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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쉽고 예쁜 글자, 한글을 만든 이유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1926년에 음력 9월 29일로 지정된 ‘가갸날’이 그 시초인데요, 이 해는 한글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잊히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연구회에서 제정했다고 전해집니다. 광복 후 양력 10월 9일로 확정되었는데,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서문에 반포일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이를 토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6년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말을 지켜내며, 그 우수성을 기념하기를 90여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요, 한편에서는 한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웹진 담談 92호에서는 문해력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담아보았습니다.

문자의 기초적인 독해 능력에서 시작하여 개인과 사회의 소통 문제까지 연계된 문해력. 조선시대 선인들은 문자를 익히고 해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을까요? 또 우리는 지금 그때처럼 노력하고 있을까요? 그 어느 나라보다 문맹률이 낮은 나라, 그러나 현저히 낮아지는 문해력은 크고 작은 불통으로 이어지고 세대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의문과 우려의 시선을 6명의 필자께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맹영일 선생님은 〔문자의 나라, 조선의 문해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의 문해력 저하 문제의 심각성을 살피고, 문자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문해력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양반의 특권이자, 지식층에서 문해력 향상을 위해 어떤 교육과 학습을 했는지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합니다. 이 중, 맹 선생님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친 김대락과 손녀의 일화에 주목합니다. 1912년 11월, 추운 겨울날 김대락은 조선의 잘못된 교육풍습을 떠올리며 어린 손녀에게 천자문을 직접 써서 가르쳤습니다. 김대락은 변화하는 시대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이 시대 문해력이 화두가 되는 것은 100여 년 전 김대락이 손녀에게 한자를 가르치고자 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문영 작가의 〔정생의 언문일기〕에서는 학동들에게 ‘가을이 깊어지니 말이 살찐다’는 추고마비(秋高馬肥)의 뜻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빼는 정생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말은 가을이 되면 흉노의 말들이 살이 찌고 그러면 흉노가 말을 타고 침략해 오니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정생을 난감하게 한 것은 제자 광덕이가 건넨 종이 한 장입니다. 한자도, 한글도, 일본어도 아닌 ‘문자 같은 문자 아닌’ 무언가 쓰인 종이였습니다. 정생은 그것이 예언서나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라도 되는 듯 고심하였으나,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던 궁녀가 적은 다과 목록이었습니다. 잠시나마 설렜던 마음이 민망하여 하늘만 쳐다보는 정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집니다. 중국어, 몽골어, 인도어까지도 문자에 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궁녀들 사이의 암호까지는 미처 해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자는 결국 소통을 위한 도구이지요.

권숯돌 작가는 〔글귀가 어둡다고요?〕라는 제목으로 1749년 『역중일기』에 기록된 일화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어느 노비의 이야기와 1912년 『백하일기』에 기록된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 조선의 교육풍습을 개탄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주셨습니다. 노비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이 희귀한 일이었던 시대, 조선의 여인들은 바느질할 치(黹)라는 한자를 몰라도 바느질과 길쌈을 훌륭히 해내면 되는 시대를 지나, 이제 누구나 우리말을 읽고,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말과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글귀가 어두워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홍윤정 작가는 〔연애편지〕라는 제목으로 예쁜 한글 보유국의 국민이 되었으니, 이 가을 연애편지를 써봄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도록 만든 글자. 그래서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한국인 사업가의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의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한국어시험’을 치렀다는 에피소드를 통해 유쾌하게 전합니다. 한국 ‘여권파워’가 높아지면서 한국 위조여권으로 국경을 넘는 사례가 증가하자 핀란드 국경수비대가 생각해 낸 방법이라고 합니다. 총 8개의 시험문제가 제시되었는데, 난이도가 그리 쉬운 편은 아닌 듯합니다(저도 8문제 중 2문제는 풀지 못했습니다). 비록 한국인임을 100%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예쁜 한글로 손편지는 꼭 써 봐야겠습니다.

이어서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국문소설의 시발점이 된 ‘쾌재정’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상주시 이안면에 위치하는 ‘쾌재정(快哉亭)‘은 난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가 만년에 국문소설 『설공찬전』을 지은 곳입니다. 〔스토리 이슈〕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 『수운잡방』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수운잡방』이 얼마 전 보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총 121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 항목마다 재료의 사용에서 조리, 가공법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조선시대의 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소식 이외에도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조리서가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로 만들어졌습니다. 작년에 일반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강선주 작가의 〔수운서생〕이 바로 그 시나리오입니다. 〔수운서생〕은 안동 최고의 미식가 ‘김유’와 먹는 게 제일 싫은 조선의 왕 ‘인종’의 먹방 사극입니다. 이 작품은 현재 ‘쇼박스’와 계약되어 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500여 년 전 쓰여 진 글이 21세기 영화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수운잡방』을 집필한 김유와 그의 손자 김령 선생이 아신다면 크게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두 글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김광현 선생님과 임근실 선생님이 정리해주셨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지만 세대 간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문해력이 저하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고, 발신하는 미디어의 다양화가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문자보다는 이미지로, 글보다는 영상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이 중요해진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문영 작가님의 글 중 학동 병구의 물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뭣 때문에 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야 합니까?”

얼마 전, 문화 다양성에 관한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이문화 감수성 개발 모델은 문화 간 의사소통….’이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에 한 학생이 ‘이문화’가 ‘이 문화(this culture)’가 맞는지 물었습니다. ‘다르다’나 ‘기이하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 이(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한글에는 한자를 모르면,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한자 교육을 받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에 이러한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자 교육을 해야 할까요? 이에 병구의 두 번째 물음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희가 한문 공부를 하면, 한문 구절을 읽은 뒤에 우리말로 새기지 않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우리말로 새긴 뒤에 그것을 공부하면 성현의 도리를 쉽게 배우고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쉽고 예쁜 글자를 익혀서 더 넓고 깊게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랐을 세종의 뜻을 한글날을 맞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집필자 소개

김민옥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조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낙안읍성의 역사문화자원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관해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 공간의 장소성과 스토리텔링, 타문화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이다. 공저로 『영화 춘향전과 한옥』, 『정보혁명』 등이 있고, 「아우서호퍼의 전쟁일기 맥락지식 분석과 스토리테마파크에서의 전유 가능성」 , 「글로벌 콘텐츠화를 위한 전통의 복원과 시각적 재현: 영화 〔춘향뎐〕을 중심으로」, 「타문화 이해와 소통 과정을 통한 로컬 지식의 상호작용적 확장: 베른슈토르프의 부탄 영상물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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