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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2020 시작, 이웃나라를 생각하다

근하신년 謹賀新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

연말연시에는 여기저기에서 새해를 축하하거나 축복하는 인사말들을 보고 들게 됩니다. 이런 인사말을 나누고 새해에 첫 출근날 시무식(始務式)까지 하게 되면, 새해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조선시대에도 시무식은 있었는데, 조정의 시무식은 왕과 신하들이 신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황제의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여러 잔치를 베풀었다…올량합(兀良哈) 5인이 모피(毛皮)와 전우(箭羽)를 바치고, 왜인(倭人) 9인도 또한 하례(賀禮)에 참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 1월 1일)

위의 기사에서는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신년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조선국왕이 중국황제의 신년을, 올량합과 왜인들이 조선국왕의 신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신년을 축하하고 축하받는 관계가 마치 중국황제를 정점에 둔 동심원 같기도 하고, 삼각형 같기도 합니다. 태종 2년 정월 초하루의 풍경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어느 정월 초하루 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왕은 한양의 궁궐에서 중국황제의 신년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중국황제의 궁궐에도 축하할 사절을 보냈습니다.

정월 초하루 북경의 자금성에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중국황제를 둘러싸고 왕, 신하, 이웃나라 사신들이 신년을 축하합니다. 그 이웃나라 사신들 속에 조선 사신들도 있습니다. 신년을 축하하는 자리는 중국, 조선, 올량합, 왜라는 각각의 세상이 만나 서로의 관계와 차례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중국황제는 이 자리에서 외국사신과의 만남을 통해, 책력을 반포하거나 일람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이 세상-공간과 시간-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중국의 이웃나라들은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중국에 보내는 사신 중에 중요시했던 사신이 신년을 축하하러 보내는 사신-정조사, 원조사, 정조사 겸 동지사-이었습니다. 이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이웃나라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정월 초하루의 자금성에는 수많은 나라의 사신들로 북적였습니다.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라는 그림을 보면, 위아래로 중국 황제와 조선 사신이 있지만, 조선의 위아래에는 다양한 나라의 사신들이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중국황제와 조선 사신의 수직적 만남뿐만 아니라, 조선과 같은 선상에서 앞뒤로 서 있는 다른 나라 사신들의 수평적 만남을 읽어봅니다. 사신들이 사행을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사행록, 조천록, 연행록 등)에서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읽어봅니다. 이 그림과 글 속의 행간에서 중국이 구축한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의 하정례 자리에서 새로운, 또 다른 세상을 만났습니다. 담談 2020년 1월호에서는 하정례(賀正禮)를 통해 조선인들이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과정과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정은주 선생님은 [북경 자금성의 신년 조회와 만국래조도]에서, 정월 초하루 청나라 건륭제에게 신년을 하례하는 의식을 그린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란 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림 속에 함축된 청나라와 각 나라 간의 상하관계, 청나라의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를 읽어 주셨습니다. 이 글을 통해 건륭제의 신년을 축하하러 간 조선의 사신단이 어떤 의식을 경험하고, 어떤 처우를 받았으면 어떤 교류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한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동행한 역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모두가 역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기에, 손짓발짓을 하거나 글-한문-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글로 나누는 대화는 필담(筆談)이라고 했습니다. 사신들이 사행을 가서 나누었던 필담들은 사행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창록 선생님은 [필담을 나누는 조선판 비정상회담-한조각 돌덩이에서 천하대세를 엿보다]라는 글에서, 필담으로 이뤄진 교류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필담을 나누었던 홍대용과 엄성은 “천애지기(하늘끝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벗)”가 되었고, 박규수와 심병성은 “진정한 벗”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한필교와 박지원은 사행에서의 교류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인식하고 다양한 정보를 얻기도 했는데, 박지원은 이를 “한 조각 돌덩이로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한두 글자의 필담밖에 나눌 수 없다고 해도 박지원은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열하로 가는 길에 만나 회회국 사절에 대해 그들이 한문을 몰라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겸손한 태도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열하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기헌은 북경에서 만난 태국 사신들의 복색을 보면서 그들의 문화가 다르다고 해 가벼이 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정용연 작가님께서 [이달의 일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중국이란 일원적 질서와 가치관 속에 있다 해도 선조들이 “다름의 가치”를 이해하고 언급하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이웃나라와, 이웃나라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홍윤정 작가님의 [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인싸 코레아]에서 소개해 주신 여러 작품 속에는 바로 “다름의 가치”를 실천하여 “인싸”가 된 이들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습 속에는, 역사 속 벽란도의 고려인, 표류한 서양인들을 품어줬던 바닷가 사람들, 먼 이역에 끌려와서도 나라를 생각했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무에 새긴 이름, 편액]에는 ≪조천일록≫이란 사행록을 남긴 김중청의 “반천정사(槃川精舍)”를 소개합니다. 조선 시대 사행의 여정, 사신들의 교류, 다른 나라에 대한 정보나 이해 등은 사행을 다녀온 선조들이 남긴 사행록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중청이 남긴 ≪조천일록≫은 명청교체기라는 중대한 시기에 사행 기록인 데다가 그 내용의 정확성과 충실함으로 사행록의 모범이 될 만한 자료라고 합니다.

