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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모자, 척 보면 압니다~

편집회의를 할 때 조선시대 복색 중에서도 특별히 모자를 다루어 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드라마 속 우리나라 ‘갓’을 본 외국인들이 그 아름다움과 독특함에 반해 조선시대 모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편집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패션으로써의 모자는 복식사 분야의 치열한 복원품들을 직접 보는 효과를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자’의 사회사적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머리에 무언가를 썼다면 그것은 아마 ‘보호’ 보다는 ‘과시’와 ‘장식’이었을 것입니다. 최초의 목적이 머리를 보호할 용도였으면, 그 실용성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을 것입니다. 발굴되는 집단 유골들 속에 머리 장식이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 장식은 ‘족장’ 혹은 ‘제사장’ 급의 유물에서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집단 속에 질서가 생기면서부터, ‘다름’을 드러내기 위해 모자를 사용했습니다.

어린 시절 봤던 개그프로에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한눈에 딱 봐도 안다는 뜻으로, “척보면 애~앱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끼리 척 보면 알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어디일까요?. 여타의 짐승들과 다르게 인간은 똑바로 서서 걷습니다. 직립 보행하는 인간들의 시선 높이에서 구분하기 가장 좋은 곳은 머리입니다. 척 보면 아는 머리에 구분 표식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모자의 색깔이며 형태가 더 다양해졌고 최고의 지위에 있는 왕이 쓰는 관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게 됩니다. 결국 모자는 그 사람이 누리는 권리와 힘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 모자가 상징하는 만큼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지요.

조선시대 천민들이 쓸 수 있었던 모자는 기껏해야 삿갓이나 패랭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 마저도 높으신 분들이 지나가면, 벗고 땅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맨 머리로 땅에 엎드려, 높은 말 위에 화려한 모자를 쓴 사람들을 보는 것 그 자체로 천민들은 거듭거듭 그들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고 세뇌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통치 기술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1.5키로 정도의 단백질 덩어리가 전기적 신호를 해석하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움직이고 살도록 합니다. 이토록 작은 뇌지만, 그 가능성은 우주처럼 무한합니다.

신분제는 그 무한한 뇌를 담고 있는 머리에 무언가를 씌워, 한 사람의 우주와 인격을 멋대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오랜 신분제도 아래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차단당했던 것일까 부질없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움만으로 끝낼 수 없는 모자에 대한 탐구를 부탁드리며, 부디 아름다운 ‘갓’을 쓴 사람들이 그만큼의 삶을 살아낸 이야기가 발견되길 원했습니다.

강유현 선생님은 <머리에 올린 욕망>을 통해, 머리 장식의 세세한 부분이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지배체제와 밀접했음을 알려주십니다. ‘추위를 막는다’는 실용적 목적에 충실해야하는 방한모마저, 신분의 고하를 따져 국법으로 그 재료를 규제했다고 합니다.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분하려는 끊임없는 씨름이 갓을 통해 어떻게 벌어졌었는지 사료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킹덤>을 통해 외국인들의 눈에는 아름다운 패션소품으로 알려진 갓. 그 아름다운 갓이 조선 최후까지 치열하게 신분의 귀천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답니다.

권병훈 선생님은 <행차도 속에 보이는 쓰개>에서 정조와 호위 행렬의 쓰개를 세밀히 소개해 주셨습니다. 모든 쓰개의 출발이 되는 상투 트는 법부터 알려주고, 행렬도 속의 무장들이 쓴 전립의 기능과 장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군모이기에 화살을 막는 기능도 있었지만, 깃털 장식과 아래쪽 안감에 댄 비단 때문에 화려한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호위행렬 속에 가장 화려한 인물은 당연히 임금입니다. 권선생님은 정조의 전립을 추정해 보시고, 그 모양새를 삽화로 제작해 보여 주는 재미있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권숯돌 작가님은 <갓 이야기>를 그려주셨습니다. 계암집을 쓴 조선 중기 문신 김 령이 낡은 갓을 갓방에 수선해 달라 맡깁니다. 오래도록 쓰고 낡으면 고쳐서 쓴다는 것을 보아 갓이 무척 귀하게 만들어진 물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영 갓방 풍경을 보자니 트집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게 되고, 갓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짐작도 가능합니다.

