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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명당은 어디에 있나

천준아


조상의 묏자리 갈등으로 400년을 아옹다옹한 두 집안이 있습니다. 파평 윤씨 가문과 청송 심씨 가문인데요. 1662년에 시작된 분쟁은 2007년이 돼서야 결론이 납니다. 17세기의 대립이 21세기까지 이어진 셈인데, 정확히 따지면 345년입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 CNN에서까지 이 사건을 해외 토픽으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발단은 청송 심씨 가문에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를 파주 광탄면에 있는 산에 쓰면서 시작됩니다. 묏자리를 찾던 중, 오래도록 방치된 묘를 발견했는데 심씨 가문은 개의치 않고 근처에 묏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묘가 파평 윤씨 가문의 조상인 고려 시대 학자이자 장군, 윤관의 묘였던 것이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763년에 파평 윤씨 측이 조상의 묘역을 찾던 와중에 심지원의 묘를 발견하게 됩니다.

윤씨 측은 우리가 먼저니 이장하라고 요구했고, 심씨 측은 그동안 관리도 안 해놓고 왜 이제야 그러냐며 맞섰는데요. 중재에 나선 왕, 영조도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건, 파평 윤씨 가문은 성종비, 중종비 등 왕비 4명을, 청송 심씨 가문은 세종대왕비를 비롯해 왕비 3명을 배출한 그야말로 명문가였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조선 시대 임금도 풀지 못한 두 가문의 갈등은 2007년 윤씨 가문이 이장에 필요한 2500평의 땅을 제공하고, 심씨 가문이 이장에 합의하면서 끝이 납니다.

이런 묏자리 갈등은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일인데요. 과연 명당에 조상을 잘 모시면 후대가 잘 될까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전주 감찰사로 부임했을 때 재미있는 자료를 수집합니다. 풍수를 아는 지관들을 불러 관할 지역의 땅을 명당과 흉당으로 분류하게 한 뒤, 후손들의 삶을 추적하게 한 것이죠. 흥미진진하죠?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요? 여러분의 예상대로 제각각이었습니다. 명당에 모셔도 망한 후손이 있고, 흉당에 모셔도 잘 된 후손이 있었던 겁니다.

대체 왜 이렇게 ‘묏자리’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단순히 후손의 발복을 염원하는 이유였을까요? 김성갑 선생님은 조선 시대에 묏자리 소송이 80% 이상이었던 이유를 심층적으로 파고듭니다. 거기엔 인간들의 오랜 욕망인 ‘땅’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찬찬히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문신 작가님은 남의 묘지에 몰래 조상의 묏자리를 쓰는 ‘투장’에 얽힌 두 집안의 갈등을 짧은 소설로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마치 시간을 건너 그 자리에 있는 듯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이밖에, 홍윤정 작가님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속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명당’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달의 일기’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간 아들의 묏자리를 살피는 과정을 ‘조성당일기’를 통해 들여다보고요. 또,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묏자리와 산소를 그린 그림, ‘산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9월엔 민족의 명절, 추석이 있습니다. 때에 맞춰 ‘묏자리’를 주제로 정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명절이면 도리어 후손들에게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드리기 위해 모인 그곳이야말로 명당이 되면 어떨까 싶습니다. 분쟁 없이 반목 없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길 바라봅니다.


