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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신문물, 틱톡(Tik Tok) 해야하나

김용진


노래를 만들면서 살다 보니, 노래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 많다. 되도록 최신의 동향을 살펴보려 애쓴다. 드라마에 삽입되는 곡들이 항상 뮤직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건 사실 그렇게 오래된 흐름은 아니다. 그리고 요즘의 동향을 보면 그것도 이제 시들해진 모양새이다. 매 시절, 현재의 히트곡들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하는 질문을 자연히 하게 된다.

최근 유투브에서는 틱톡(Tik Tok)이라는 앱 광고를 많이 하고 있다. 구글 기사를 검색해 보면 BBC코리아 기사가 뜬다.

틱톡: 당신이 35세 이상이라면 잘 모를 수 있는 이 앱이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중국의 스타트업 바이트댄스가 만든 이 앱은 현재 사용자가 5억 명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15초 정도의 영상을 찍어서 공유하는 플랫폼인 셈인데, 립싱크 기능과 다양한 특수효과로 소위 ‘질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영상을 서로 공유하며 노는 것이다. 영상에는 기본적으로 배경음악이 깔리고 그 음악에 맞춰 립싱크를 하고 춤도 추고 심지어 묘기도 부린다. 같은 음악을 다른 사람이 해시태그하여 공유하고 또 공유한다. 말하자면 배틀이다. 이 배틀에 쓰이는 ‘같은 음악’이 최신 음악 시장 동향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틱톡’에서 사용된 음악이 뮤직 차트 순위권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피곤해진다. 지금도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는데 이제 틱톡까지 해야 하나. 그래서 괜히 틱톡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 하는 말을 핑계 삼는다. 하지만 블로그를 운영하다 트위터,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고 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던 것처럼 어느날 또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돌아보니 항상 새로운 것들을 허걱허걱 쫓아가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게 힘들지 않으면, 힙스터가 되는 것일까. 새로운 물건들, 물론 디지털도 포함해서,은 항상 등장했고 우리는 그것들을 소비할지 말지 고민하며 살았다.

62호의 주제는 [신문물]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여전히 신문물은 등장하고 있다.

모던걸, 모던보이가 경성의 길거리를 활보하던 시대에도 신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강렬했을 것이다. 손서은 작가는 당시의 풍경을 소설의 한 장면으로 전해준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쇼윈도에 붙어 섰다. 그 옆으로 자전거가 위협적으로 스치고 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식모, 새하얀 양산을 어깨에 걸친 일본인 여자가 나막신을 끌며 종종 걸음을 쳤다. 조선말과 일본말과 영어가 공중에 섞여서 거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소란 속에서 기선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멀리 명동성당의 뾰족한 탑 같은 것이 보였는데 기선은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직업과 미래를 걱정하는 현대인들에게 <책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서평가가 있다. 금정연씨는 신문물의 혜택 속에 살아가는 시대를 이야기하며 이 시대에 도래할 책에 대한 기대를 써 주었다.

“가장 좋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읽지도 않을 책을 계속해서 산다. 그러니 나는 기다릴 뿐이다. 새롭게 내 앞에 도래할 또 한 권의 책을.”

이밖에, 홍윤정 작가는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속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구한말 커피, 전기의 등장, 조선시대 최초의 로켓화기 신기전을 소개하며 모든 시대의 ‘신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제목처럼 [모두가 한때는 새것이었다]

정용연 작가가 그린 [이달의 일기]를 보면 여성의 참정권 주장, 여성인권운동을 마주한 사대부의 마음을 짐작케 한다. 세상이 어찌 변해가는 것인가 하는 한탄은 어쩌면 내가 틱톡을 보면서 이건 공해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또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전서(篆書)를 새롭게 해석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글씨가 담긴 편액 두 개를 소개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의 병을 ‘할 수 있음의 과잉’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진된다고. 현대인은 지치고 힘들다. 소진되고 있다. <신문물>은 어쩌면 소진을 의미있는 땀방울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이고 희망으로 새로운 물건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이거 틱톡해야하나