홍윤정 작가님은 <그가 모자를 벗을 때>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통해, 조선시대 갓을 벗어 내려 놓는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십니다.

또한 미술팀들의 노력으로 재현된 다양한 갓을 구경하다보면, 외국인들이 왜 우리의 갓에 열광하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스스로 갓을 벗었던 것과 달리, 아무런 쓰개도 쓸 수 없었던 노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드라마 <추노> 속의 그들은 낡아빠진 건(巾)을 두르고 물건이나 짐승처럼 취급당했지요.

양천을 구분 지어 치열하게 올려 쓴 갓은 가볍지만 무거운 물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갓을 쓴 선비에게 절개와 품위와 깨끗함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성이었습니다. 그런 덕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조선전기 무신 곽인방이 있습니다.

이번 <편액이야기>는 곽안방을 기리는 이양서원에 걸린 <경렴당>입니다. ‘경렴’, 청렴을 우러러 사모한다. 선비에게 기대되는 청렴결백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면 조선시대 청백리 명단에 217명의 이름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속에 곽안방이 있었다고 하니, 흔하게 보는 검은 바탕에 하얀 편액 글씨마저 <경렴당>은 유난히 하얗게 보입니다.

<스토리 이슈>에서는 웹툰집 <의병장 희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웹진담談에 이달의 일기를 그려주시는 권숯돌 작가님 정용연 작가님의 협력작업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었던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일대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요란한 장식 대신 투박한 비녀 하나 찌르고 살던 평범한 안사람들. 그들의 평범한 삶을 빛나게 했던 것은 성공이 아니고, 헌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뜻깊은 작업을 해 주신 작가님과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를 기획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갓이나 신분제는 지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복장을 통해 사회적 경계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유니폼을 입기도 하고, 결속력을 위해 단체복을 입기도 합니다.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어두운 정장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이번호의 기사들을 읽으며, 구분된 복장이 주는 효과와 경직성을 동시에 생각해 봅니다.




편집자 소개

글 : 동희선
동희선
한국사 공부를 한 후, 시나리오와 방송 대본을 집필 중입니다.
끊임없이 쉽고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습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이야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중2수준에서 이해된다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삽니다.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들을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조카의 관례, 빈으로 참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2-15 ~ 1611-03-08

1608년 2월 15일, 국상 때문에 천례(薦禮)를 정지했다. 오후에 임 참봉의 아들 임지경(之敬)이 와서 그의 어른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내가 그의 아들을 가르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2월 18일, 임 참봉의 아들이 글을 배우러 왔다.
2월 22일, 오시쯤 임 참봉과 누이의 편지를 보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 때문이었다.
1611년 3월 6일, 임 참봉의 편지를 보니 8일날 아들의 관례에 초청을 하면서 서신의 의범(儀範)을 빈례로써 하였다. 그 내자되시는 누님이 따로 여종을 보내어 편지로 나를 청했는데 지극히 난처해서 감히 답장을 하지 못했다.
3월 7일, 오시에 임지대(任之大) 군이 갑자기 왔다. 다시 임 참봉 내외의 편지를 보니 나를 초청하는 것이 몹시 간절하였다. 임 군은 어제 저녁에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지금 명을 받들고 왔으니 몹시 미안하였다. 부득이 점심을 먹은 후에 임 군·이실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갔다. 지나가는 곳에 진달래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빛이 무르익어 넘치니 경치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임 참봉댁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인들이 활개를 치고 지금 주상은 덕을 잃어 어떤 벼슬아치라도 직언을 하면 즉시 퇴출된다고 한다.
3월 8일, 아침에 홀기를 보니 빠진 부분이 많았는데 어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을 쓴 것이었다. 그래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었다. 나는 힘써 빈을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이실을 찬자로 정했다. 밥을 먹고 행례를 마친 후에 법도대로 술 석 잔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누님을 뵈오니, 창녕 누님도 또한 와 계셨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드디어 주인과 작별하고 사안·민보·덕휘를 차례로 들러보고 이지·이실과 함께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 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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