ~ 1922-10-19

1922년 10월 16일, 남붕은 숙모의 장례가 내일 있어서, 종일 조문객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남붕의 집에서 기르는 닭을 도둑고양이가 물어가는 일이 있었다. 남붕은 놀라 흩어진 남은 닭들을 잡아다가 닭 둥지 속에 다시 넣어 두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닭을 살펴보려고 둥지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닭 한 마리가 갑자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며 남붕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닭의 발톱이 남붕의 눈 아랫부분을 할퀸 것이다.

남붕은 상처가 바람을 맞으면 부스럼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약을 바르고 나가는 일을 삼갔다. 다음날 새벽에 영구를 마을 밖으로 전송하였는데 하필이면 바람이 거세 얼굴에 바람을 맞을까봐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숙모와 조카의 심정과 처지에 있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해가 저물 때에, 윤초(允初) 아재의 모친 장사가 내일 있기 때문에 곡을 하러 가야 했는데, 상처 때문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다녀왔다.

10월 19일에는 숙모의 빈소에 가서 재우(再虞)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굴이 상처로 부어서 상여를 따라가지는 못 하였다.

“소를 가둔 죄로 파직당한 나무송(羅茂松)의 이야기”

김령, 계암일록, 1631-08-30 ~

1631년 8월 30일, 날씨는 종일 맑다가 흐리기를 반복하고, 늦가을 동풍이 몹시 쌀쌀하였다. 저녁 무렵 김령은 전에 예안 현감이었던 담양에 사는 나무송(羅茂松)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그가 파직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 봄 2월 무렵 김시익의 여자 종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소를 훔친 일이 있었다. 본래 흰 점을 가진 소였는데, 소를 훔친 자는 이후 일이 들킬까 염려하여 소의 흰 점을 검게 물들였다. 김시익의 또 다른 종 논복이란 놈도 소를 훔친 자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소가 새로 생긴 것을 관아에 고하고 입안(立案)까지 하였다.

그런데 소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연을 듣고 난 후 당시 예안 현감이었던 나무송은 곧 소를 데려다가 물로 씻어보도록 명령하였다. 과연 소 주인의 말대로 검은 부분이 물에 씻기자 곧 흰빛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를 옥에 가둔 뒤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형을 가하여 심문하였다. 또 장물인 소도 관아에 가두었다가 곧바로 소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의 주인은 현감의 처사에 매우 감사해하고 소를 돌려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무송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사헌부 관원이 나무송이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죄로 삼은 것이다. 억울한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준 것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 분명한데, 소를 가두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나무송의 허물이라고 윽박지르니 나무송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로 나무송이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소 한 마리를 잠시 가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무송은 아직도 그때의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듯하였다. 현명한 송사로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고도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으니, 김령은 진심으로 나무송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소를 가둔 것을 문제 삼아 현감을 파직시킬 기발한 생각은 대체 누가 했는지, 그 궁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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