“서당교육을 폐하고 신식교육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906-06

1906년 6월, 근래 상주에는 면마다 촌마다 학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상주군수 길영수란 사람이 학교 설립을 담당하는 관리를 현지에 며칠씩이나 유숙시키면서 학교시설을 독촉하였는데, 사람들이 응하지 않아 성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승지 벼슬을 지낸 정하묵이란 이는 스스로 중학교를 설립한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상주의 유약소에다가 소위 보조금이란 것을 냈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수만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상주의 유약소에서는 이를 거부하자는 통문을 돌리어 마침내 정하묵의 기도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정하묵이란 자는 ‘나는 지금까지 공맹의 학문에 속아왔는데, 이제야 크게 깨달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도 왕년에는 유학자로 자처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올해 들어 향교나 서당의 교육이 위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3월 각 읍마다 교육회를 설치한다는 칙령이 내렸는데, 앞으로는 모든 서원이나 서당의 교육은 교육회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대구시내에서는 구식 서당 선생을 내쫒았는데, 이후부터는 학당에서 글을 읽는 자가 없다고 한다. 또 안동향회에서는 이 새로운 교육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한다.

“서울에 여학당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8-08

1898년 8월, 박주대는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비로소 여학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독립협회가 연설회를 개최해 일반인들도 정치에 관해 연설을 할 수 있다는 소식도 놀라웠는데, 이제 여자들도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학당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이 놀랍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학당의 당수는 완화군의 어머니인 이상궁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대궐 문 밖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에 임금께서 이들의 상소를 들어주겠다 비답을 내리셨다 하는데 당원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천하에 이와 같이 기괴하고 또 기괴한 일이 만고에 있었겠는가!
그 뒤에 여학당의 수가 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며, 그 형세가 매우 융성해졌다고 한다. 한편 그들이 올렸다는 상소를 뒤에 구하여 읽어보니, 첫째 여성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 줄 것, 둘째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쓰개치마를 없애 줄 것, 셋째 내외를 나누는 법을 없애줄 것, 넷째 남편이 고질병으로 신음할 때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가도록 허락해 줄 것 등이라고 한다.
아! 이 상소문을 읽어보니 세상의 말세가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앞의 세 항목이야 천 번 만 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마지막 고질병인 남편을 두고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세상에 남편 된 자로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예천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나들이, 《단원 풍속도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7-02

1897년 2월, 박주대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년 병신년 의병이 봉기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이 횡행하였으나, 이제 의병들은 해산하고 이들을 잡기 위한 군대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던 주상께서 드디어 궁궐로 환어하셨다고 한다. 근 몇 년간 조정도 마을도 모두 시끄러웠던 때에는 요즘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하였다. 이제 불운이 물러가고 태평한 운수가 오기를 기원해 보는 박주대였다.
그런데 근래 들어 예천 고을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였다. 안동이나 예안 일대에는 소매통이 넓은 옛 두루마기를 입는 사람이 많았다. 박주대 역시 옛 두루마기를 만들어 나들이옷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지 말라고 금지하였을 때에는 모두가 이 조치를 원망하였는데, 막상 의복은 입기 편한 대로 하라는 훈령이 떨어진 뒤로는 거의가 좁은 소매에 새털로 짠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박주대가 입은 넓은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심지어 양반 집안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심심치 않으니 괴이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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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일행, 이를 닦는 솔을 선물받다”

배삼익, 조천록, 1584-07-29 ~

배삼익 일행이 늦게 망룡교(莽龍橋)를 출발하여 장가점(章家店)ㆍ신점(新店)ㆍ칠가령(七家嶺)을 지나 칠가(七家)에 있는 유이(劉二)의 집에 유숙하였다. 유이가 이를 닦는 솔을 선물로 주었다.
다음날 오후에 대란하(大鸞河) 가에서 휴식을 하고 배로 양하(兩河)를 지나 저녁에 영평부(永平府) 남쪽 주희등(周希登)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양하 주변의 전답과 집들이 남김없이 침수되어 있었고 성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사망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을 수리하느라 목재를 수습해 가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무에 둥지를 틀고 거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본 것들이 너무도 참혹하니, 예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물난리는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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