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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성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유람’

공병훈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고 있지만 우리의 산천은 남녘에서부터 봄꽃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겨울 색채를 품던 숲과 들, 그리고 계곡은 연하고 푸른 봄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4월이 되었습니다. 움츠려 지내던 모든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며 만물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봄의 움직임을 따라 사람들의 움직임에도 싱그러움과 활기가 넘쳐나는 듯합니다. 옛 선인들도 이맘때가 되면 봄 풍경을 찾아, 만물을 품은 큰 산을 찾아 유람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 중 4월의 청량산은 영남지역 최고의 유람지로, 성현의 자취를 깨치고자 벗들이 함께 산행 길에 오르던 선비들도 가득했다고 합니다.


청량산의 봄은 2018년의 표현으로 말하자만 조선시대의 사회적 연결망이 꽃을 피우던 계절이었을 것입니다. 소셜(social)이란 단어를 웹스터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친구나 동료와의 기분 좋은 동료애를 지니거나 느낌이 있는’, ‘협동적이며 일정한 유형의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는 경향의, 무리의, 사교적인, 다소 조직된 커뮤니티 안에서 살고 번식하는’처럼 동맹군, 친구, 동료, 상호작용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 웹진의 주제는 “유람, 청량산”입니다.


이문영 선생님은 청량산 유람을 떠나는 선비의 마음가짐과 그 여정을 ‘정생의 청량산 유람기’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꾸며 주셨습니다. 조선의 선비 되는 자, 청량산을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 정생이 그 소원을 이루는 날, 청량산을 평생 사랑하여 자신을 ‘청량산인’이라 칭하였던 퇴계 이황 선생을 만나고, 신라 시대 명유(名儒) 최치원이 마시고 총명해졌다는 ‘총명수’ 한 잔을 들이켜고, 청량산의 열 두 봉우리의 이름을 지은 주세붕을 만나는데. 신선이 된다는 만월암에 잠이 든 정생의 꿈이었습니다. 정생의 한낮의 꿈을 따라 청량산에 얽힌 선현들의 흔적을 유쾌한 필체로 담아주셨습니다.


강유현 선생님은 성현의 자취를 답사하고, 산수로부터 도를 깨치려 청량산에 오르는 선인들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람 풍경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색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은 산수에 담긴 도를 음미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유람의 경지라 강조해왔습니다. 결국 자연의 질서를 통해 천지의 도리를 깨치는 호연지기가 곧 유람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준엄한 모습의 청량산이 영남지역 사대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유람지였던 이유를 다양한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담아주셨습니다.


이승훈 작가와 장순곤 작가의 스물다섯 번째 연재만화 ‘요건 몰랐지’에서는 ‘선경의 명산, 청량산’을 오르는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의 유람기를 재미있는 만화로 펼쳐주셨습니다. 청량산에 올라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라는 퇴계 이황의 시를 읊으며 마음에 되새기는 삿갓 김씨와 집 놔두고 산꼭대기에서 공부하려 한다며 힘들어 죽으려는 종놈 칠복이의 투덜대는 유쾌한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영화 <여자 정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8년 2월 가정주부 ‘변월수씨가 당한 성폭행 사건’ 재판, 정조 14년 강진현 ‘김은해 사건’ 등을 통해 우리 시대와 조선 시대 여성의 존재와 비극이 ‘말하지 못함’으로 어떻게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물결과 변화를 만들고 있지만 빛과 어둠을 함께 드러내며 확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미투 캠페인이 지니는 의미를 가슴 아프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의 두 번째 글입니다.


