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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정확한 사건 조사로
억울한 이가 없게 하라

천준아


어두컴컴한 밤, 산속을 달리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경구. 산기슭 명당에 자리 잡은 남의 묏자리에 몰래 장사를 지내려다 들켰죠. 묘지의 주인인 이기종과 문중 사람들에게 죽을 만큼 두들겨 맞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는데요. 하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숲길, 이기종과 사람들에게 쫓기던 그는 결국 낭떠러지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이튿날, 절벽 아래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데요. 도망치다 헛발질로 떨어져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이기종과 문중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떨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게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드립니다. 다친 부위는 등과 귀밑에 집중돼 있었고, 목뼈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대충 감이 오나요? 제 발로 떨어져 죽은 사고사인가요? 아니면 타살인가요?

관찰사는 미처 낭떠러지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도망치다 떨어져 죽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보고서를 받은 정조는 사망원인이 불분명하다고 봤고, 다만 이경구를 죽을 만큼 매질한 것에 경중을 물어 이기종을 유배하라 명합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훗날 이 사건을 접하고 안타까워하죠. 자기 스스로 몸을 던진 자는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다리와 발, 팔에 상처가 많지만 떠밀려 떨어진 경우에는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으므로 얼굴 부위에 상처가 몰린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경구는 떠밀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흉악한 범죄 사건을 접합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대검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한 해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천 건 내외라고 합니다. 그런데 검거율은 무려 96.8%에 달한다고 하네요. 문득 프로파일링 기법이나 법의학 체계가 없었던 옛날에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무고하게 범죄자가 되었을까 혹은 어떻게 억울함을 풀 수 있었을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해서 무더위가 본격화되는 7월을 맞아, 담談의 53호 주제를 ‘조선 시대 법의학’으로 정했습니다. 서늘하고 오싹한 사건들을 통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얕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드라마를 집필하는 김재이 작가는 [신주무원록]을 참고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새로 구성해 들려줍니다. 정수리에 침을 꽂아 살해당한 사람과 자살로 위장된 시신에서 어떻게 타살의 흔적을 발견했는지 주인공 서인의 조사 과정을 따라갑니다. 현대에는 ‘루미놀’이라는 액체를 통해 혈흔을 구별해 내는데요. 조선 시대에 혈흔을 찾아내는 방법은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실 겁니다.

특히,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박지혜 연구원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조선 시대와 현대의 과학 수사를 비교한 김현경 소설가의 글이 도움이 되실 텐데요. 사건의 수사부터 검시, 부검에 이르기까지 세분해서 비교한 데다, 동일한 상황에서 조선 시대와 현대의 과학 수사 기법은 어떻게 다른지도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앞선 두 글이 조선 시대의 법의학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면, 홍윤정 작가님은 당시 억울한 백성들의 심정과 사연에 초점을 맞춰, 미디어가 조선 시대 법의학을 어떻게 그리는지 파고듭니다.

이밖에, ‘이달의 일기’에서는 조재호의 [영영일기]에서 찾은 안음현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칩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 그리고 정약용의 [흠흠신서]에 대해 알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스토리이슈’에서는 조선 시대 만여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이 왕에게 올린 청원서인 ‘만인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얼마 전, 전라남도 강진에서 꽃다운 여고생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당시 신원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가 심했는데요. 하지만 법의학을 통해 여고생임이 밝혀졌고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법의학에서 시신은 죽은 자의 소리 없는 메시지라고 말하곤 합니다. 부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참고 문헌


  •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김호 지음, 성안당)



