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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맷돌에 콩 갈아 눈빛 물이 흐르거든

공병훈


소설가 박완서는 [두부]라는 수필에서 이야기 한다. “징역살이를 속된 말로 ‘콩밥 먹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출옥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다.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두부는 다시는 옥살이 하지 말란 당부나 염원쯤으로 되지 않을까.”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 이에게 건네주던 두부에는 우리 사회의 어둡고 슬픈 시대의 그림자와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벼의 재배는 BC 1500~2000년경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잡곡으로는 기장, 보리, 조, 수수, 팥 등과 함께 콩이 생산되었습니다. BC 2000년경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콩은 곧 중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가 문화라는 관점에서 콩과 두부만큼 우리 음식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드물 것입니다. 고구려인은 콩을 발효시켜 소금을 섞는 조리가공법을 개발하여 일종의 메주를 만들어 썼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고구려에서 장을 잘 담근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두부는 중국 한나라 또는 당나라나 송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고려 말 원나라에서 두부 제조법이 전해졌습니다.

고려 말, 조선시대 선조들은 두부에 대한 애정이 매우 특별한 수준이었습니다.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은 “기름에 부친 두부 썰어서 국 끓이고 파까지 넣으니 향기가 진하다”, “맛없는 채소국만 오래 먹으니 두부가 방금 썰어놓은 고기 비계 같구나”, “오랑캐 머릿속에는 오직 우유 생각뿐이지만 이 땅에서는 두부를 귀하게 여기니 하늘이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다.” 등 두부를 소재로 많은 시를 썼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육식이 금지된 절의 승려들에게 식물성 단백질이 필요했기 때문에 절에서 두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사찰 두부’가 유명해지고 제사 음식이 되면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왕릉 인근의 사찰을 지정하여 두부를 만들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 절들을 조포사(造泡寺)라고 부르게 됩니다.

봄이 다가 왔지만 아직 산과 들에는 풀과 꽃이 드물고, 제일 추운 날이 있는 달이면서 1년 중 가장 짧은 날들로 한 달을 채우기에도 바쁜 2월이 왔습니다. 2월 웹진 담談은 따뜻한 봄날의 느낌을 담은 ‘두부’를 주제로 조선시대 양반의 식문화를 담아보았습니다.

주영하 선생님은 두부의 유래를 살피며 [계암일록(溪巖日錄)]의 김령이 할아버지 김유와 함께 쓴 요리책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 두부의 제조법을 흥미로운 다큐멘터리가 펼쳐지듯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절에서 두부 요리를 먹는 모임인 연포회(軟泡會)를 열어 서로 교유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연포회를 연다고 하면서 사적 결사 모임인 계를 조직하는 선비들도 있으며 그런 연유로 영조 때 연포회가 금지되기까지 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김나임 작가님은 보통 죽, 정식 아침밥, 간단한 점심, 화려한 저녁밥, 잠들기 전의 간식 등 하루에 5끼를 먹었던 조선 양반들의 하루를 ‘어느 양반의 하루 밥상’이라는 웹툰에 담아주셨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가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귓가에 맴돌게 해줍니다.

정용연 작가님은 ‘이달의 일기’에서 김령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의 1603년 9월 28일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을 배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가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작품으로 그려 주셨습니다. 두붓국인 연포탕을 즐기기 위한 연포회에 모인 양반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홍윤정 작가님의 ‘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수랏상과 토란 한 알’이라는 글에서 영화와 드라마에 담겼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주셨습니다.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씨간장으로 장아찌를 담가내 간장 종가의 역사를 인정받고 성공하는 2016년 드라마 [내일도 승리], 간장 전문 식품회사를 배경으로 ‘어간장’과 ‘씨간장’의 대결로 요약되는 2014년 드라마 [잘 키운 딸 하나], 영화에서 소품으로 사용된 음식을 직접 만들었으며 기생집에서 임금님의 수랏상처럼 음식이 차려지고 제기를 사용하던 오류를 바로 잡고 백자기, 놋그릇, 9첩 반상, 개다리소반의 사용 등 정확한 크기와 상차림을 연출했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백성과 더불어 먹는 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을 통해 광대였던 이가 진정한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춰가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 [광해], 수봉(박보검 분)이 이순신(최민식 분)에게 토란을 건내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명량] 등에서 우리의 음식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김민옥 선생님은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기획의 두 번째 이야기로써 ‘오직 보물은 청백, 보백당(寶白堂)’이라는 제목으로 보백당을 소개합니다. 보백당은 평생 청렴과 강직을 실천했던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의 종택 별당의 편액입니다. ‘보백’의 의미는 김계행의 시 가운데 ‘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다)’이라 한데서 보(寶)와 백(白) 자를 취해서 당호로 삼았습니다. 편액은 글씨로써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글씨는 다양한 형태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보백당 편액의 글씨에서는 바르고 옳은 길을 택해 강인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김계행과 김가진, 두 선현의 삶의 궤적이 담긴 듯합니다.