이번 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판 인증 샷, 계회도(契會圖)에 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계회도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특별한 만남을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사진기가 없던 시절에 남겨진 기록 사진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인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된 계회도에 관해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알림 하나 있습니다. 제4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이 4월,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 사이트를 통해 공고할 예정입니다. 전국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淸明)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로 가득하던 하늘도 봄의 햇빛과 바람이 언제나 웹진 '담談'을 아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함께 할 것입니다. 봄인가의 마음으로 담아 청량산 유람을 담은 퇴계 이황의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를 전합니다.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와 산 유람이 비슷하다 하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 유람이 독서와 비슷하네.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이 다할 때에는 자연히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 얻는 것은 모두 이에 있다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구름 피어남을 보고 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근원에 도달하여 비로소 시작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 그대들 절정 높은 곳으로 힘써 오르라.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도에 그만두니 심히 부끄럽네.




“퇴계의 시에서 청량산을 읽다”

김몽화, 유청량산서(遊淸凉山序)

청량산은 예안(禮安)의 동북 지역에 우뚝 솟아 있는데,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께서 왕래하며 그 가운데서 쉬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절 안과 문밖에 유람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니 어찌 (퇴계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을 사모함은 사람마다 똑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고금의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숨겨진 곳을 찾아 끝까지 탐색하고 빼어난 경치를 그윽이 감상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지만, 누가 등산의 묘한 맛은 눈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노선생께서는 산수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인지(仁智)의 취미를 드러내셨다.
그전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妙意祇難言(묘의기난언) 기묘한 뜻을 말하기 어려우나
佳處每獨領(가처매독령) 아름다운 곳은 매양 홀로 도맡았네.

라고 하셨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김영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청량산 등반가, 17년 동안 13회 오르다”

금란수, 보현암벽상서전후입산기

청량산(淸凉山)은 산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나귀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경우나 질박한 옷을 입은 채 오래도록 머무는 경우에 있어서도 다른 산과는 매우 다르다.
금난수는 정미년(1547년, 명종 2년) 봄에 이 산을 두루 거치며 들어가 본 뒤에야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기유년(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이비원(李庇遠), 이임중(李任仲)과 함께 산에 들어가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다. 구경서(具景瑞), 윤이직(尹而直), 권자반(權子胖), 김대보(金大寶)가 이미 이 암자에 우거하고 있어서 날마다 구경서 등 여러 사람과 서로 모여서 독서한 것을 강론하였다.
경술년(1550년, 명종 5년) 봄에 또 이 암자에 묵었다.
신해년(1551년, 명종 6년) 음력 7월에 또 연대사(蓮臺寺)에 묵었는데, 퇴계(退溪) 선생께서 송행시(送行詩)를 지어 주셨다.
임자년(1552년, 명종 7년) 여름 6월에 산에 들어가 홀로 안중암(安中庵)에서 한 달을 머물고는 만월암(滿月庵)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한 달 쯤 지나 안중암으로 돌아왔다.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09-02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열두 봉우리 이름, 주세붕 선생이 짓다”

김득연, 유청량산록, 1579-09-01 ~

1579년 9월 1일, 청량산 유람을 떠난 김득연 일행이 드디어 동문(洞門)에 들어갔다. 옛 성이 있는데, 들쭉날쭉 나 있는 나무들 속에 깊숙이 숨어 있기에, 승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 공민왕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 터무니없는 전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전쟁이 요란하던 날 어지러운 병사들에게 쫓기던 임금이 한 모퉁이에서 아침저녁을 구차하게 살아 있던 것을 생각해보니, 한 거친 성가퀴가 만고에 근심을 머금었으나, 지난 일이 황당무계하여 논할 수 없다. 낙수대(落水臺)를 지나니, 냇물이 돌에 흐르는 소리가 옥 소리처럼 영롱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골짜기가 고요하고 숲이 우거져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이 쌓이고 모여 있었다. 한 승려가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이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옛날 한 승려가 연대사(蓮臺寺)를 창건하려고 뿔 셋 달린 소로 변하여 재물을 나르고 일을 하였는데, 온 힘을 다하다가 하루 만에 죽어 구덩이를 파 매장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득연이 말하기를, “신령함을 받고서 인간이 되었으니, 반드시 소로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는 눈으로 그 사실을 보았는가?” 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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