[스토리 이슈]에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국의 유교책판 순회전시를, “온전하게 간직된 것들의 순회”로 소개하였습니다.




집필자 소개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안타까워 알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드라마 “주몽” 작가와 같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제작진의 역사 자문에 응한 드라마가 “정도전”, “징비록”, “장영실”, “역적”, “녹두꽃” 등 약 15편 정도 됩니다.
“청나라 새 황제에 대하여 묻다”

옹정제 (출처: 위키백과) 황정, 계묘연행록, 1723-10-10 ~

1723년 10월 10일, 황정은 요동에 있었다. 사행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신요동이란 곳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는데, 추운 날씨에 객사의 온돌이 따뜻하지 않아 민가를 찾아 유숙하였다.
그런데 민가의 주인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역관을 통해서 이번에 새로 등극한 황제가 새로운 정치를 시행하면서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이 그전 황제에 비하여 나은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사행단의 역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나라 황제의 정치 시행에 관한 것인데 어찌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묻는가?”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황제가 계신 북경에서 오신 길이시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역관이 대답하였다.
“먼저 황제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 새로 등극한 황제는 오직 은자(銀子)만 아끼고 좋아한다 합니다”
황정은 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비록 변방의 늙은이라고 하나, 새로운 황제에 대한 인상이 이러하니, 새로운 황제가 탐욕이 많고 어질지 않음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면서 태국 사신들을 보다”

1860년 자금성의 정문 – 오문(午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1-12-29 ~

1801년 12월 29일, 이기헌(李基憲)은 사신단의 서장관 신분으로 명나라 수도에 와 있었다. 한 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오늘, 조선의 사행단은 오문 밖 조방에서 황제의 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오늘 태묘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겠다고 하여서, 궁을 떠나는 황제를 전송하기 위해 명나라의 관료들과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는데, 황색 지붕을 얹은 작은 가마를 타고 있어서 실제 황제의 용안을 보지는 못하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황제의 의장물은 매우 간단하였다.
황제의 어가는 오랫동안 머물면서 신료들을 돌아보다가, 태국에서 온 사신들을 지나쳐 갔다. 그는 아래 반열에 자리한 채로 어가를 맞이하고 서 있었다. 이기헌은 태국 사신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입은 조복(朝服)을 보니 얼룩얼룩한 무늬의 비단에 소매가 없는 긴 도포를 입었고, 쓰고 있는 관은 반자쯤 되는 길이에 동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하여 그 형태가 마치 뿔과 같았다. 머리카락은 자르고 땋아 내리지 않았다. 조회를 마치고 태국 사신들에게 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사석에서는 의관이나 허리띠, 신발 모두 청나라의 제도를 따르지만, 조회를 하고 어가를 맞이할 때에는 본국의 의관을 따른다고 한다.

“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미상, 계산기정, 1804-01-24 ~
왕자정(王柘庭)ㆍ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으로 갔는데, 경암(絅菴)과 추양(秋陽)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 및 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입니까?” 했다.

“청나라의 조참례에 참여하다”

1901년 자금성의 정문 – 단문(端門)
(출처: 위키백과 중국어판)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9-25 ~

1662년 9월 25일, 정태화(鄭太和)는 아침 일찍부터 자금성으로 갔다. 오늘은 청나라 조정의 조참(朝參)례가 있는 날이었는데, 조선 사신도 여기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 일행은 자금성의 승천문을 경유하여 오문을 지나 단문 밖에 이르렀다. 단문 안으로 들어가 서반의 앞 행렬 끝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울리면서 황제가 등장하였다. 3번의 호령소리가 울리더니 황제가 용상에 앉았다. 청나라 관리들 중에서 새로 관직을 제수 받은 사람과 새로 상을 받게 된 사람들이 뜰의 동서로 나누어서 북쪽을 향해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나서 각각 자기의 반열로 돌아갔다.
홍로시 관원들이 청나라에 들어온 사신 일행을 이끌고 다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는데, 정태화의 일행도 이에 참석하였다. 례를 마치자 정사와 부사, 서장관 3명의 사람을 인도하여 황제가 있는 황극전의 계단 위로 올라가게 하여 서쪽 기둥 밖에 앉게 하였다.

“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황중윤, 서정일록, 1620-05-10 ~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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