참고 문헌


  • 최창조,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 고릴라박스(비룡소), 2015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1616년 7월 24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鄭得)이 조상 묘가 있는 산의 산송(山訟) 때문에 영천으로 갔다.
8월 9일, 김택룡은 누님에게 가서 인사했다. 생질 정득이 산송 때문에 영주에 간 뒤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10일, 김택룡은 여러 곳에 편지를 쓰면서 생질 정득에게도 편지를 써서 빨리 돌아오라고 통지했다. 이날 경복(景福)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말을 끌고 돌아왔는데, 경복의 족아(族兒)인 이름이 충남(忠男)이라는 놈이 김택룡을 찾아와 말하기를, 생질 정득이 산송(山訟)과 그 조상 묘에 참배하고 소제하는 일 때문에 머무르고 있어서 와서 알린다고 하였다. 정득이 김택룡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 주었다. 이틀 뒤 8월 12일, 정충남이 돌아가기에, 김택룡은 그 편에 생질 정득에게 할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따로 쓰지 않았다.
8월 23일, 이손(李孫)이 영주에서 돌아와 김택룡에게 인사하러 와서 생질 정득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에는 산송 사건 때문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으며, 애남이를 이산(伊山)에서 만났는데 오늘 김택룡이 있는 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9월 7일, 김택룡이 장세훈(張世勳)을 만나 생질 정득의 산송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박씨 집에서 근래 산소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일꾼을 동원하는 패자(牌子)를 마을 이장이 가지고 갔다. 다음 날 8일, 김시성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만났는데, 그가 박가(朴家)의 산송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그러면서 전하길 김택룡이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생질 정득에게 주었기 때문에, 박가네에서 김택룡을 원망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그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해 주고, 또 술을 대접하고 보냈다.
9월 20일, 산송 사건에 대해서는 영주에서 무덤을 파서 묘지석(墓地石)을 얻는 여부에 따라 진위를 증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이 다음과 같이 내려져서 일단 산송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1616년 9월 25일, 김택룡의 생질 정득이 영주 이산(伊山)에서 돌아와 소지동(蘇池洞)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김택룡에게 말하길, 오늘 박가가 감사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송사가 걸렸던 산에서 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정씨 친족들이 모두 모여 금지시키고 중지시킬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택룡이 이미 박가가 산송 다툼이 일어난 바로 그 곳에 묘를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다시 묘자리를 잡았으니, 두 집안 모두 장례를 허용하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수 등 여러 공들이 김택룡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만나러 들어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정소(呈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피하고자 해서였다. 생질 정득만 김택룡을 찾아 왔다.

“사람을 불러 함께 아들의 묏자리를 돌아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01 ~ 1617-03-03

1617년 3월 1일, 김택룡의 노비 강아지가 산을 보고 묏자리를 잡는 일 때문에 이자정을 초대하러 말을 끌고 회곡(檜谷)으로 갔다. 김택룡은 편지는 쓰지 않고 말로만 강아지에게 해 주면서 이자정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이자정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지난 번 이날 쯤 오겠다는 약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룡은 강아지와 말이 바로 들어가 이자정에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3월 2일, 이자정이 김택룡의 집으로 왔다. 와서 말하길, “사람과 말을 보내주지 않으셔서 오늘에서야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이자정과 말을 끌고 간 강아지가 길이 어긋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김택룡과 이자정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되자 사랑채에서 잤다. 김택룡의 셋째 아들 김각도 함께 잤다.
3월 3일, 아침 식사 후에 김택룡은 이자정과 김숙·김각 두 아들, 권전룡과 함께 가동(檟洞)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지나 산의 형세가 융결(融結 : 산의 기운이 뭉쳐 모여 있음)함을 보았다.

“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미상, 임천서당중건일기,
1806-05-03 ~ 1806-05-04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1739년 8월 5일, 권상일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지역 서원의 인사 문제에도 일일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지역 인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 가문을 찾아가 일일이 뵙는 것도 노령의 권상일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문제보다도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상일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어서 권상일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가 아뢰고, 또한 배자(牌旨)를 내어 소송의 상대편이었던 황야(黃埜)라는 자를 잡아오자마자 일제히 나아가 심문하여 보름날 전에 무덤을 파서 옮기겠다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황야는 곧 관청에 하옥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문중 사람들의 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황야라는 자가 문중의 묘소에 몰래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관청에서 투장한 묘를 당장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장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중에서 직접 황야를 잡아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일이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황야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종이 무덤을 파간 다음에 땅을 고르고 원 상태로 되돌린 뒤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야가 또 다시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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