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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조선 힙스터 허초희의
짧고 혹독했던 이승체험

선계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다


난설헌(蘭雪軒)이라는 호로 조선을 넘어서 중국, 일본까지 널리 이름을 날린 문인 허초희는 1563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강릉 바닷물로 만든 초당두부의 시조다. 누구의 딸이거나 누구의 아내로만 기록되어 여성이 이름 남기기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허초희의 이름은 남았다. 동생 허균이 누이의 문집을 펴내며 거기에 누이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다. 허초희가 짧은 생을 마치며 남긴 유언이 자신의 모든 글귀를 불에 태우라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의 유언은 충실하게 이행됐다. 살아생전 큰 힘을 지니지 못했던 그의 말 중에 오로지 마지막 말만 철저하게 따른 그의 남편 때문이었을 터였다. 허초희의 남편은 아내의 글귀를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날려버렸다. 허초희의 죽음에 크게 통곡했을 동생 허균은 누이가 보낸 편지와 친정에 남긴 글귀, 자신의 기억까지 닥닥 긁어모아 누이의 글을 남겼다.


『난설헌집(蘭雪軒集)』(출처: 오죽헌시립박물관)



허초희 전생은 신선이었을 것이다. 아니, 신선이었다. 심청이 전생에 서왕모의 딸이었다가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인간계에서 태어나 모진 이승살이를 겪었던 것처럼 허초희 역시 신선이었다가 영문 모를 연유로 인해 인간으로 태어났다. 심청이 효심이라는 화두를 안고 목숨을 초개처럼 바다로 던져 옥황상제의 용서는 물론 인간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얻어낸 것과 달리 허초희에게는 그럴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소중한 두 아이를 잃었고 한 아이는 뱃속에서 잃는 고통을 겪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나 보다. 허초희는 결국 인간 세상에 26년을 머물고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뮤지컬 〈난설〉의 시작


환한 빛이 하늘에 드리워지고
구름이 담긴 수레가 색의 경계를 넘어
노을로 된 난간이 티끌 세상을 벗어난다

선인도 아닌 티끌세상에 내가
하늘의 궁을 올리는 날에 초대되어
신들과 선인들께 시를 지어 바친다

- 뮤지컬 난설 중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


허초희의 일생 가운데 초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웠을 것이다. 신선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태어났다 해도 인간 세상이 조금은 즐겁다 여겨질 수도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배운 적 없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는데 그가 남긴 한시 213수 가운데 128수가 선계를 그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허초희를 묘사하는 글에는 늘 글재주가 출중했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 증거로 늘 가장 먼저 제시되는 글이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다. 광한전을 지은 신선이 누각인 백옥루를 짓고 잔치를 열었으나 그 많은 신선 가운데 상량문을 지을 시인이 없자 이승에서 허초희를 초대하여 상량문을 지었으니, 허초희가 지은 상량문이 바로 이 내용이다. 신선 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했거니와 형식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이 상량문을 진실로 8살에 썼다면 허초희는 천재거나 신선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사실 이 상량문 하나만으로도 상상 속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펼쳐나갈 수 있을 정도다.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여성이 신선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이야기에서 이미 어린 초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희의 아비였던 허엽은 딸의 재능을 아껴서 그 당시 당시의 명인이었던 이달을 시 선생으로 붙여주었다. 허균 역시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문장은 형인 허봉이나 허초희 아래라고 평가된다. 여섯 살 터울인 남매는 이달에게 시를 배우며 일취월장했다고 전해진다. 시 스승이었던 이달은 서자 출신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길 없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였다. 이등 시민의 삶을 사는 이달의 모습은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되었고 결국 허균이 신분사회를 철폐하는 혁명을 마음먹게 되는 동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게 문제가 되어 허균은 역모자로 몰려 죽는다. 허균이 처형을 앞둔 마지막 날 밤, 그가 떠올린 건 누구였을까?


