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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역병과 공포를 넘어서는 힘,
공동체적 연대와 보살핌

역병과 공포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스스로 자가격리를 선택하여 모임과 공연, 만남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습니다. 유치원과 학교는 문을 열지 못하고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언제 끝날지 모를 비대면 수업으로 새 학기를 맞이했습니다. 직장인들은 IMF 사태를 떠올리며 부도와 실업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역병보다 더 무서운 공포가 독버섯처럼 어둠을 틈타 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호복을 착용하고 24시간 응급진료 태세를 갖고 용기있고 씩씩하게 일하고 있는 의료진과 공무원들, 요구르트와 주스를 쪽지와 함께 병원에 두고 가는 시민들, 끝없이 이어지는 성금과 저금통을 들고 온 청소년과 소고기 등 식재료를 소외된 취약계층의 이웃에게 주고 수제 마스크를 만들며 자원봉사를 하는 손길들.

우리 사회 공동체는 중국 과학자들이 1월에서야 코로나19의 염기 서열을 처음 밝혀냈을 때 적어도 4곳의 생명공학 회사가 국내 첫 감염자가 나오기도 전에 정부와 함께 묵묵히 검사 키트를 개발하고 재고를 비축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연결을 끊고 국가적 이동을 막는 봉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안전한 검사와 감시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습니다. ‘역병과 공포를 넘어서는 힘은 공동체적 연대와 보살핌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웹진 담談이 74호에 담은 주제입니다.

정용연 화백님은 <봄>에서 역병에 걸려 숨을 거둔 아내 김광계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그려 주셨습니다. 봄이 왔지만 역병을 쫓기 위해 피운 불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춘래불사춘. 봄이와도 봄이 아니로구나.” 그럼에도 어린 종이 미소띤 얼굴로 두견화를 가슴에 품고와서 병에 꽂는 풍경에 봄이 온 줄을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한국한의학연구소의 김상현 선생님은 <몸은 통(通)하게 하고, 마음은 안정되게>에서 조선시대에 역병 정책이 어떻게 실행되고 어떠한 행정적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그리고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던 활동을 이야기하십니다. 왕명으로 간행되었던 벽온방(辟瘟方) 등 다수의 서적들의 처방이 “흘러가게 둘 것인가, 틀어막을 것인가”에 관한 소통의 방안이었으며 개인의 몸과 마음, 백성들 스스로, 그리고 중앙과 지방이라는 공동체의 소통이 공포를 없애고 완화할 방안이었음을 설명합니다.

<질병이 연대의 마음을 고취시키다>에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최은경 교수님은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질병의 유행은 인간의 취약성을 경험하는 현장이며 취약성의 경험은 연대할 수 있는 이웃의 존재를 소중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조선시대의 활인서(活人署)에서 출막(出幕)이라는 임시 시설을 성 밖에 두고 전염병 환자를 별도로 격리하여 환자를 치료했던 조선시대의 사회적 거리 두기, 집안에 활자를 들여 돌보았던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기록, 국가의 통치 권위가 약해지거나 기대기 어려워지는 경우에는 병들고 굶주린 이들을 돌보려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었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 등. 이 기록들을 통해 서로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나누어 힘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이황(李璜)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정자 ‘반구정(伴鷗亭)’을 소개합니다. ‘반구(伴鷗)’는 ‘갈매기를 짝한다’는 말로, 갈매기처럼 인간 세상의 이해를 초월하여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자족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산정이 퇴계 선생께서 벼슬길에서 돌아와 학문과 수양을 하셨던 곳인 만큼 산과 물이 깊은 곳에 외따로이 있습니다. 반구정 역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의 시가 걸려 있습니다. 연대와 보살핌으로 코로나19와 공포가 사라진 눈부신 봄날에 그 시들을 읽으러 오시기 바랍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쉘 위 댄스’라는 글을 통해 병이 들면, 약은 커녕, 누워 쉬는 것조차 호사였을지도 모를 이들에겐 과연 ‘진정한 치유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힐링을 담은 2편의 영화를 소개합니다. 다른 사람 대신 군역을 서주며 먹고 사는 사람들인 대립군과 곱게 자란 세자의 갈등 속에 목숨보다 귀한 밥을 얻어먹은 보답으로 춤을 추는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룬 <대립군>이 하나입니다. 또하나는 춤으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영화는 <사도>입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진찬례를 올리고 추는 광해의 춤은 광해의 춤이 백성을 위무하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부드러움이었다면, 정조의 춤은 터질 듯한 슬픔과 한을 그 안에 단단히 봉한 채 외치는 격정적인 침묵일 것입니다.