“기질이 억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안음현에서 살인사건이 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8 ~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도기찰(都譏察) 김한평(金漢平)과 사후(伺侯) 김동학(金東鶴)과 더불어 지대면(知代面)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관가(官家)에 들어오던 중, 행차가 장수사(長水寺) 뒤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도적 10여명이 불쑥 나타나 도기찰과 사후를 난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태건과 구운학 두 사람은 몸을 피해 달아나 사건을 고할 수 있었으나, 아마도 그 사이에 도기찰 등은 분명히 운명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안음현감은 매우 놀라 위의 변고(變故)를 고한 김태건과 구운학 등을 우선 잡아가둔 후에 사실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함께 죽은 데다, 죽은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군관인 도기찰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으며, 더욱이 도적 10여 명이 출몰하였다 하니 큰 사건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은비녀와 흰밥을 이용해 시험하니 독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검시결과 김한평(金漢平)과 김동학(金東鶴) 두 사람 모두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비녀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흰밥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독살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주무원록에서 밝힌 격식에 따라 시장에 검시 내용을 기록하다”

『신주무원록』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처음에 덮었던 포대 2장을 제거하니 다음으로 베적삼 하나, 다음으로 무명 바지 하나 등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발을 서쪽으로 하고 전면(前面) 이 되도록 눕히고는 오작(件作) 양인(良人) 하순걸(河順乞)로 하여금 차례차례 벗기고 돌려 눕혀 법물(法物)로 몸을 씻기게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시하였다.
나이는 35, 36세가량 남자. 신장이 5척이고 머리털 길이가 2척이고 두 눈이 반쯤 열렸고 입이 반쯤 열렸고 혀가 이[齒]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온몸에 색깔이 엷은 황색이다. 두 손은 조금 쥐었고 두 다리는 곧게 뻗었고 음경[莖物]과 음낭[腎囊]은 아래로 늘어졌다.
전면[仰面]의 상처는, 머리 부분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는데 길이가 1촌 1푼이고 넓이가 3푼이고 깊이가 2푼이고 혈액이 흐르고 부드럽다. 이마(顖門) 두 곳에 피부 찰과상이 있는데 색깔이 자줏빛이고 모양이 작은 팥알 조각 같고 매우 단단하다. 눈썹[眉叢] 왼쪽에 피부 찰과상은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눈꺼풀[眼胞]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2푼 5리이고 넓이가 7리이고,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왼쪽 눈동자[眼睛]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3푼이고 넓이가 2푼이고 색깔이 자줏빛 이고 매우 단단하다. 위아래 입술[脣]은 조금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왼쪽 아랫입술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길이가 6푼이고 넓이가 1푼이고 색깔이 조금 검붉고 매우 단단하다. 아랫입술 아래는 많이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결분 뼈[缺盆骨]에 피부 찰과상 한 곳이 있는데 직경이 4푼이고 색깔이 엷은 검은색이고 매우 단단하다.

“살인사건이 나면 관할 수령과 인근 수령이 직접 시신의 검안을 실시한다”

『검요』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10 ~

1751년 7월 10일, 성주목(星州牧)에서 죽은 유기장(柳器匠) 조수업(趙守業)의 시신(屍身)을 관할 수령 성주목사(星州牧便) 신준(申晙)이 초검(初檢)을 실시하였으며, 인근 수령인 고령현감(高靈縣單) 정창유(鄭昌兪)가 전례대로 복검(勸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전임 경상감사(前慶尙監司) 민백상(閔百祥)이 이임(離任)하여 올라가는 길에 보고하였으며, 또 신임감사 조재호가 부임한 초에 등본(謄本)으로 하여 보고하고 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1 ~ 1616-07-14

1616년 7월 11일, 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말도둑 사건’ 처리 문제로 다시 관아에 들어가 현감을 만났다. 그리고 잡히는 과정에서 막복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었던 춘금이가 밤사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현감은 춘금의 어미와 친족들을 모두 불러 이 사실을 전달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숙은 일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하고 현감을 설득하려하였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이 날은 그냥 돌아와 아버지인 택룡에게 걱정만 늘어놓았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은 수심에 찬 채로 다시 현감을 만나러 갔다. 현감은 더 강경하게 나왔다. 활을 쏜 막복을 살인자라고 감옥에 가두고, 이웃의 영천 군수에게 춘금의 검시까지 요청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말도둑 사건은 관심이 없고,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 법적 절차대로 해결하려 했다. 택룡의 큰 아들이 수 차례 설득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현감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 날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택룡과 그의 큰 아들은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출처 : 세계유교문화재단)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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