이번 호의 스토리 이슈에서는 스토리테마파크의 애니메이션 콘텐츠인 ‘조선의 두부와 연포탕’을 보여드립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각자료로써 스토리테마파크에 마련되어 있던 내용으로 조선시대 두부가 얼마나 사랑받는 음식이었는지 알려 줍니다.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고 하는 2월 4일 입춘(立春)과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고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설날이 2월 5일로 붙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먹는 맛있는 음식으로 따뜻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라며 편집자의 말의 제목으로 빌려온, 권근(權近)의 시를 배달합니다.

맷돌에 콩을 갈아 눈빛 물 흐르거든
끓는 솥 식히려고 타는 불 거둔다.
하얀 비계 엉긴 동이 열어 놓으니
옥 같은 두부덩이 상머리에 가득하다.
아침저녁 두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거니
구태여 고기 음식 번거로이 구하랴.
병 끝에 하는 일, 자고 먹을 뿐
한 번 배부르니 만사를 잊을만하네.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리는 시”

김령, 계암일록
1603-09-28 ~ 1619-10-04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오시에 평보 형을 보러 갔다. 저녁에 상주 형, 평보 형과 함께 도목촌(道木村)으로 배 한림(裴翰林)을 보러 갔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림이 집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명암사(鳴巖寺)로 가서 두부를 해 먹고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늦은 밤, 정언(正言) 금업(琴(忄 業))이 가구(佳邱)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와서 도목촌에서 자게 되었는데, 배 한림이 그의 아들 숙전(淑全)을 보내어 함께 자도록 했다고 말했다. 1618년 1월 28일에는 아침에 연포(軟泡)를 차렸다. 김령이 지팡이를 짚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설암(棲雪庵)에 도착해서 보니, 암자의 편액이 바로 장인어른의 글씨였다. 이튿날 효중이 율시 한 수를 써서 김령도 그에 화답했다. 밥 먹는 데 다시 연포를 차렸다. 절문을 나서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으나 눈을 맞으며 춘양에 도착했다. 공보의 아내가 다시 술을 보내와서 잠시 머무르면서 마셨다. 말 위에서 효중이 시를 읊조리는데 흥이 여간 아니었다. 날이 저물자 눈이 개었다. 김령은 닭실[酉谷]에 도착해서 머무르다 효중과 같이 잤다. 계집 종 청심(淸心)이 선성(宣城 : 예안) 집에서 왔는데 편지를 가져왔다. 김령 집사람이 술을 보내왔다. 1619년 9월 4일, 김령이 아침에 들으니, 덕여가 급히 도산 서원에 갔다고 했다. 초두 무리가 서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연포(軟泡 : 두부)를 해 내놓으라고 했다. 부끄럼도 없이 이 모양새로 기세를 부리고 있다. 그 무리 20여 명이 모두 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흰죽부터 개장국까지, 끼니도 되고 보신도 하다”

