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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디아스포라의 일기들

문순득은 흑산도에서 홍어를 잡아 뭍에 가서 파는 어부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바다로 나간 어느 날 풍랑을 만났고 실종되었다. 가족들은 망연자실 장사를 지내고 묘지까지 정성껏 만들었는데 3년이 지나 문순득이 흑산도로 돌아왔다. 실종되었던 그의 동료들도 함께였다. 돌아 온 문순득의 입을 통해 그간의 일들이 전해졌는데 그는 3년 동안 필리핀, 오키나와, 중국을 표류했고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은 고향땅 흑산도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둘째 형인 정약전이 자세히 듣고 기록해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책이 [표해시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제주도로 표류해 온 필리핀 사람들을 통역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표류해 온 필리핀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다.

그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류하며 지내 온 곳들의 친절함도 한몫했겠지만 새끼줄을 꼬아 팔면서 생활을 이어갔던 그의 생활력,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그의 일념 덕이었을 것이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던 것처럼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오고, 또 건너가기도 했다.

이번 호에는 그렇게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때로는 본인의 의지로 선택하기도 했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스토리테마파크>에도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는 사람들의 일기가 많이 담겨있고, 그 중 일제 강점기 압록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정용연 작가의 [이달의 일기]는 안동지역 독립운동은 물론 간도의 항일 투쟁에서도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거론되는 인물 김대락의 『백하일기(白下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백하일기(白下日記)』는 만주로 떠난 1911년으로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13년까지의 일기문으로, 망명 당시의 사정과 그가 만주에 정착하는 과정, 만주 망명 사회의 동정이 사실 그대로 적혀있는 자료인데, [이달의 일기]에서는 압록강의 찬바람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잠시 후 객점 주인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아들 형식은 이미 압록강을 건넜으며, 또 압록강에는 검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김대락은 곧장 식구들이 머물고 있는 객점에 인력거 세 대를 보냈다. 이윽고 식구들은 모두 도착하였다. 김대락은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보로 건널 계획을 하였다.

같은 이야기를 커버1에서 손서은 작가가 좀 더 세밀하게 김대락과 그의 손자 창로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원래 그는 유가적 선비의 삶을 살았고, 그의 집안은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1909년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류인식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자신의 사랑채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간도 이주 이후에는 신흥강습소 및 경학사 등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여 이주민의 경제적 문제와 교육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도 수시로 떠올랐던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떠나오지 말았어야했다.

대락은 빈 방에 혼자 앉아 같은 문장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마음속의 생각이 발화되는 순간 말은 정확히 자신이 갈 길을 향해 달려간다.

커버 2는 경주에서 주말에는 카레음식점을 열고 평소에는 일제 강점기 문화재를 연구하는 아라키 준 님이 연구자로서 경주에 살게 된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자신이 살 곳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어쩌면 낭만적인 분위기도 ‘이민’ 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한다는 건 ‘생활’을 필요로 한다.

나는 바로 경주가 마음에 들어 직장을 다니면서 휴가 때마다 경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상이 지루하게 되면 경주를 찾아왔다. 아마도 마흔 번 넘게 경주에 온 것 같다. 신라유적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그 시대의 사회·문화에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할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해 지고, 환대가 일상 속에 자리를 잡으면 정착지에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것도 이민자의 한 모습이다.

앞으로도 나는 경주에서 생활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려고 한다. 경주에서 사는 것은 어쩌면 25년 전 내가 처음으로 경주를 찾아왔을 때부터 정해진 팔자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연구가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회에 환원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고도 경주의 근대를 걷다”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다. 아마도 올해 안에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출판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에는 고대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왕조기, 조선왕조기, 근대·일제시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가 흐르고 있다. 고대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면 자칫 이러한 역사의 연속성이 간과될 수도 있다. 나의 연구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 경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 경주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한다.

홍윤정 작가는 우리 미디어에 등장한 이민자들의 모습을 되짚어주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이미륵, [토지]의 서희, 영화 [황산벌]과 [평양성]의 거시기까지. 그리고 이 이야기는 문슨득과 이어진다.

거시기는 그야말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 글로벌리스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기가 원하는 삶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내 사람과 함께 한 줌 땅 일구며 알콩달콩 사는 것’ 뿐이었으니.

여섯 번째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이야기는 중국에서 고려로 이민 온 원주변씨(原州邊氏), 간재종택(簡齋宗宅)에 있는 편액 ‘충효고가(忠孝古家)’를 소개한다. 이 땅에 이주해 살면서 우리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이야기는 오랜 역사가 있는 흐름이다.