뮤지컬〈난설〉 포스터(출처: 콘텐츠 플레닝)



뮤지컬 〈난설〉은 여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마도 뮤지컬 난설은 허초희가 열 다섯이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혼인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뮤지컬 〈난설〉은 작품을 끌어가기 위해 허균과 허초희의 나이 차를 좁힌다. 여섯 살이 아니라 두 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남매로 설정한 것은 허균의 옷을 허초희가 빌려 입고 남장을 하여 세상 구경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허초희가 혼인을 올렸을 때 허균의 나이가 아직 아홉 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설정의 변화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뀐다. 우선 이달과 허초희가 당연한 결과로 사랑에 빠지고 이들은 사랑의 도피를 꿈꾼다. 하지만 정작 이 두 사람을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아버지인 허엽을 찾아가 비는 것은 허초희도 이달도 아닌 어린 허균이다. 허초희가 입 밖에 내지 않은 염원을 스스로 입 밖에 내서 심지어 허락을 받지만 그날 밤 이달은 나타나지 않는다. 허균은 자신 인생의 마지막 날 밤에 기억 속의 이달을 불러내어 그때 왜 자신들을 버렸냐고 한탄한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히 간직한 허초희를 불러낸다. 그의 뮤즈이자 가장 존경하고 아꼈던 누이를….


뮤지컬 〈난설〉의 한 장면 (출처: 인터파크 플레이 https://www.youtube.com/watch?v=MLMfU3BVtIA)더보기


허초희는 신선 세계를 그리워했다. 신선들의 세상에서는 남녀도 없고 신분도 없었다. 자신이 수련한 만큼의 신선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남녀 구분이 지독했고 허초희의 남편은 연달아 과거시험에 낙방하면서 아내의 재주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쪼잔한 인간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허엽은 딸의 재능을 키워주었지만 신사임당처럼 친정에 허초희를 머물게 하며 사위를 오라 가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허초희를 시집 보낸 뒤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허초희에게는 친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복 오빠가 있고 그가 자식처럼 허초희를 돌보았지만 친정처럼 든든한 담장을 마련해줄 수는 없었다. 허초희 인생의 앞쪽 절반이 자유롭게 시를 지으며 자신을 연마하는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면, 뒤쪽 절반은 배우지 않았어도 좋았을 엉뚱한 인내를 익혀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힙했던 신선에게 전하는 안부


허초희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알았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소천지(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그의 한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 그는 자신을 둘러싼 제약 중 제도의 한계를 먼저 짚어냈다. 남편의 속 좁음은 제도 안에서 부릴 수 있는 열등감의 표출이자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자유로웠던 가풍의 친정아버지와 오빠들이 세상을 따나자 허초희는 더욱 더 고립무원이 되어갔다. 주문처럼 선계를 시로 불러 보아도 눈을 들면 먹처럼 깊은 어둠뿐이었다. 마음 붙일 유일한 존재였던 두 자식을 연이어 잃고 뱃속의 아이까지 죽으면서 초희의 인생의 붉은 기운, 생기는 한계에 다다른다.


허초희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약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스물이나 일곱 송이 부용꽃은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 찬 달 아래에…

-〈몽유광산산夢遊廣桑山〉 중-


그의 유언과도 같은 시 〈몽유광산산夢遊廣桑山〉을 보면 그는 삶을 이어가지 않기를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뮤지컬 〈난설〉은 초희가 혼인을 올리기 전까지의 삶을 다루지만 이미 그곳에서 허초희의 삶은 절절하게 자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허초희는 서얼인 이달에게서 여성인 자신과 같은 이등 시민으로서의 고뇌를 보며 동병상련과 동경을 애정으로 엮는다. 뮤지컬 〈난설〉은 이달과 허균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허초희의 이야기다. 허초희가 직접 나섰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허난설헌이라는 호의 이 여성이 지은 글귀를 현대적인 가사로 재해석한 노래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난설헌이 세상을 떠난지 오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이 더 흘렀어도 여전히 그의 꿈은 요원하다. 선계로 돌아간 그가 부디 이 사실을 몰랐으면 싶다. 선계에서의 오백 년이란 어떤 시간일까. 조선에서 가장 힙했던 신선에게 안부를 전한다.