권별, 죽소부군일기
1625-01-12 ~ 1626-11-06

1625년 1월 12일, 신유. 권별의 안색은 완전히 희게 되었고, 소변이 붉던 것도 맑아졌다. 조금씩 밥맛을 알게 되어 녹두죽과 백원미(흰쌀 죽)를 4~5차례 마셨다. 밤에도 3~4차례 마셨다. 주부의 기생이 각종 진미를 연이어 보내주셨다. 야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은 지난밤과 다름이 없었다. 달보가 병문안을 왔다.
1625년 1월 14일, 계해. 증세가 전과 마찬가지였다. 혹은 민물고기로, 혹은 새우젓갈로 반찬을 하여 연이어서 미음을 먹었는데, 다 뜨거운 물로 타서 넘겼다.
1625년 1월 26일, 을해. 흐리다 빛이 나다 하였다. 갑자기 상쾌해짐을 느꼈다. 청어 1마리를 구워서 먹었는데 해롭지 않았다. 밤에는 기장쌀밥을 물에 말아서 몇 숟가락 넘겼다.
1625년 2월 4일, 계미.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식후에 비를 잠시 뿌렸다. 유량의 집은 방이 비좁고 창문이 없는 데다가 또한 날씨마저도 점차 따뜻해져 권별은 기운이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오늘 사랑으로 옮겨 들어갔더니 기운이 갑자기 깨어나고 밝아졌다. 이봉이 민물고기 여러 마리를 들여보냈다. 회를 쳐서 먹었는데, 또한 체하지 않았다.
1625년 2월 9일, 무자.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오후에 빛이 났다. 서비가 7일부터 앓아누웠는데, 증세가 수상하니 염려스러웠다. 안채 변소를 수리하였다. 주부 댁에서 민어 반 마리, 생강 6각을 보냈다.

“새해 첫날 노인이 된 친구들끼리 모이다”

권상일, 청대일기
1745-01-01 ~ 1745-01-03

1745년 1월 1일, 을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국을 차리고 사당에 나아가 차례를 지냈다. 첫날의 하루는 그렇게 흘렀다. 둘째 날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며, 잠깐 바람이 불기는 했다. 계부를 모시고 추동에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새해 셋째 날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연이어 들렀다. 을축년은 권상일에게 67세가 되는 해이다. 이미 권상일도 환갑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도 두루 거친 그였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귀찮게도 느껴졌다.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그였다.
1월 3일 밤에 여러 노인들과 함께 이순(而順)의 집에서 입춘(立春)의 밤을 보냈다. 후경(厚卿)도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 권상일은 오히려 젊은 축이었다. 계삼(季三) 아저씨는 73세, 문언(文彦)은 71세, 계부는 69세, 권상일은 67세, 이순은 63세였다. 그의 동네에 사는 노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노인이 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김령, 계암일록
1603-09-08 ~ 1619-10-27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 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온 집안이 병으로 신음하여 개를 잡아 보양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4 ~

1912년 11월 14일, 김대락의 집안은 병마와 싸우느라 모두들 지쳐 있었다. 사촌 제수씨는 이전부터 지병이 있어 상당 기간을 앓고 있었고, 며느리는 최근 감기가 들어 며칠째 괴로워하고 있었다. 실은 온 집안을 통틀어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들 형식이는 잠잘 때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었고, 손자 창로는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바짝 여위였다. 그나마 창로는 누워서 앓는 병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한창 나이에 먹어야 제대로 자랄 터인데 음식을 마다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과 싸우고 있지만, 집에는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김대락은 크게 마음을 먹고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기로 하였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는 하나 오랜 기간을 같은 솥에서 나온 음식을 나누어 먹던 녀석이었다. 짐승의 목숨을 버려 사람의 식욕을 돋우려 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는 평소 잘 짖지도 않고 사람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잡아먹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장자가 말한 닭과 산 나무의 교훈은 제법 그럴 듯한 가르침이었다. 개를 잡아 국을 끓이니, 오랜만에 식구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마다하던 창로도 오늘만큼은 제법 요기를 한 모양이었다.
한 끼 훌륭한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가혹한 현실이 돌아왔다. 상점 주인이 와서 외상값을 독촉하였다. 몇 번이나 기일을 미루어 놓았는데, 매번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오늘은 동짓날이었는데, 팥죽 끓일 재료도 없어 그냥 지나쳤다. 명색이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절기도 그냥 지나치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지라고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에게 인사도 못하였으니, 팥죽 재료가 있다한들 입맛이나 다실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탄식할 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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