이번호의 <스토리이슈>는 한국국학진흥원의 민간 소장 기록유산 가운데 유생들의 일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삶을 조명한 책,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의 저자, 이상호·이정철 선생님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책에는 조선시대 마을에 대해 현대의 공동체와 달리 훨씬 집약적이고, 다기능적이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마을은 우주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대의 국가와 공동체,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현대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덕목으로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淸明)의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 며칠 후엔 초파일(初八▽日)에는 아무리 농사준비에 바쁜 백성들도 일손을 놓고 집집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등에 불을 켜 달고 그 아래서 물장구를 치거나 풍악을 하고, 딱총과 불놀이를 하며 느티나무의 잎을 넣어 만든 시루떡과 검정콩을 쪄서 먹었습니다. 공동체적 연대와 보살핌으로 코로나19을 넘어서는 봄을 생각하며, 봄을 느끼던 마음을 담은 퇴계 이황의 시 「感春(감춘)」을 전합니다.

淸晨無一事    맑은 마침 다른 일 없어
披衣坐西軒    옷을 입고 서헌에 앉았다.
家僮掃庭戶    어린 종은 뜰을 슬고
寂廖還掩門    심심하여 도로 문을 닫는다.
細草生幽砌    가는 풀들 섬돌에 돋아나고
佳樹散芳園    나무는 향기로운 정원에 흩어져 있다
杏花雨前稀    살구꽃은 비에 떨어져 드물고
桃花夜來繁    복사꽃은 밤사이 활짝 피었구나.
紅櫻香雪飄    붉은 벚꽃 눈처럼 휘날리고
縞李銀海飜    흰 오얏꽃은 은빛 바다인 듯 뒤척인다.
好鳥如自矜    새들은 뽐내고
閑關哢朝暄    한가로운 문빗장에서 아침을 지저귄다.
時光忽不留    세월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幽懷悵難言    가슴 속 그윽한 회포는 서글퍼 말하기 어렵구나.
三年京洛春    삼년동안의 서울 봄은
局促駒在轅    멍에 맨 망아지처럼 움츠렸도다.
悠悠竟何益    아득한 세월 끝내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
日夕愧國恩    아침저녁으로 나라의 은혜에 부끄럽기만 하다.
我家淸洛上    나의 집은 맑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熙熙樂閑村    한가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네.
隣里事東作    이웃 고을에서 봄 농사일 하면
鷄犬護籬園    닭과 개가 울타리를 지켜준다.
圖書靜几席    책 놓인 깨끗한 상에 있으려니
煙霞映川原    강과 언덕은 봄 안개와 노을에 빛난다.
溪中魚與鳥    냇가에는 고기와 새들이 있고
松下鶴與猿    소나무 아래에는 학과 원숭이가 노는구나.
樂哉山中人    좋아라, 산 속 사람들이여
言歸謀酒奠    나도 사직을 청하여 고향 돌아가 술잔이나 나누리라.