뮤지컬 〈난설〉 2019 프레스콜
‘난설’ ‘묵’ ‘광한전백옥루상량문(변주곡)’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과 자리를 함께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흑립(출처: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14일 잠시 흐림. 용만관에서 떠나 소관관(所串館)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川)까지 50리를 가서 양책관(良策館)에서 잤다.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15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잠을 깨니 빗발이 부슬부슬하는데, 지다 남은 꽃과 여윈 꽃술이 암벽 사이에 윤기(潤氣)를 머금고 있어, 지난겨울의 풍경에 비하여 배나 아름다웠다. 잠시 천연정(天淵亭)에 올라가 풍악을 듣다가 떠났다.
차련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에는 관 앞에 반송(소나무)이 있어 울창하고도 우툴두툴하며 높다랗게 우뚝하여 일산과 같았으므로, 명나라 가는 사신들의 시의 소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동림성(東林城)을 지나다 보니 길에 아름드리 솔이 많은데 검푸른 빛이 하늘에 닿았으며 어둑하게 칙칙하고 그늘이 져, 지나가기가 마치 굴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장(別狀) 정관(鄭觀)은 연경에 들어갈 때의 만상(灣上 : 의주)의 군관(軍官)이었는데 먼저 진(鎭)에 도달하였다가 길에서 맞아 절하고 이어 성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대가 그다지 높지는 않은데 건물의 제작이 자못 든든하고 크며 편액을 ‘동림수대(東林帥臺)’라 하였다.
대체로 그 성가퀴는 산을 따라 빙 둘렀지만 그래도 요충(要衝)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성을 고쳐 쌓아 그 남쪽 부분을 넓히면 보장(保障)할 수 있는 요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나, 애석하게도 건의하여 힘을 들이려는 사람은 없다.

대의 북쪽에 별장(別將)의 일 보는 곳이 있는데 건물이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며, 또한 창고에 곡식이 만 곡(斛 한 섬)이 넘게 있는데, 선천부(宣川府)에서 관장한다. 성안의 민가는 열두어 호에 지나지 않으나 이익 내는 것이 박하기 때문에 하나도 모여드는 자가 없다. 앞으로 방수(防戍)하여 막아 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변란이 생겼을 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될까 걱정스럽다.
정관이 음식 한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이옥은 북한산 유람 중이었다. 절들을 돌아보니 승려〔緇髡〕 12(十二則)
승려의 옷은 베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푸른 면포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또는 검은 베로 만든 직철(直綴, 윗옷과 아래옷을 하나로 합쳐 꿰맨 장삼) 두루마기였는데, 소매는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단통모(短桶帽), 포량첨건(布梁簷巾), 폐양립(蔽陽笠, 패랭이) 등이 있고, 대나무 껍질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립(籉笠)이 있는데, 거기엔 입첨(笠簷)이 있어 사립(絲笠, 명주실로 싸개를 하여 만든 갓)과 비슷하며, 위는 항아리 같은데 그 꼭대기는 병(缾)의 입 모양처럼 되어 있다.
승려들의 띠는 대체로 명주실로 땋은 것이다. 혹 명주실로 땋은 것 중에 붉은 끈을 맨 자는, 옥이나 금으로 만들어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모자에 붙이기도 하였다. 또 아의(鴉衣)를 입고 털로 짠 벙거지를 쓰고, 벙거지 꼭대기에는 홍이(紅毦, ‘이’는 새의 날개에 여러 빛깔로 물들여 군복·말안장·투구·전립 등을 꾸미는 것, 속칭 상모)를 나부끼며,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승려의 염주는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 것이 많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율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사는 모양이 보자기 비슷하지만, 타원형이며 비늘을 이어놓듯 만드는데, 옷의 좌우에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수놓은 글자를 붙였다.
월광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자주색, 녹색, 푸른색의 끈 세 개를 늘어뜨렸다.
승려의 말에, “이 옷을 꿰매는 데에는 법도가 있고, 길이는 정해진 치수가 있고, 만들 때는 기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잘못되게 할 수도 없고 감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이 비호해 주는 바요,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가사에서 붉은 면포로 만든 가사를 한 번 보았다.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행장〔行李〕2칙(二則)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철쭉나무 지팡이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얼룩반점이 있는 대나무)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시를 지어 쓰는 무늬 있는 색종이 묶음)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비옷)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나섰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불을 일으키는 도구)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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