작년,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여 명이 들어오면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국내에 정착해 산다는 것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난민 반대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코스모폴리탄, 글로벌리스트 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지점 바로 그 이면에 난민이 있고 결국은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는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문순득이 고향 흑산도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누구나 자기가 살고 싶은 곳이, 설령 그곳이 고향은 아니더라도 있게 마련이고 그곳에서 행복을 느끼며 계속 살아가는 것도 인간이 가진 권리일 것이다. 그런 고민의 역사가 깊다는 것,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런 상황이 내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집필자 소개

피터_김용진
피터
정치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독립잡지 [싱클레어] 편집장, 음악가.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주 토함산 아래 ‘괘릉’으로 이주했다. 동네에 고전 읽는 가게 [신촌서당]을 열어 주변 사람들과 서로 배우며 가르치고 살고 있다.
“최참봉 일가가 피난을 오다”

오희문, 쇄미록, 1597-09-17 ~

1597년 9월 17일, 오늘 저녁 오희문의 집에 참봉 최형의 온 집안 식구들이 찾아왔다. 최형의 4남매를 비롯하여 25명의 식구들과 소와 말 7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전란을 피하여 피난을 온 것이라 한다. 강원도로 오긴 했는데, 달리 머물 곳이 없어서 오희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지인이라 우선 아들 윤해의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윤해의 집에는 윤해의 장모가 머물고 있었는데, 우선 오희문의 집으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오희문의 집에는 오희문의 어머니와 윤해의 장모가 와 있어, 식사는 쌀 1말과 반찬거리를 윤해의 집으로 보내서 거기서 밥을 지어 대접하도록 하였다. 마침 집에 술이 1병 있어서 이걸 가지고 최참봉을 대접하였다.

“배고픔에 처자식을 길에 버리다”

오희문, 쇄미록, 1593-07-15 ~

1593년 7월 15일, 오희문은 일가를 데리고 전라도로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고부군 앞을 지나는데, 문득 길가의 좌우를 둘러보니 밭과 들이 모두 절반이나 황폐해 져 있었다. 비록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린 곳도 간간히 있었으나 모두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땅에는 호미로 김매기를 한 흔적도 있었으나, 이미 7월 중순인데도 자란 것이 겨우 두어 치 높이에 불과하였다. 호남은 예부터 넓은 들판으로 조선 제일의 곡식 생산지였는데, 이제 천리나 되는 기름진 들판이 거친 풀로만 덮여 있는 것을 보니, 올해와 내년 굶주린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할지 벌써부터 큰 걱정이었다. 아마 내년이 오기 전에 시체들이 구덩이를 가득 메울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걱정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길가에 7-8세 가량 된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여인도 한명 있었는데, 그 역시 길가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니, 여인의 말이 남편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곤 우리 모자는 장차 굶어죽게 되었다며 슬픈 목소리로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으니 슬프고 불쌍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요,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로 비록 짐승이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심지어 사람의 탈을 쓰고 처자식을 길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다니! 그 배고픔이 얼마나 컸으면 어찌 이런 지극히 괴이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정녕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이러한 배고픔으로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를 것인가! 오희문은 울고 있는 모자를 쳐다보며 거듭 탄식이 배어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무주에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서 지례읍으로 향해 오다”

여중룡, 갑오병신일기

1894년 10월 어느날, 여중룡은 난리를 피하여 지례읍(知禮邑)에 들어가서 친척인 호운(湖雲)과 같은 집에 있다가 10월 11일에 식구를 다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한편, 무주(茂朱)의 동학도는 계속 존속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을의 수령이 대구부(大邱府)에서 병사 20명을 청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막을 채비를 갖추었다. 어느날 보니 무주 근방의 동학군이 정황을 살펴보니 몇 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지례읍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서 포수와 창잡이를 보냈다.

“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 ⓒ독립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15 ~ 1911-01-24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이역만리에서의 고깃국 파티”

김대락, 백하일기, 1911-06-22 ~

김대락과 그 가족들은 이역타국의 삶에서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넉넉한 식량이 없어서도 잘 먹지 못해서이지만, 타국의 낯선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한 적도 많았다. 1911년 6월 22일, 김대락의 식솔들이 청나라 사람의 집에서 개를 한 마리 사왔다. 개의 가격은 중국돈으로 7각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조선에서 쓰던 돈으로 환산해보니 2냥8전이었다. 매우 싼 가격이다. 중국은 물가가 모두 비쌌는데, 이것은 매우 쌌다. 이것이 이렇게 싼 이유는 청나라 사람들은 개를 즐겨 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침 신흥강습소 기숙사에서 황서방(황병일)이 왔다. 마침 개장국이 있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이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조선의 방식으로 개장국을 끓여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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