편집자 소개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오?”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동생을 살린 미담이 전해지다”

박한광, 박득녕, 박주대, 박면진,
박희수, 박영래, 저상일월,
1922-05-15~

1922년 5월 15일, 박면진은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소식을 들었다. 경주의 각산 마을에 박종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화상을 입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 박종필이란 사람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아우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괴이한 사고와 인륜을 저버린 이야기들만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야말로 인륜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박면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벌써 사람들은 시를 지어 이 박종필이란 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박면진은 소리 내어 이 시를 암송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개자추는
허벅지를 베어서
임금님의 굶주린 배를 채워드렸고
지금의 박종필은
살을 깎아
앉은뱅이 아우를 일으켰네
그 임금과 신하에게는
의리가 소중하였고
이 형과 아우에게는
우애가 돈독하였네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말하지 마라
저 하늘처럼
끝없이 빛나리라

“권문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7-07-01~1587-08-09

1587년 7월 1일, 권문해는 관아에 나아가 일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 맞이한 두 번째 부인 함양 박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독기가 몰려 구부렸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다. 이날은 아내에게 냉약(冷藥)을 쓰고, 또 침을 써서 터뜨렸다. 권문해는 다음날에도 관아에 나아가 잠시 공부를 수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도 권문해는 오한과 발열과 함께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아내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는 권문해는 칠곡에 사는 품관 이함(李諴)이 부종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청해오도록 하였다.
7월 12일, 이함이 궁중에서 파견된 약재 검사관 이운영과 함께 왔다. 이함과 이운영은 아내의 병을 습사(濕邪)로 인하여 온몸이 붓는 것 같다며, 부종에 효험이 있다는 곳을 찾아 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권문해는 아내를 데리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말하길 ‘혈종이 아니고 습종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함양 박씨의 무릎에 침을 놓아 피를 빼고, 대강활산(大羌活散)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찌르는 듯 한 통증을 참는 아내를 보는 권문해의 마음도 찢어졌다. 권문해는 수소문한 끝에 문경에 사는 내금위 진곤(陣崑)이 부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내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

김광계, 매원일기, 1626-10-18

1626년 10월 18일, 김광계는 밤까지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리더니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와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곧이어 중문까지 열어젖혔다. 김광계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침입자는 곧장 김광계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김광계는 한참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오랜 친구 이지형이었다. 본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즐기고 술자리도 가지며 절친하게 사귀던 사이였으나, 1623년 이지형이 그만 풍증(風症)이라 불리는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내면서 왕래가 끊긴 지 이미 몇 년째였다. 정신질환의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 시기 정신질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의해 감금되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형 역시 집안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었는데 어쩌다 틈을 타 탈출해서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 친구의 집까지 용케 찾아왔던 것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6-05-07~1616-05-10

1616년 5월 7일,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을 천남(川南)으로 피신시켜 놓고 김광계는 며칠 전 능동재사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막내아우 이직(以直)이 설사 증세까지 생겼다고 해서 몹시 걱정을 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로 가 보았다. 그러나 마을은 전염병 기운이 여전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노산(蘆山) 재종조부 집에 가서 약재를 얻어 들여보내기만 한 후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했다. 김령 재종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재종숙 김령은 지난 1월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챙기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월당에 도착해보니 덕여(德輿) 형 형제와 김참(金墋) 아재, 이일도(李逸道), 임지경(任之敬), 이의적(李義迪)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수재 전치(全偫)도 있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4-06~1616-08-12

1616년 4월 6일, 이행이 정임수와 함께 왔다. 정임수에게서 아들 김적의 천식약인 담박호(痰剝蒿)를 구했는데 찾아서 온 것이다.
5월 15일, 이날 저녁 김택룡이 큰 아들 김숙이 산양으로 출발했다. 동생 김적의 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6월 20일, 아침 무렵 중소(重紹)가 산양(山陽)에서 와서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니 아들의 병이 여전해서 김택룡은 걱정이 깊어졌다. 춘궁기가 이어져서 곡식이 모자란 터라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곡식을 나누어 보냈다.
7월 24일,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해서 그 집의 노비인 임인이 왔다. 김택룡은 부랴부랴 의원에 부탁해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임인이 돌아가는 편에 보냈다. 김택룡이 들으니 산양의 아들 편지가 영주[榮川(영천)]의 산장(山庄)으로 왔다고 하는데, 산장에서 잊어버리고 자신 쪽으로 전해주지 않고 있었다. 김택룡은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몰라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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